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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9시. 늦잠으로 시작되는 느긋함이 주말의 묘미이지 싶다.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먼 올빼미형 인간인 나에겐 더없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나는 늦은 아침을 시작하면서도 잠이 덜 깬 상태로 주방으로 향한다.

아침 메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냉장고에서 만들 재료들을 차례로 꺼내 일사불란한 나의 손가락들과 내 몸 세포들이 모두 합심이 되어 30분 만에 아침상을 차려먹이고 치우기를 한다. 늦은 아침을 먹었으니 점심도 늦은 감 있게 준비하며 시간과의 속도전으로 손 빠르게 '냉국수'를 준비해 나의 가족에게 대접했다. 이렇게 주말을 '끼니 챙기기'의 속도전으로 보내다 보면 내 몸의 정신력과 체력은 방전되어 간다.

주말이 지나고 평일이 되면 나 빼고 온 가족이 학교와 회사로 바쁘게 가버린다. 전날과 다른 고요함이 찾아든 집안을 정리하며 월요일을 활기차게 시작하고픈 내면의 소리와는 달리 내 신체는 주말 동안 방전된 체력을 충전하고자 아침부터 누울 자리를 찾는다. '삼시 세끼'의 해방에서 오는 긴장의 풀림인 것이다.

한주의 시작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의 삼시 세 끼 중 아침은 '내면의 한 끼'로 시작한다. 아이들은 가방을 메고 남편은 서류를 들고 각자의 위치로 떠나면 고요함이 집안 공기를 데운다. 주말 동안 시끌시끌하던 모든 공간이 정적으로 채워지면 나만의 한 끼로 신문을 읽고 기사를 스크랩하거나 좋은 글귀,  마음의 울림이 있는 글들은 필사를 하며 귀한 한 끼를 채운다. 잠시의 휴식과도 같은 이 시간은 '마음의 배부름'과 '여유의 챙김'으로 나에겐 하루를 끌고 갈 열량 되어 주는 것이다.

주부, 가부장제의 허울에 덫 씌워진 끼니 챙김의 중노동

가족의 끼니를 빠짐없이 챙기는 것은 육체의 피로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노동의 강도도 높다. 주말 점심, 가족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간단히 먹자'라고. 엄마 또는 아내의 끼니 노동에 대한 미안함인지 어중간한 시간상의 선택인지 모를 이 '간단한 메뉴'는 주로 국수 종류나 볶음밥 등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많지만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메뉴는 없다. 인스턴트 빼고.

모든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는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비록 먹는 이는 몇 분 만에 먹을 수 있는 국수라도 만드는 이는 여러 야채를 다듬고 썰어 준비하고 멸치육수를 내야 하며 양념장을 만들고 면을 따로 삶아야 한다. 결국 간단한 음식이란, '만드는 사람'이 아닌 '먹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명명된 메뉴이다.
 
돼지책에서도 가부장제의 틀이 작용한다
▲ 돼지책 돼지책에서도 가부장제의 틀이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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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 사회는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하게 사용되고 받아들여진 말들이 숨어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에도 가부장제의 틀이 작용한다. 아이들 동화책을 정리하며 동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다 우연히 발견한 문장이었다.     

피곳씨와 그의 아이들은 아내 또는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입으며 깨끗하게 관리된 집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잔다. 그런 후 자신들의 학교에 가거나 회사에 간다. 하지만 아내, 또는 엄마의 자리에서 해온 가사노동에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 또는 엄마인 그는 집을 나간다. 가사노동의 불편하고 힘든 빈자리를 피곳씨와 아이들은 메꾸며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작가는 그가 집에 돌아옴으로써 피곳씨 가족이 가정 안에서 역할의 위치가 바뀌어 있음을 표현한다. 하지만 동화의 결론 부분에서 작가는 가부장제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피곳 씨와 아이들은 요리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요리는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나는 페미니즘을 알기 전 우리 아이들에게 이 문장을 아무런 의심 없이 마치 명문장인 것처럼 수없이 읽어주었다. 가사 노동의 힘듦을 설파하며 피곳씨와 아이들처럼 엄마를 '도와야 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가사노동은 '도와야 한다'가 아닌 '함께 해야 한다'이다.

도와야 한다는 말은 아직 가정 안에서의 주체자가 아빠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정에서의 주체는 어느 한 사람이 아닌 가족 모두이다. 수많은 아이에게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가부장제의 틀을 잠재적으로 심어주고 있었다.

책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의 저자는 애덤 스미스 씨가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건 경제를 움직이는 상인들의 이익 추구 때문이 아닌 사랑으로 저녁을 준비해 준 그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남편들이 밖에 나가 이익을 추구하는 동안 가정 안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며 가정의 안녕을 도모하고 행복을 추구한 어머니들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는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가정에서 일하는 사람을 '노는 사람'으로 표현하며 돌봄의 가치를 훼손하고 폄하한다. '집에서 하루 종일 뭐 했어'라거나 '집에서 애나 봐'라는 말은 가사와 육아의 일을 하찮은 일로 치부하기에 가능한 말이다.

사회 구조 안에서 안과 밖의 일 중 어느 한 부분만 중요한 일은 없다. 안과 밖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린, 가족 모두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바깥일만이 진정한 일이 아닌 가정 안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많은 엄마, 아내의 자리도 진정한 일로 인정해야 한다. 

굳이 '보이지 않는 손'만을 찾아 경제의 이익을 찬양하기보다 언제 어디서나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기꺼이 수많은 일을 해내는 '보이는 손'을 인정한다면
우리 사회의 젠더 갈등은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rkh23475275)에도 게재 됩니다.


태그:#삼시세끼, #애서니브라운, #애덤스미스, #보이는 손, #보이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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