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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또한 모든 것을 이어주는 존재다. ‘이음과 매개, 변화와 극복’은 자기희생 없인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옛 다리부터, 최신 초 장대교량까지 발달되어온 순서로 다룰 예정이다. 이를 통해 공학기술은 물론 인문적 인식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기자말]
커다란 돌 지네가, 유유히 흐르는 세금천 물살을 이겨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모습을 닮아있다.
▲ 농다리 전경 커다란 돌 지네가, 유유히 흐르는 세금천 물살을 이겨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모습을 닮아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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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에 가면 특이한 다리를 만날 수 있다. '농(籠)다리'라 불리는 석교(石橋)다. 다리는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제법 굵직한 세금천(洗錦川)을 가로 지른다. 이름에 들어간 '籠(농)'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분분하나, '돌이 무더기로 한데뭉친'이란 뜻으로 유추하는 게 가장 타당해 보인다. 다리가 축조된 연대는 정확치는 않으나, 전문가들이 신라 말엽이나 고려 초기로 추정한다.

이토록 대단한 다리를 지키고 있는 돌

농다리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을 가진 다리다. 다리 형식을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어떤 방식으로 분산시켜 구조물 안전성을 확보하느냐의 차이'로 구분한다는 측면에서, 농다리는 분명 특이한 구조물임엔 틀림없다.

창원 주남저수지 인근에 있는 '주남새다리'와 유사하나, 그 구조는 판이하다. 두께 16∼20cm의 넓적한 돌을 교각사이에 걸쳐 상판으로 삼았기에, 굳이 분류하자면 널돌다리(板形石橋)로 볼 수 있다. 원 지반은 긴 세월 세굴이나 침하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아주 단단한 흙이거나 암석일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농다리를 축조한 모습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농다리 전시관에서 촬영하였다.
▲ 농다리 축조 그림 농다리를 축조한 모습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농다리 전시관에서 촬영하였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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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각과 상판이 얹힌 모습이 절묘하다. 교각 사이를 흐르는 물과, 그 아래 잡석층이 쌓여 물의 속도를 늦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농다리 부분 모습 교각과 상판이 얹힌 모습이 절묘하다. 교각 사이를 흐르는 물과, 그 아래 잡석층이 쌓여 물의 속도를 늦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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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다리의 특이성은 무엇보다 교각 축조방식에 있다. 교각은 '튼튼한 일체형 구조물을, 지반에 깊이 박거나 땅을 깊이 파내 단단히 고정'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농다리는 이런 원칙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다. 크고 작은 잡석을 '막쌓기'로 교각을 축조한 것이다. 돌무더기가 천년 이상을 버텨낸 비밀은 바로 돌쌓기에 있다. 허술한 듯 보이지만 매우 정교한 기술로 돌을 '들여쌓기와 엇물려쌓기'를 했다는 점이, 바로 비밀을 푸는 열쇠다.

가장 큰 돌을 강바닥에 놓는다. 지반과 닿는 부분 틈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어 정교하게 고정시킨다. 그 위에 또 다른 돌을 들여쌓는다. 같은 방법으로 틈을 고정시켜 단단히 자리를 잡아준다. 위에 얹는 돌은 철저히 엇물려 쌓는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돌을 쌓아 나간다. 크기 30∼40cm의 돌을 들여쌓아, 위에서 내려다보면 물고기 비늘이 잇닿아 있는 모양으로 보인다. 평면은 물살 저항이 최소화되도록 '긴 타원형의 나룻배' 형상을 하고 있다.

