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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일곱 채의 집에 대한 기억을 산다.

'엄마의 집'과 '여자의 집'은 다른 빛깔로 다가온다. 엄마가 '여자의 집'을 가질 기회는 없었을까? 누군가의 아내, 엄마, 어느 집 며느리가 아닌 엄마만의 공간, 임피 딸 부잣집 막내딸이었던 춘자 여사가 머무는 그녀만의 집 말이다.

엄마는 요양원에 계신다. 그곳이 엄마의 일곱 번째 집이다. 이제 엄마는 영영 그 어떤 집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외할머니 집 옆으로 강이 흘렀다. 외가에 갈 때 엄마는 한복을 차려입었다. 건너야 할 다리가 무서워 엄마 치마를 꼭 붙잡았다. 외숙모는 갈 때마다 한 보따리의 노란 인절미를 해서 들려 보냈다. 엄마의 집에 가기 위해 우리는 기차를 탔다.

엄마의 두 번째 집은 할머니 댁이었다. 첫 아이인 나를 가졌을 때 동치미가 먹고 싶었던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칠흑 같은 밤을 더듬으며 뒤꼍에 묻어 놓은 동치미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양푼 가득 동치미를 후룩후룩 마시고 나면 그립던 친정붙이들도 다 잊을만했다던가.

홀시어니 밑에 아들만 다섯인 집의 셋째 며느리였던 엄마는 결혼 오 년이 지나도록 아기를 갖지 못했다. 그런 동생을 위해 여섯 명의 언니들은 임신하기에 좋은 것은 무엇이든 이고 지고 먼 길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정성 어린 언니들의 바람으로 첫 아기를 갖게 된 엄마.

"애기도 못 낳는 며느리, 쫓아내 버리려고 했는디, 용케 밥값 했구만!"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 안타깝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셋째 동생 돌 잔치를 했던 집은 아버지가 형들과 함께 지은 집이었다. 분가해서 나온 엄마와 아버지는 달랑 손수레 하나에 가재도구를 싣고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꾸렸고 우리는 오 남매가 되었다. 복닥거리며 지지고 볶았던 개정면 아동리 충량 518번지 시절이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청춘을 바쳤고 인생의 많은 부분을 애쓰며 살아낸 시절, 내 인생의 거의 모든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원예농업을 하셨고 엄마는 늘 밭머리에 앉아 해가 지도록 호미질을 했다.

문화동 시절의 기억은 춥기만 하다. 농토를 정리하고 군산 시내로 나온 아버지는 많이 지쳐 있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겨울이면 영농자금 상환과 생활자금으로 얻은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대출을 받아야 하는 악순환이 해마다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으나 결과는 언제나 손가락이나 빨아야 하는 현실이 힘에 부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인 것은 내가 취직을 하면서 생활비를 조금씩 보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험도 없이 시작한 식당을 일 년도 안 돼 접은 아버지는 벽을 향해 돌아눕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엄마가 닭을 우려서 국물을 끓여낸 냉면은 정말 맛있었다. 요리법도 없던 시절, 엄마의 감으로 만들어 낸 냉면이었다.

내가 결혼을 하면서 떠나온 집이기도 했던 문화동 집. 아버지는 신혼살림을 싣고 떠나는 나를 배웅하고 오래 우셨다는 소식을 동생을 통해 전해 들었다.
  
 성산 요동 마을
 성산 요동 마을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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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후 내가 물어물어 집을 찾아간 곳은 성산면 요동이었다. 아버지가 선택한 길이었다. 햇살이 눈 부신 초가을이었다. 잡초가 자라 허리까지 오는데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으며 연탄 놓을 자리를 손보고 계셨다. 그 막막하고 외로운 얼굴을 보아버린 것일까? 나는 짐짓 참 집이 괜찮다고, 어디서 이런 집을 구하셨느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부엌에서 나오는 엄마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엄마는 그 집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동네 친구들을 몽땅 잃은 엄마는 말이 줄었다. 본래도 말이 많지 않았던 엄마였는데, 낯선 환경과 친구 하나 없는 이곳의 생활에 영 적응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하루에 세 번씩 전화를 걸 때도 있었는데, 그저 군산으로 이사 온 큰딸이 반가워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다섯 번째 집에서 엄마는 지아비를 잃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부부의 이별이 이렇게 왔다.

내가 엄마를 모시게 된 것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가 먼저였다. 작은 도서관과 집에서 틈틈이 아이들 독서 논술 수업을 하는 내가 엄마와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이다. 큰사위 집은 엄마의 여섯 번째 집이 되었다. 엄마는 가끔 베란다 밖 하늘을 말없이 바라볼 때가 있었다.

"엄마, 무슨 생각해?"
"내 살 궁리하지 뭐.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 없잖어."

    
 엄마가 올려다본  하늘
 엄마가 올려다본 하늘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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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면서 큰 사위 집을 내 집이려니 하기로 했다. 엄마는 이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혼자서 밥을 끓여 먹으려 하지 않았고 거동이 불편했으며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전경린의 장편소설 <엄마의 집>에서 엄마는 말한다. '사십 몇 년 동안 줄곧 마음 안에서만 갇혀 살았던 기분이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문밖으로 나간 적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살아온 기분'이라고. 엄마도 그랬을까? 한 세월 겨를 없이 살아내고 나니 남은 것은 의지대로 되지 않는 고장 난 몸, 자꾸만 잊어버리는 기억들과 속절없이 먹은 나이뿐인 삶.

엄마의 집은 밥이 끓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때로는 보듬는 집이라고만 생각했다. 거기에 엄마라는 여자는 없었다. 한 여자의 자아가 외롭고 허무하게 시들어가고 있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끝없이 엄마이기만 고집했던 자식들 앞에서 엄마는 한 번도 여자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선택한 삶에 따라 엄마의 집은 결정되었다. 그런 엄마가 아버지 없이 새로운 집을 가졌다.

엄마의 일곱 번째 집 요양원이다. 여든여덟의 엄마를 끝까지 돌보지 못하고 엄마에게 또 낯선 집에 머물게 하고 말았다. 다행히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언제든지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코로나 19' 때문에 엄마를 5개월여 동안 만나지 못했다. 면회가 되어 드디어 엄마를 만나게 되었는데, 마스크를 쓴 얼굴에 투명 비닐 커튼을 사이에 두고 눈만 껌벅이며 서로 바라보는 일이라니. 이 무슨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인가. 설상가상 귀가 어두워진 엄마는 자식들이 하는 말을 사회복지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비닐 커튼을 걷고 손이라도 덥석 잡아보고 싶은 엄마, 볼이라도 부벼보고 싶은 엄마가 비닐 커튼 너머에 있다.

이제 엄마는 일곱 번째 집에서 자식을 기다리고, '코로나 19'라는 못된 녀석이 빨리 지나가기를, 또 당신이 언젠가는 가야 할 그 먼 곳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엄마의 일곱 번째 집이 엄마에게 편안한 집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엄마는 자신만의 '여자의 집'을 가지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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