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독립전쟁의 선포, 청산리전투

청산리전투가 독립전쟁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크다. 봉오동전투에 이어 일본군 대부대를 상대로 전투를 치르고, 나아가 큰 타격을 줬다는 점에서 독립전쟁의 선포라 할 수 있다. 비록 임시정부나 만주 독립군단의 전략, 곧 10개 연대 이상을 편제해 국내로 진공한다는 독립전쟁 전략의 구현은 아니었지만, 2만 명을 헤아리는 일본군 대부대의 만주 침략에 따라 현실적 독립전쟁의 선포가 청산리전투로 구현됐다.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의 패배는 뚜렷하다. 전투 직후의 보고나 전투 지휘관의 회고가 실제 전과와 차이 있다는 앞선 연구들의 비판적 견해가 있지만, 그것을 청산리전투의 실제 군사적 전과를 축소하는 근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어랑촌전투에서 독립군의 수를 실제보다 몇 배인 6000명으로 파악한, 그래서 급히 병력 증원을 요청한 일본군 전투보고문서, 또 일본군 소장이 지휘한 일본군 부대의 전투가 있었음에도 이 사실을 부인하고 '숙영(宿營)'으로 처리한 일본군 보고서는, 큰 타격을 받고 패배한 군사적 정황과 연관된다. 또 청산리전투에 동원된 일본군부대(증원부대 포함) 현황을 보면 청산리전투 이후 몇 개 중대가 작전 상황에서 사라진 것이 확인된다. 곧 일본군기록을 통해서도 일본군 병력의 큰 손실이 입증된다.

또한 일본군이 작전 목표로 삼았던 독립군 '토벌'은 완전히 실패했다. 무장 의용군, 곧 독립군 주력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고 퇴각해 노령을 향해 북정(北征)에 성공했다. 아울러 북정 과정에서 만주 독립군단의 계획대로 부대 통합을 이뤘다. 일본군의 침략은 역설적으로, 부대 통합과 노령으로 근거지 확장을 통해 독립군 항전 역량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일본군이 작전 실패를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군사적 관점에서 청산리전투는 독립군의 승전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군사적 패전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독립 근거지는 파괴됐다. 일본군은 청산리전투의 패전을 군사적 경계로 한정하지 않고, 총부리를 돌려 무고한 동포들을 학살했다. 경신대학살이다. 그리고 독립진영 인사들에게 '집단 귀순'과 밀정조직 보민회 가입을 강요했다. 일본군의 학살은 만주 침략 때부터 계획됐을 수도 있다. 그리고 청산리전투의 패전 후 강화된 형태로 실행에 옮겼다.
 
임시정부 파견원이 만주에서 조사한 결과 3469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조사 못한 지역도 있어서 실제 피해는 훨씬 많았다.
▲ "서북간도 동포의 참상 혈보"(독립신문 1920.12.18) 임시정부 파견원이 만주에서 조사한 결과 3469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조사 못한 지역도 있어서 실제 피해는 훨씬 많았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외국 선교사의 학살 증언

민간인 학살의 실상은 외국인 선교사의 기록에 뚜렷하다. 연해주에서 침략한 14사단 15연대 제3대 77명은 용정촌에서 25리 떨어져 있는 한인 기독교 마을 장암동(獐巖洞)을 포위하고 40대 이상 남자(그 이하 청년은 무조건 독립군으로 간주돼 피신했다) 33명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포박한 뒤에 교회당을 불 질러 몰살시켰다. 며칠 뒤 다시 일본군이 습격해 와서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한곳에 모은 다음 석유를 붓고 재가 되도록 태웠다. 선교사 푸트는 그 실정을 이렇게 말했다(주1).

"내가 11월 4일에 누루바우촌에 갔더니 촌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 주었다. 즉 10월 30일에 일병(日兵)이 대습(大襲: 대대적으로 습격)하여 31인이 거주하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하였다고 하매 나도 가옥 9간과 교회당 학교의 회진(灰塵: 불타서 재로 변함)된 것을 보고 그 사실이 상부됨을 알았다.

또 11월 1일에는 일군 17인과 일경 2명과 한인 경찰 1명이 이 촌에 와서 남자를 모조리 끌어내다가 죽인 후 사자의 과부를 불러내다 사자의 경력을 대라고 고문하였고 그 다음 촌락 전민을 모아서 일장연설을 한 후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한다.

