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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군산의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제인스빌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미국 제조업의 중심지였던 중부의 제인스빌에서 지엠이 자동차 생산공장을 철수하며 지역 공동체가 겪는 위기에 대한 기록이었는데, 희망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씁쓸한 글이었다.

미국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제조업의 위기를 겪었고, 경쟁에서 밀려난 제조업 기반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수많은 도시들이 폐허가 되었다. 트럼프의 중요한 지지기반이라는 중부의 '러스트 벨트'라고 불리는 도시들은, 철강산업이나 자동차 산업과 같은 주요 산업기반이 무너지며 상처를 입은 지역들이다.

우리에게도 지엠이 철수한 군산이나 조선업의 위기를 대비하고 있는 거제가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은 거제의 산업전환에 대한 고찰을 담은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이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겉표지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겉표지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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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중공업 가족'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거제라는 지역공동체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주민들이, 어떤 식으로든 지역의 산업과 연관되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포항도 대부분 철강산업과 관계되어 있으니 거제의 '중공업 가족'의 먼 친척쯤 될 수 있겠다.

포항에서도 그렇듯, 산업의 부침은 지역 경제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으로 미치고, 해당 산업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지역 경제의 단기적인 해법으로 쓰여왔다. 이렇게 시작된 지역 위기에 대처하는 처방의 악순환은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수록, 산업의 규모가 클수록 헤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30년 이상 계속된 산업의 부침을 그대로 감내하며, 결정을 미뤄둔 지 오래이다. 게다가, 중공업의 쇠퇴와 함께 지역의 위기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꼭 서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나름대로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며 살아가는 도시는 있다. 2016년 기준 서울의 1인당 GRDP (1인당 지역 총소득)는 4만 773달러였다. 1년에 4,400만 원을 조금 넘게 버는 셈이다. 서울은 1위가 아니다. 1위는 울산으로 5만 1,000달러였다. 1년에 5,000만 원을 버니 서울보다 1,000만 원가량을 더 버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 책의 주인공인 거제는 그보다 6년 전인 2010년에 이미 4,146만 원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지역이 벌어들이는 돈의 규모가 엄청났던 셈이다. 더불어 근속연수도 산업도시가 훨씬 길었다. 거제에 있는 대우조선의 2015년까지의 평균 근속연수는 17년 내외였고,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의 근속연수는 2017년까지 18년이었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무난하게 정년까지 갈 수 있는 회사로 정평이 나 있었다. 수도권에서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직장 중 하나인 삼성전자는 평균 11년, 네이버는 5년 내외이다. 달리 말하면 서울을 택하지 않고도 산업도시에서 높은 임금과 안정적인 고용상태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던 셈이다. - p.23

대한민국의 제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가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에서 밀려난 제조업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밀려들던 시기가 그랬다. 울산은 자동차와 화학, 중공업의 기반이, 거제는 조선과 중공업의 기반이, 비슷한 시기에 포항은 철강 산업을 기반으로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방 도시는 산업과 함께였다. 대량 고용을 필요로 했던 제조업은 지방 도시의 부흥을 가져왔지만, 해당 산업의 부침에 따라 도시 전체의 경제가 요동친다는 것은 반갑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량 고용을 창출했던 산업이 대부분 남성 노동자에 의존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지역에서 태어난 여성들은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를 떠나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거대 제조업들의 경쟁력을 장담할 수 있을지, 언제까지 목전에 다가온 이들 도시의 위기를 모른척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졌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외친 구호이다. 피폐해진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이 된 트럼프가, 그동안 미국을 떠난 제조업 기반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정책을 펼치며 내세운 구호였다.

이로 인해 미국 시장에서 유리하게 판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글로벌 생산기지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공장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고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바마 재단의 첫 번째 문화 콘텐츠 프로그램으로써 주목받았던 <아메리칸 팩토리>(2019)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생산기지 이전만으로 '다시 미국이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영화는 <제인스빌 이야기>에서와 유사하게 지엠의 자동차 생산라인이 철수한 중부의 데이턴이란 도시를 무대로 한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공장이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 기대했지만, 가장 미국적인 중부 미국의 데이턴이라는 도시에 들어선 '푸야오'라는 중국 기업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낼 뿐이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감독이 보여주는 현실은 푸야오 공장의 2만 2천 명의 미국인 노동자들이 200여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섞인 작업 환경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군산에 들어오기로 한 '명신'이라는 중국의 전기차 업체가 떠올라서 불안했다.
 
과학기술처는 중공업 분야에서 1981년까지 3만 5,000명가량이, 1991년까지 예측하면 35만 명가량이 부족할 것으로 보았다.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기술을 가르칠 학교 자체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는 조선업을 비롯한 중공업에 진출한 기업들에게 직업훈련소를 만들어 인력을 자체 충원할 것을 권고했다 (사실상 의무였다). - p.120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후 성장하는 동안의 대한민국 교육의 중요한 목적은, 현장의 산업이 요구하는 인력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학교의 전공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자리의 필요에 맞추어 만들어졌고, 학과의 규모를 조정했다. 지난 30~40년간 대한민국 교육은 대규모 중공업 제조기반에 투입될 수 있는 인력의 배출을 목표로 이루어졌고, 이에 맞춰 대학의 전공이나 직업 전문학교가 새로 생겨났다.

돌이켜보면, 국가 산업의 전환이 단순히 새로운 산업의 부흥에 대한 산업 영역에서만의 논의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산업의 전환이라는 것은 국가 교육의 커리큘럼도 산업 전환에 맞춰 함께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4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공룡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산업도시 거제에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보장된 정년과 높은 연봉으로 대표되던 정규직 노동자들은 유연성과 저성장의 세계에서 화석같은 존재가 되었다. ...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2015년과 2016년에 걸쳐 희망퇴직한 노병들은 외부 사람들의 비난 앞에서 "나는 일터를 망치지 않았다"고 눈물로 항변한다. 동남권에서 가장 좋은 직장인 조선소에 취업해 선배들과 같은 여유로운 삶을 꿈꾸던 엔지니어들은 갑자기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가 되어버려 당황스럽다. - p.318~319

산업의 전환은 많은 상처를 동반할 것이다. 지역의 부흥을 함께 일궈낸 지역 공동체의 수많은 사람들을 쓸쓸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하는 것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얼마 전 정부는 '디지털 뉴딜'이라는 새로운 정책 비전을 통해,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 맞춰나갈 수 있는 새로운 산업으로의 전환을 제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의 산업화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현장은 생각보다 느리게 변한다. 거제의 조선업은 지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산업의 부침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애를 써왔지만, 여전히 정부의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것에 대해 갈등이 첨예하다.

모든 인간의 이상향이 그래왔듯이, 대한민국의 급격한 성장을 이끌어온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도 금방 깨져버릴 빙판처럼 위태롭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30년을 어떻게 부드럽게 이어받을 수 있을까? 산업의 전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바마 재단의 1호 프로젝트였던 <아메리칸 팩토리>는 작년 아카데미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부분의 수상작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확인한 미국 제조업의 재부흥 정책은 문제투성이였고, 대한민국의 공장 바꿔치기식 지역 살리기도 여전히 불안을 품고 있다.

디지털 뉴딜을 통한 산업의 전환이라는 구호가, 부디 실체없는 허상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고민을 미루지 말자. 더 이상, 피하지 말자.

책정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양승훈 지음, 오월의 봄.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양승훈 (지은이), 오월의봄(2019)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아메리칸 팩토리, #제인스빌 이야기, #산업의 대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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