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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서 군자(君子)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공자는 "말이 실천보다 앞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君子恥其言而過其行)"을 군자라 했다. 또 "옛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앞세우지 않은 것은 실천하지 못할까 두려워했기 때문(古者言之不出恥躬之不逮也)"이라고도 했다. 삼단논법으로 정리하면, 완성된 인격자가 군자인데 군자는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므로 완성된 인격자는 곧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다.

언행이 일치되는 지도자, 사람을 모은다

이를 <원불교 대사전>은 알기 쉽게 풀이해준다. 사전은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그 말에 힘이 실리고 지도받는 사람이 따르게 된다. 말과 행동의 일치는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척도가 되며, 지도자의 경우는 지도받는 사람에게 신뢰를 얻는 지름길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언행이 일치되는 지도자라야 사람들이 따른다는 뜻이다. 유교에서 전통적으로 쓰인 군자라는 말이 현대사회에 와서 지도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문장이다.
  
"박정희 대장 예편" 제목의 경향신문 1963년 8월 30일 기사. 붉은 동그라미안에 '혁명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군복을 벗고 정치인의 길을 간다는 그의 말과, 푸른 동그라미 안에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계속 군인이고 싶은데 나라 사정 때문에 본의 아니게(불운하게) 전역한다는 또 다른 그의 말이 들어 있다.
 "박정희 대장 예편" 제목의 경향신문 1963년 8월 30일 기사. 붉은 동그라미안에 "혁명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군복을 벗고 정치인의 길을 간다는 그의 말과, 푸른 동그라미 안에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계속 군인이고 싶은데 나라 사정 때문에 본의 아니게(불운하게) 전역한다는 또 다른 그의 말이 들어 있다.
ⓒ 경향신문,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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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유명한 언행불일치 사례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1961년 8월 12일 '민정 이양 일정' 발표 건이다. 이날 박정희는 "1963년 초에 정당 활동을 허용한다, 그해 여름 군인들은 물러나고 민간에 정권을 이양한다" 등 일정을 공개적으로 국민 앞에 약속했다. 그러나 지키지 않았다. 그는 전통 개념으로 말하면 군자가 못 됐고, 요즘 말로 하면 신뢰받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박정희가 정권 민간 이양 공약을 발표하기 두 달 전에 발간된 1961년 6월호 <사상계> 권두언(卷頭言: 책 머리말)의 내용이다. 이는 "4·19혁명이 입헌 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군사 쿠데타를 혁명으로 치켜세웠으니, 정론직필은커녕 지독한 곡학아세라 하겠다.

더욱 기이한 것은 권두언 집필자가 장준하라는 사실이다. 속된 말로 '놀라 자빠질 일'이다. "낯이 두꺼운 자들은 아첨하는 말에 능하다(巧言如簧顔之厚矣)"는 <시경>을 원용하자면 장준하는 낯이 두꺼운 아첨배인가?

"5·16은 민족주의적 혁명"이라고 썼던 장준하, 이유는?

장준하!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장쑤성 쓰카다(塚田) 부대에 배치됐다가 7월 7일 홍석훈, 김영록, 윤경빈과 함께 탈출, 한국 금수강산 3000리 두 배나 되는 2356km(6000리) 먼 길을 굶주림과 혹한에 시달리며 걸어서 마침내 광복군에 합류하고, 다시 또 두 달을 걸어 1945년 1월 30일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던 독립지사이다.

그런 그가, 심지어 1975년 8월 17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의문사의 장준하가 5·16을 혁명으로 찬양할 만큼 낯이 두꺼운 사람이란 말인가? 어불성설, 말이 안 되는 추정이다(장준하는 이후 1967년 신민당 국회의원에 당선, 1969년 '박정희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다-편집자 주)

그런데 장준하는 어째서 박정희의 정권 민간 이양 공약을 믿고, 또 독려했을까? 권두언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일견 이해가 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시급히 혁명 과업을 완수하고, 최단 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 공약을 깨끗이, 군인답게 실천해야 한다.