또 벌써부터 버린 시체를 촌인(村人)을 시켜 일처(一處, 한곳)에 모으고 그 시체에 연료를 놓아 불을 질러 끄슬러 재로 만들어 없애버렸다."


마을의 남자를 모두 살해하고, 더욱이 이튿날 다시 습격하여 불탄 사체를 다시 불태워 재로 만드는 이중 학살 만행까지 저질렀던 것이다.

용정촌의 캐나다교회에서 경영하던 제창병원 병원장 마띵은 용정 인근 마을의 학살을 조사하고 다음처럼 기록했다(주2).

"무장한 일본군이 이 촌락을 포위하고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 불 속에서 숨이 붙어 일어나는 자가 있게 되면 총창으로 찔렀다. (...) 나는 학살되고 방화 당한 32개 촌의 마을 이름과 정황을 잘 알고 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육되었다. 서구 등에서는 14명을 세워 놓고 총살한 후 석유를 쳐서 불태웠다."

학살과 방화는 동시에 있었다. 학살하고 집을 불태워 동포마을 자체를 없애려 했다. 마띵은 32개 촌의 정황을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만주 전체로 보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동포들이 학살됐다.

일제 기록이 보여주는 학살

전투와 관계없는 동포들의 학살은 일제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군경 '연합행동 표'(주3)를 보면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경찰은 합동으로 강안(江岸) 지역으로 진입해서 작전을 했다. 10월 12일부터 12월 23일까지 국경에 인접한 만주 각 지역에서 129명을 살해하고 1명을 부상시키고 107명을 체포했다. 당시 국경 지역에서 독립군단이 전투를 목적으로 작전한 경우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군 보고에도 그 내용은 없다. 각 지역에서 살해한 동포는 부대로 편제된 독립군이 아니고 전투와 관계없었다.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 주력 부대의 전투 지역과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이들이 독립군 전투를 지원한 것도 아니다.

'표'는 '전사, 전상, 체포'라 하며 전투 결과로 적었다. 적게는 10여 명에서 많게는 180여 명의 일제 군경대(軍警隊)가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14명을 각지에서 '전사'시켰다는 것이다. 129명의 전사는 청산리전투에서 일제가 주장하는 독립군 전사자보다 많다. 그 가운데 11월 7일 두도구 우두산에서 일본군 중좌가 지휘하는 48명과 경찰 20명이 7명을 전사시켰다는 내용은 일본군도 1명이 전사, 1명이 부상당했으므로 실제 전투가 있었다. 하지만 소총 1정을 압수했으므로 일제가 전사자라고 한 7명 가운데 6명은 민간인이다. 곧 1명의 무장 독립군이 교전했는데 이후 전투와 관계없는 6명을 학살한 것이다.

또 10월 19일에 180여 명의 군경대가 14명을 전사시켰다는 것도 소총 1정을 압수했다 했으므로 실제 전투가 아니라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11월 3일 연길현에서 군경 22명이 8명을 살해하고 집 14채를 불태웠는데 '노획품'은 밧줄 2개였다. 경무국 기록은 '전사'라 했지만 일제 군경이 동포 마을을 공격해서 집을 불태우고 도망가지 못한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것이 그 실상이었다. 학살하고 학살했다 할 수 없으니 증거를 찾았는데 나온 게 '밧줄 2개'였던 것이다.

따라서 '표'에 나오는 129명의 전사라는 내용은 전투 결과가 아니라 일제 군경대가 국경 근처 동포 마을을 초토화하면서 미리 대피하지 못한 동포들을 학살한 결과였다.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본군 기록(<間島出兵史>)도 494명을 살해하고 707명을 체포했으며 민가 531동, 학교 25개를 불태웠다고 했다. 여기에는 전투 때 전사도 포함되었지만, 이를테면 강안수비대(江岸守備隊)가 사살했다는 107명은 독립군이 아니었다. 이때 압수된 총기류가 극소수이고 민가 94채를 불태웠으므로 실상은 마을에 들어가 집을 불태우고 대피하지 못한 동포들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민간인 학살을 축소 은폐한 일본군 기록도 학살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임시정부의 경신학살 조사