아울러 쌓인 돌 틈으로 물살이 무시로 드나들어, 저항이 그만큼 줄어들게 고안했다. 이런 방식으로 너비 1.2m, 길이 3.6m, 높이 1.5m의 개개 교각을 만들었다. 아래는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총 28개 교각을 만들다 보니, 멀리서 바라보면 거대한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쌓여진 돌무더기 자체가 지대석(址臺石,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잡은 터에 쌓은 돌) 역할을 한 다리라 할 수 있다. 널다리나 널돌다리에서 흔히 사용하는 지대석을 위로 쌓아올려, 농다리에선 교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평면선형은 약간 구부러진 곡선이며,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면 '큰 지네'가 기어가는 형상이다. 교각 가장자리 간 거리(경간)는 80∼90cm로 비교적 좁다. 이 위에 상판역할을 하는 길이 1.3∼1.7m, 너비 1.0m 내외의 돌 판을 얹어 다리를 만들었다. 상판역할을 하는 돌 판과 교각 역할을 하는 돌무더기는, 절묘하게 아귀가 맞아들어 교묘하게 잘 짜인 형상을 하고 있다. 교각은 평균적으로 수면 위아래로 각각 76cm 가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측정되었다. 다리는 93.6m 길이를 가진 긴 지네 모습이다.

농다리는 자색(紫色) 계열 사암(砂岩)으로 축조되었다. 사암은 퇴적암의 일종으로, 여러 암석이 침식과 풍화작용 등으로 잘게 쪼개져 한곳에 쌓였다가, 외부에서 가해진 어떤 작용으로 굳어져 암석이 되었다. 따라서 사암은 그리 단단한 돌이 아니다. 이런 돌들이 모여, 천년 이상을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흡사,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백성들이 한데 모여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똑 닮아있다.

농다리 바로 잇닿는 하류에서부터 물살이 빨라진다. 이곳엔 물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되어 있다. 세금천을 가로질러 바닥에 두터운 잡석 층이 고르게 깔려있다. 농다리와 이 잡석 무더기로 인해 물살이 느리게 다리 밑을 통과한다. 다리 밑을 통과한 물이, 이 잡석층의 저항을 받기 때문이다. 이 지대를 통과한 물은 낙수하듯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막돌을 쌓아 만든 다리가, 천년 넘게 버텨낸 충분한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생각된다.

농다리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가, '막돌들의 조화'로만 이뤄진 다리라는 점이다. 크고 작은 돌들이, 각자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것만으로 천년을 견뎌냈다. 돌은 여러 광물이나 유기물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존재다. 여러 물질이 자연작용으로 한데 모여, 단단한 결정체를 구성했다. 하나로 뭉쳐진 집합체가 된 것이다.

절대 서로 비하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쉽게 분열하지도 않는다. 외부에서 강력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분체(粉體)의 본성을 끝까지 지켜낸다. 이것이 돌의 특성이다. 함부로 비하할 대상이 절대 아니다. 이런 막돌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농다리다.

둘째, 하늘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28숙(宿)'을 형상화했다. 고대부터 하늘의 별을 28숙으로 구분했다. 하늘을 동서남북 4개 방위로 구분하여 궁(宮)이라 칭하고, 4궁을 각 7개 숙(宿)으로 나누어 28숙을 정한다. 이는 우리 옛 도시계획에도 적용된 방법으로, 조선 신도시 한양은 각 4개 방위에 인의예지(仁義禮智)로 도성성곽 4대문을, 춘하추동(春夏秋冬)으로 궁궐 4대문을 정하였다.

여기에 도시를 둘러싼 산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형상화시키고, 그 내부에 가로를 구획해 만들어낸 도시다. 이를 바탕으로 궁궐 내 각 전각 배치와 좌향, 도성 가로구획, 집단 주거지와 상업지, 산과 물길을 고려하여 도성을 건립하였다. 농다리는 28숙 별자리를 28개 교각 수로 형상화시켜낸 다리다.

셋째, 농다리는 '수월교(水越橋)'라는 점이다. 홍수가 져 많은 물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다리 위로 물이 넘쳐나도록 설계되었다. 홍수 때 물이 다리를 넘치게 계획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론 매우 우매한 짓이다. 한강 잠수교 등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매우 위험한 판단이다. 큰물이 다리 위로 넘치게 되면 구조체에 변형이 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농다리는 홍수 진 물이 자연스럽게 다리 위를 넘치도록 설계하였다. 그만큼 물의 흐름에 순응했다는 반증이다. 흐름을 방해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런 조화를 이뤄낸 보기드믄 다리다.

