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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영(1868-1953)
 이시영(1868-1953)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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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은 1933년 여름 여전히 쫓기는 신분이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찾았다. 일본군이 주둔한 정세를 살피고 지인들을 만나 정보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뽑았다.

중국인 황염배(黃炎培)의 『조선(朝鮮)』이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망명객이지만 고국의 이름을 딴 중국인이 쓴 책이라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이시영은 문필가나 학자 출신이 아니기에 남긴 글이 거의 없다.

황염배의 책을 읽고 그 거짓된 내용을 반박하여 쓴 『感時慢語(감시만어)』가 유일하다. 책의 부제가 '황염배지한사관(駁黃炎培之韓史觀)이였다.

먼저 황염배는 어떤 인물인가.

근대 중국의 교육학자로 일본에서 유학하고, 신해혁명 뒤 상하이에 중화직업교육사를 설립하는 등 당시 중국 정계와 교육계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중국공산당 계열로 해방 뒤에는 중국 정부의 정무원부총리, 전국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황염배는 대련에서 일본인 한학자 마쓰사끼 등의 도움으로 만철 부설 대련도서관에 소장된 한국관련 자료와 총독부가 만든 통계 및 보도자료를 수집한 다음 총독부 주선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1927년 10월 11일에 부부동반으로 대련에서 한국으로 향발하여 서울, 인천, 수원, 평양 등 여러 지방을 여행한 뒤 한 달 뒤에 대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초부터 무려 120일 즉 1928년 3월까지 4개월 남짓한 작업을 거쳐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의 한국개설서를 완성하였고 다시 1년 후의 1929년 9월에 당시 중국 최대의 민영출판사로 손꼽히는 상해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위 책을 출간하였다." (주석 1)


본문 5장에 부록 1장까지 355쪽에 달하는 이 책은 제1장 서언, 제2장 천연적 조선, 제3장 과거의 조선 및 조선사람, 제4장 현재의 조선, 제5장 현재의 조선사람, 부록 조선의 중화교민 등으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황염배는 위 책자에서 일본식민당국의 한국통치를 소위 '선정(善政)'으로 주장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미 일본과 동등의 고등교육권을 향유하게 된 한국인들도 모름지기 피를 흘리는 무장투쟁보다는 학문적 노력을 통해 그 어떤 강국도 감히 업신여겨 볼 수 없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약자로서 취할 수 있는 '광명대도(光明大道)'라고 호소함으로써 사실상 일제의 한국식민통치를 찬양하면서 한민족의 항일구국투쟁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황영배 1929:14)

따라서 일제식민당국의 식민통치자료를 바탕으로 편찬된 위 책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 및 민족특성에 대한 온갖 오류와 편견이 가득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는 물론 일제식민당국의 의도적인 왜곡된 안내와 소개의 영향도 있겠지만 전통적인 중국 중심적 시각의 영향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주석 2)


황염배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고 전통적인 중화사상이 길들여서 조선역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내용을 담았다.

황염배는 「조선국호계통도(朝鮮國號系統圖)」에서 고구려ㆍ백제ㆍ신라를 모두 일본속(日本屬)으로 표시하였으며, 심지어 검증 안된 임나(任那)도 기록하면서 일본령이라고 하고 있다.

「일본여중국세력지병진(日本與中國勢力之並進)」에서도 일제 식민사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곧 신공황후와 임나일본부를 언급하면서 일본이 한반도 남쪽을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나아가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멸망시키자 일본이 특별히 임나의 일부인 웅진(熊津)을 할애하여 그 나라를 유지시켜 주었고, 고구려 역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조선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는 과정과 그 후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요령있게 서술하고 있다. (주석 3)


이시영은 비록 쫓기는 몸이지만 중국사회에서 비중 있는 황염배의 책을 읽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좀처럼 화를 내거나 가슴 아픈 일이 있어도 내색을 하지 않은 성품이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책을 구입하여 은신처인 항주(杭州)로 돌아와서 이를 비판하는 『감시만어』를 저술하였다. 그가 서둘러 책을 쓴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분노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이시영이 『감시만어』를 저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 자신의 인식과 당시의 임시정부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가 오랫동안 임시정부의 재정을 담당해 오면서 느낀 것은 자금부족 상태에서는 독립운동이 더 이상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임시정부가 자금부족 상태를 벗어나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독립운동의 방략은 중국과의 합작에 의한 대일항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되도록 중국과의 관계가 원만히 이루어지기를 원하였다. 그렇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인이 중국인에게 일본의 주구(走狗)가 아닌 중국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는 동반자라는 인식을 주어야만 했다. 이 점에서 중국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황염배 같은 인물이 조선과 조선인을 왜곡하는 저술을 남긴 것은 기대에 상반되는 것이었다. (주석 4)


주석
1> 권혁수, 「근대 이후 중한 양국의 상호인식」, 『사회과학논집』, 제38집 1호, 2007년 봄.
2> 앞과 같음.
3> 정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연구」, 『한국사학사학보』4, 2001년 9월.
4> 정욱재,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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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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