임시정부 만주 파견원이 보고한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의 통계에 따르면(남만주 포함), 피살 3469명, 피체 170명, 강간 71명이고, 민가 3209동, 학교 36동, 교회당 14동이 소각되고 곡물 54,045섬이 소실됐다(<독립신문> 1920.12.18.). 실제 피해는 더 많다. 통계표에 '미상'으로 돼 있는 것은 보고 당시 아직 조사되지 않았음을 뜻하는데 어랑촌은 '미상'으로 돼 있다. 일본군이 패전한 지역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으므로 이 지역의 피살자는 적어도 수백 명을 헤아린다. 따라서 통계표에서 '미상' 부분을 감안하면 실제 학살 동포 수는 훨씬 많다.

중국 측 자료를 보면 일본군 기록이 학살을 축소 왜곡하고 있음을 뚜렷이 알 수 있다. 곧 중국 당안관(檔案館)에 보관돼 있는 1921년 5월 5일자 공문은 길림성 연길도 5개 현(연길, 훈춘, 왕청, 동녕, 화룡)에서 피살자가 942명('화민'으로 불리던 귀화인 622명, '간민'이라 불리던 귀화인 32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계 누락을 감안하고 특히 '화민'의 재산 손실에 비해 '간민'의 손실이 400배로 돼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간민 피살자는 적어도 320명의 몇 배가 될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주4). 여기에 남만주의 학살도 포함하면 피살자는 급증하고 따라서 임시정부 파견원의 보고 내용은 중국 측 자료로도 뒷받침된다.
 
일본군 소장이 지휘하는 아즈마지대(東支隊)는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다.
▲ <간도출병사>에 나타난 일본군 아즈마지대 부대 편제 일본군 소장이 지휘하는 아즈마지대(東支隊)는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다.
ⓒ 공훈전자사료관

관련사진보기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하고 총부리를 무고한 만주동포에게 돌린 일본군

일본군의 학살은 만주 침략 때부터 있었지만 규모나 잔학함에 있어 청산리전투가 영향을 줬다. 곧 전투에 패배한 일본군이 그 화를 만주 동포에게 돌려 분풀이로 대규모로 학살했던 것이다. 계기화는 '청산리 패전의 보복'으로 일본군이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여 (...) 청산리전역의 수십 배의 혈(血)의 대가'를 치렀으며 자신의 마을에서도 9명이 희생되었다고 회고(<삼부·국민부·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 회고>)했다.

임시정부 파견원의 통계를 보면 각지 피살자 수는 몇 명, 몇십 명이 대부분인데 전투 지역인 청산리는 409명, 완루구는 451명이었다(어랑촌은 미상). 또 북로군정서 경비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왕청현 서대포도 230명으로 다수였다. 이 세 곳만 해도 1000명 이상이다. 청산리나 완루구의 피살자는 남만주 유하현 전체 43명, 흥경현 전체 305명보다 많고, 관전현 전체 495명에 조금 적었다(<독립신문> 1920.12.18.).

백운평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백운평 마을 23세대 남자들은 젖먹이까지 모두 집에다 가두어 불을 질렀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은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으로 사격해 학살을 자행했다(주5). 청산리와 완루구의 400여 명의 피살자는 전투지역 인근의 동포를 일본군이 무차별 학살한 결과였다.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고 성공적으로 퇴각하자 일본군은 총부리를 무고한 동포들에게 돌렸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작전 성과 표에도 청산리전투 뒤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이 드러나고 있다.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여러 곳에서 동포를 살해했는데 그 때는 소량이지만 소총, 권총, 탄약, 화약 등의 압수품이 있었다.

청산리전투 뒤인 27일부터 압수품도 없이 각지에서 학살한 기록이 나온다. 곧 무조건 학살하고 마을을 뒤졌는데도 무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를테면 증거도 없이 10월 27일 10명이 살해되고 28일 5명이 살해되었다. 30일에도 6명이 증거품 없이 살해되었다. 이는 일본군이 동포 마을을 공격해 무조건 학살한 뒤에 현장에서 총이나 탄약이 발견되면 '노획품'으로 기록하고, 없으면 그냥 살해로 기록했다는 뜻이다. 이들 지역이 청산리전투 지역은 아니지만 청산리전투 패전은 만주 침략 일본군 전체에 영향을 주면서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에 이은 2차 독립군 기지 파괴 - '보호' 강요와 '집단 귀순'

'귀순' 외에 독립전쟁의 기반을 약화시킨 계기는 '보호'였다. '보호'는 동포 마을이 일제의 행정 관할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곧 독립군단의 행정 관할을 포기하고 일제 행정 관할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동포 학살 등 일본군의 무력이 뒷받침되었다.