무릉도원을 꿈꾸는 커다란 돌 지네

농다리는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길 징조가 보이면 신호를 보냈다 전해진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야금야금 조선에 마수를 뻗치자 이에 항거한 '동학농민혁명' 땐, 장마에 다리 상판이 물에 떴다고 전한다. 1950년 동족상잔 비극인 '한국전쟁' 때는, 다리가 몇날 며칠을 울었다 한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돌무더기가 쌓인 것처럼 보이는 농다리가, 울음 등으로 변고를 슬퍼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땀을 흘린다는 비석(碑) 얘기는 들어봤으되, 다리가 울었다는 이야기는 희소해 무척 흥미롭다.
 
겨울비 내리는 농다리 위를 여유롭게 걷고 있는 풍경이,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 평화로운 농다리 풍경 겨울비 내리는 농다리 위를 여유롭게 걷고 있는 풍경이,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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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다리에 얽힌 전설은 주로 다리가 만들어진 사연과 관련된 이야기다. 굴티마을은 상산 임씨의 오랜 세거지(世居地)로 '임연'이란 장군이 살았다고 전한다. 매일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하는 장군이 한 여인을 만난다. 추운 겨울, 한 여인이 개울을 건너지 못해 애를 태운다. 사연인 즉, 아버지가 위독한데 강물에 막혀 가 뵙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장군이 용마를 타고 주변 돌들을 모아 급하게 만든 다리가 농다리라는 거다.

또 하나는, 힘이 장사인 장군 누이와 관련된 이야기로 둘은 어느 날 죽고 사는 내기를 한다. 장군은 굽 높은 나막신에 맨 송아지를 끌고 서울에 갔다 오고, 누이는 돌다리를 놓는 시합이다. 돌다리는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 장군은 돌아올 기미가 없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장군 어머니가, 뜨거운 팥죽으로 누이가 다리 놓는 일을 지연시킨다. 결국 장군이 이기고 누이는 약속대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마지막 교각을 놓지 못하고 죽었다는 전설이다.

진천은 김유신이 태어난 고장이다. 그의 아버지 김서현은 금관가야 왕족 후손으로 진골이다. 신라는 골품제가 엄격해 골품 외 통혼(通婚)은 금지되어 있었다. 김서현은 성골인 진흥왕 아들 갈문왕 입종의 손녀 만명(萬明)에게 반하여 동거에 들어간다. 골품제를 어기고 그녀를 부인으로 삼은 것이다. 둘 사이 잉태한 김유신은 20개월 만에 세상에 나왔다 한다. 무격신앙 숭배자들이 신격화한 이야기로 보인다.

신라에서 살아남으려는 김유신 집안의 절치부심이 눈에 보인다. 아버지는 골품제까지 어겨가며 성골에 진입하려 애를 썼다. 김유신은 누이동생을 권력 핵심으로 부상하는 김춘추에게 시집보낸다. 금관가야 왕족으로, 신라에서 귀족으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처절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김유신에게 신라는 원수의 나라에 다름 아니다. 진위 여부를 떠나, 농다리는 김유신이 군사를 몰아 백제를 공격한 루트로도 알려져 있다. 태어나 태를 묻은 고향으로 전쟁의 험로를 잡은 것이다.

진천을 흔히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부른다. 물난리나 가뭄피해가 적은, 자연환경이 뛰어난 곳이란 의미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한다는 길지다. 겨울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주며 사계절 맑은 물을 얻을 수 있어 안온한 삶이 보장된다는 고장이다. 여기에 순박하고 후덕한 인심이, 어느 때라도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살기 좋은 곳이 진천이다.

진천이 현존하는 무릉도원일까? 살아 충만한 행복을 느끼는 고장이라면, 죽어 어디에 묻히는지가 무에 그리 중요할까? 진천은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고장이다. 진천에 가면, 무릉도원을 꿈꾸는 커다란 돌 지네가 엉금엉금 세금천을 건너고 있다. 그 등에 올라 타 같이 무릉도원에 다다라 보는 것은 어떠한가?
 

태그:#농다리, #돌_지네, #세금천, #진천,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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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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