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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아들 내외가 낮에 왔다. 비가 오니 다음에 오라고 했는데, 그러겠다고 한 지 얼마 뒤에 마음을 바꿔 온 것이다. 아내랑 웃으며 얘기했다. 집에 무척이나 오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오랜만에 아들 내외가 오니 좋았다. 며느리가 맛있는 음식을 시켜서 모두 배불리 먹었다.

비가 오는 날은 맛있는 것 먹고 실컷 자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 각자 자리를 찾아서 달콤한 낮잠에 취해 있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그리고 바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몽사몽 간에 내가 일어났다. 위층이라고 했다.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였다. 위층에 새로 이사 왔다면서 떡을 주는 것이었다. 맛있어 보이는 가래떡이 여러 개 비닐로 덮여 있었다. 엉겁결에 받으며 고맙다고, 맛있게 잘 먹겠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우리 집 위층에 누가 이사 온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요즈음 그 집이 나가고 얼마 동안 수리를 한 뒤에 한 집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새로 이사 온 집이 이사했다 해서 떡을 돌릴 줄은 정말 몰랐다. 아니, 내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아예 들어있지 않았다.

떡은 금방 뽑아낸 것 같았다. 매우 따뜻했다. 아내와 아들 내외랑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마치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요즈음에 이렇게 이사를 했다고 해서 떡 돌리는 집이 어디 있느냐고, 그 집은 퍽 인정이 많아서 그렇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위층 아주머니가 너무나 고마웠다. 다른 것보다도 이웃 간의 따뜻한 정을 직접 나서서 나누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사람 사이의 훈훈한 인정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시골에 살다가 1971년 6월 말에 서울로 올라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길음동에 두 누나가 전세로 사는 방 한 칸에 나도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부엌도 따로 없었다. 대문 열면 바로 왼쪽에 우리 방이 보였다.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왔는데, 오른쪽에 세 들어 사는 젊은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주면서 먹어보라고 했다.

삼각형 모양의 빵이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얼른 받아 입에 넣었다. 빵 두 쪽이 마주 붙었는데 속에 무엇인가가 들어있어서 조심해서 먹어야만 했다. 아, 그 맛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니! 그건 바로 딸기잼을 넣은 식빵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그것을 먹은 것이었다. 그렇게 맛있는 것을 준 아주머니가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1975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왕십리에서 살았다. 방 한 칸은 같았지만 그래도 거기는 조그만 부엌이 있어서 생활하기가 좀 나았다. 중학교 다니는 손자를 돌보는 주인 할머니가 나를 그 집 마루로 불렀다. 그러면서 이것 좀 먹어보라고 했다. 그들이 먹는 것을 보고 나도 무엇인가를 옆에 있는 묽은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그것 역시 아주 맛있었다. 나중에 알았다. 오징어를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었다는 것을.

두 누나가 아무리 살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 하나 못 사줄 형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나가 딸기잼 식빵이나 오징어를 몰랐거나 아니면 본인이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사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 두 가지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맛있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아울러 그것을 따뜻한 정으로 이웃과 나눈 젊은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종종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을 남에게 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웃으로부터 매우 큰 사랑과 정을 받았기 때문에, 때때로 나도 그 이웃들처럼 몸으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몇 년 전 한가위 즈음에 성당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과 얘기를 나눴다. 부산이 고향인데 이번에 일이 있어서 가지 못하며, 송편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가위 전날에 우리는 온 가족이 모여서 정담을 나누며 송편을 빚었다. 먼저 한번 쪄냈는데 그가 생각이 났다. 아내한테 말해서 그릇에 담아 그의 집에 갔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데 송편이라도 맛보라고 그에게 줬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마워했다.

작년 7월에 가족들이 모여서 조촐하게 내 환갑잔치를 했다. 요즈음에 누가 환갑잔치를 하느냐고 하지만, 나도 두 누나가 했던 것처럼, 가족이 모여서 간단하게 식사하고 맞춘 시루떡을 나눠 먹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 그 떡을 넉넉하게 싸주었다.

그때 한 집이 생각났다. 부부가 고물을 모아서 열심히 살아가는데, 나를 보면 항상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는 그들에게 떡을 갖다 주고 싶었다. 떡을 손에 들고 가는 나의 발걸음은 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분이 아주 좋았다.
첨부파일
이사가래떡.jpg

태그:#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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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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