1961년 당시, 장준하는 특히 박정희의 '일관성'에 신뢰를 보냈던 듯하다. 5 · 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 세력은 '혁명 공약'을 통해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라고 약속했었다.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그 약속을 지키라며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장준하 외에도 많은 정치인·지식인들이 박정희의 정권 민간 이양 공약을 섣불리 믿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이라는 전제조건을 소홀히 읽은 오독(誤讀)이었다. 1963년 8월 30일 박정희는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면서 군복을 벗었는데, 그때 "혁명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민정 참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전제조건을 달아놓고 그 핑계로 약속 불이행한 박정희

아직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군정을 계속해야 하지만, 그래도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바꾼다는 놀라운 논리였다. 박정희는 자신이 민간인이 되어 군인이었던 박정희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았다.(주1)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는 박정희의 말은 5 · 16을 일으킨 지 18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실천됐다고 본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그 뒤 부하에게 저격당해 삶을 마치는 불운한 군인은 더는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주 무열왕릉 뒤편 등산로 입구에 있는 문성왕릉. 안내판에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중략)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라고 적혀 있다.
 경주 무열왕릉 뒤편 등산로 입구에 있는 문성왕릉. 안내판에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중략)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라고 적혀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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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정치에서 유명한 '약속 불이행' 사건은 해상왕 장보고와 관련되는 일이다. 신라 45대 임금 신무왕은 장보고의 군사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옥좌를 계승한 문성왕은 즉위 7년(845) 3월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아 그의 은혜를 갚겠노라 약속했다.

신하들이 "섬사람(海島人)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장보고는 문성왕의 약속 불이행에 반발해 이듬해 반란을 도모하다가 정부가 보낸 염장에게 속아 암살됐다.

'약속 불이행' 문성왕, 청해진 폐쇄로 국력 약화 자초

문성왕은 박정희처럼 비명횡사하지는 않았다. 그는 재위 19년(857) 병으로 죽었다.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하고(주2)' 죽은 문성왕은 재위 13년(851) 장보고가 주둔했던 청해진을 없앰으로써 신라가 장악해왔던 '동방 무역의 패권(주3)'도 놓아버렸다. 그 이후 신라는 점점 쇠약해졌다.
  
전남 완도군 완도읍 청해진로 1455에는 '장보고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사진은 장보고 기념관 누리집에 게시되어 있는 '장군 장보고'이다.
 전남 완도군 완도읍 청해진로 1455에는 "장보고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사진은 장보고 기념관 누리집에 게시되어 있는 "장군 장보고"이다.
ⓒ 장보고 기념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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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문성왕 사례를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성어와 견줘본다. 미생지신은 <장자>와 <사기>에 나오는 옛이야기다. 미생은 어떤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자는 오지 않는데 물이 자꾸 불어났다. 미생은 다리 아래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르다가 교각을 부둥켜 안고 죽었다.

<장자>와 <사기>는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지만, 게재 목적은 상반된다. <장자>는 미생을 융통성 없는 사람, <사기>는 미생을 신의 있는 사람의 사례로 들었다. 박정희와 문성왕은 <장자>처럼 생각했을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자>의 풀이는 틀렸다. 문학적 표현으로 가득한 <장자>가 어째서 미생을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보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지만, 물이 자꾸 불어난 것은 비유다. 피하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은 신의를 지켜 죽어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미생은 죽은 것이다. 세계사의 의인(義人)들은 모두가 그렇게 죽었다.

세계사 의인, 모두 약속을 지키려 노력한 사람들

공자는 "말이 실천보다 앞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을 군자라 했다. 약속했으면 지켜야 군자라는 뜻이다. 미생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이기에 목숨을 던져서 약속을 지켰다. 박정희가 민정 이양 약속을 지키고, 문성왕이 장보고와의 약속을 지켜 청해진을 더욱 발전시켰더라면 두 사람은 (지금처럼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아니라) 나라를 살린 의인으로 오롯이 기록됐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주1) 물론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거쳤다. 당시 박정희는 46.6%, 윤보선은 45.1%를 득표했다. 차이는 15만 표에 불과했다. 야당 후보가 7명이나 출마한 것도 박정희의 승리에 도움이 됐다.
(주2) 다음 백과(인터넷판), <문성왕>
(주3) 천재학습백과(인터넷판), <학습용어사전 한국사> 〈청해진〉

태그:#박정희, #장보고, #문성왕, #8월12일 오늘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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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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