일제 기록을 보면 11월 초에는 '보호원'을 내는 마을이 거의 없다가 중순에 늘기 시작해서 하순에 급증했다. 이는 학살이 진행, 확산되면서 각 동포 마을이 생존을 위해 일제 관할 구역이 되는 '보호원'을 제출한 것을 뜻한다. '보호원 제출'은 일본군의 학살의 결과였다. 연길현과 화룡현은 154개 마을의 3779호, 2만2432명이 일제 관할이 되었다(기밀제52호).

일본군 만주 침략의 본질이 여기서 드러난다. 곧 한편으로 독립군을 '토벌'한다 했지만 실제 독립군 주력은 전투를 피해서 먼저 북정에 나서고, 또는 이도구에서 일본군에게 승전한 후에 북정을 함으로써 일본군의 작전을 좌절시켰는데, 일본군은 군사작전 패배의 화를 동포마을에 돌려 독립전쟁의 기반이던 동포 사회를 파괴했다.

일제에 협조하지 않으면 학살당한다는 상징을 확산시키면서 이를 두려워한 동포 마을들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관할함으로써 독립전쟁의 기반을 파괴했다. 일본군의 1차 작전 목표는 실패했지만 학살을 통해 일제는 2차 목표인 독립전쟁의 기반을 파괴했다. 남만주와 달리 경신참변 이후 북만주의 독립전쟁 기반이 상대적으로 늦게 회복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동포 마을이 일제 관할에 들어가면서 독립진영 인사들은 일제의 '귀순', 곧 변절 강요에 직면했다. 독립군의 군사 활동과 더불어 그를 뒷받침하는 행정 활동도 일시 정지되었고, 역으로 보민회 등 일제 주구기관 활동은 일본군의 뒷받침에 힘입어 강화되었다.

'용정촌 귀순자 취급사무소'의 통계(공신제237호)에 따르면 기간 미상의 시기에 화룡현에서 207명, 연길현에서 213명이 '귀순'했는데 소속 단체로 보면 국민회 193명, 군정서 94명, 의군단 68명, 의민단 5명, 광복단 5명, 독군부 4명, 신민단 1명, 독립군 1명, 계 376명이었다.

북만주에서 세력이 강성하던 국민회와 군정서가 다수인데 '귀순' 때 제출한 물품을 보면 권총 4정, 권총 탄환 13발, 지휘도 2개, 러시아식 소총 4정, 러시아 탄약 399발, 군모 4개 등이었다. 경비대 등도 무장을 갖추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군수품은 거의 제출되지 않았다. 곧 '귀순자' 대부분이 독립군이 아니라 행정 관계자였다. 일제는 독립군단 '말단'이라고 파악('기밀제52호')했다.

1921년 일제 간도영사관 국자가분관(分館)이 작성한 '귀순자명부'(기밀제4호)는 951명의 소속과 임무까지 적었는데. 국민회 494명, 의군단 234명, 북로군정서 172명, 도독부 27명, 신민단 4명, 의민단 4명, 기타 소속 미상 12명이다. 군인으로 명기되었거나 군인이 확실한 인원은 국민회 72명, 북로군정서 43명(사관학교졸업 졸업 12명 포함), 의군단 32명(山砲隊 포함), 도독부 15명이다. 전체 인원 가운데 군인 비율은 국민회 14.6%, 북로군정서 25%, 의군단 13.7%이고, 도독부는 55.6%이다. 합하면 18.4%이다. 도독부에서 군인의 '귀순' 비율이 높은 것은 도독부가 군사 중심으로 지방행정 조직이 넓게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율을 따지만 10명 가운데 2명이 군인, 8명이 행정요원이다. 여기서 군인은 농사지으며 지역을 지키는 재향군인이다. 이들은 지역을 떠나기 힘든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을 했다. 북로군정서 사관학교 졸업생도 졸업 후 지역에 잔류한 인원이다. 150명이 지역에 잔류했는데 그 중 12명이다. 정규 의용군은 아니지만 거주지를 떠나 피신할 수 없었던 모연대(募捐隊)와 경호대를 포함하면 군사 관련 인원의 '귀순' 비율은 더 높다.

일본군이 중화기로 무장하고 지역을 초토화하는 상황에서 피신하지 못할 때 이들은 생존을 위해 '귀순'을 택했다. 이런 '귀순'도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약화시켰지만 모두가 일본의 밀정 따위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귀순'의 편차가 존재했다.

당시 일본군·일경의 정책으로 보면 '귀순'하면 그들의 주구가 되는 것이다. 곧 '불령선인 취급 방침'에 따르면 이들이 다시 독립운동에 나설 물리적 기반은 차단되어 있다. '귀순' 조건은 이러했다('비밀공제30호').

1.귀순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자신이 종래 해온 불령행동(독립운동: 인용자)을 자세히 자백하고 증거 물건 있으면 그것을 제공할 것.
2.귀순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보민회(保民會) 또는 농업조합에 가입하여 회(會)의 보증서를 제공할 것. 단 보민회나 농업조합 따위가 설치되지 않은 곳은 기한을 두고 입회 수속을 한다고 맹세할 것.
3.충심으로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장래 결코 불령행동(독립운동: 인용자)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할 것.
4.장래 가능한대로 불령선인(독립운동가: 인용자)의 행동을 탐사 밀보(密報)한다고 맹세할 것.


활동 진술과 독립운동 포기는 말로 그치지만 보민회 따위의 일제 밀정조직에 가입하고 독립지사를 정탐, 밀고하는 것은 '귀순'이 곧 변절임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밀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학살이 극심한 상황에서 이들의 '귀순'을 모두 밀정이 되는 것으로 단언할 수는 없다. 생존을 위한 일순간의 '귀순'과 밀정이 되는 '귀순'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집단 귀순'이란 점에서 독립운동 근거지의 항일전투력은 뚜렷하게 약화되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땅에 묻었던 총기를 비롯하여 많은 군수품이 압수됐다. '귀순' 조건 가운데 하나가 '증거 물건'이었으므로 '귀순자'들을 통해 총을 비롯해 많은 군수품이 일본군에게 압수됐다. 이후 북만주 항일전쟁 수행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귀순자'가 모두 밀정이 되지는 않더라도 '집단'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항전 역량은 약화됐다. 앞서 국자가분관의 '명부'는 951명이라 했는데 두도구분관은 11월 25일 보고문서(공신제177호)에서 6858명이 '귀순'했다고 밝혔다. 이도구, 두도구, 세린하, 삼도구 지역 294개 마을에서 7000명 가까이 '귀순'했던 것이다. 청산리전투가 전개되던 지역임을 감안할 때, 전투 여파가 부근 마을에 영향을 주어 실제 독립군단 인원이 아님에도, 수많은 사람이 학살을 피해 '생존'을 위한 '귀순'을 선택했다. 북만주 전체로 보면 수만 명에 이른다 하겠다.

일본군의 학살은 결국 생존을 위한 '집단 귀순'을 강요했고 이를 통해 또 독립 근거지는 더욱 파괴됐다. 일제의 만주 침략이 노린 궁극의 목표가 여기에 있었다. 1920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의 학살은 3.1혁명 때 학살의 연장이었고 중일전쟁 때 남경대학살의 예고이기도 했다.

(주)
1)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8, 91쪽.
2)마띵, <견문기>(리광인, <'경신대토벌'과 연변 조선족 군중의 반'토벌'투쟁>, <한국학연구 4>, 1992, 127쪽에서 재인용).
3)조선총독부경무국, <군대 출동 후 간도 불령선인단체의 상황>, 김정주 편, <조선통치사료 8>, 한국사료연구소, 1971, 273-280쪽.
4)조동걸, <1920년 간도참변의 실상>, <역사비평 45> 1998년 겨울호, 54쪽.
5)황민호·홍선표, <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45쪽.

덧붙이는 글 | '새로 쓰는 독립군사' 다음 이야기는 '독립군의 행군과 식량'입니다. 8월 21일에 이어집니다.


태그:#경신대학살, #청산리전투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