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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조동걸(1932∼2017) 교수는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이 한국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논거는 이렇다. 조동걸은 한국 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에서 시작되었고, 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제 침략군과 싸운 대일전쟁 그 자체였기에 독립운동이었고, 독립운동의 성격이 있으며, 독립운동사 범주에 포함된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됐다고 본다. 후배 역사학자들은 조동걸의 주장을 이어받았다.
 
조동걸 교수의 모습 조동걸
▲ 조동걸 교수의 모습 조동걸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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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차 동학농민혁명의 총사령관인 전봉준(1855∼1895) 장군과 최고 지도자인 최시형(1827∼1898) 선생에 대한 필자의 독립유공 서훈 신청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는 지난 3월 2일에 똑같이 "활동내용이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하다"라고 기재하며 두 분에 대한 독립유공 서훈이 불가하다고 판정하였다. 이는 공훈발굴과 담당공무원과 심사위원들이 여전히 2차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서훈 불가 판정과 잘못된 역사 인식은 명백히 한국 역사학계의 수많은 연구 성과를 배격한 것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필자는 조동걸의 동학농민혁명 인식을 집중 검토해 부당한 심사를 논박하고자 한다.

조동걸은 1957년 경북대 사범대학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그는 1965년부터 춘천교대 교수로 있으면서, 원호처가 1969년에 설치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참여하여 상임 조사위원과 집필위원으로 1979년까지 활동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는 총 10권 <독립운동사>를 발간했는데 조동걸은 <독립운동사>제2권(3·1운동사)(상.1971)의 「제4편 강원도의 운동」을, <독립운동사>제4권(임시정부사)(1972)의 「제2편 초기활동과 정부의 변모」를, <독립운동사>제5권(독립군전투사)(상.1973)에 논문을, <독립운동사>제7권(의열투쟁사)(1976)의 「제3편 일제의 대륙침략과 의열투쟁」을, <독립운동사>제8권(문화운동사)(1976)의 「교육편」을, <독립운동사>제10권(대중투쟁사)(1978)의 「농민편」을 주가 달린 여섯 개 학술 논문으로 각각 집필하였다.

이로써 그는 독립운동 전반, 즉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항일무장투쟁, 의열투쟁, 교육운동, 농민운동을 집중 연구했다.
 
 조동걸은 <독립운동사>에 집필자로 참여하여 논문을 게재하였다. <독립운동사>
▲ 조동걸은 <독립운동사>에 집필자로 참여하여 논문을 게재하였다. <독립운동사>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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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독립운동사>제10권(대중투쟁사)의 「농민편」에서 그는 16쪽에 걸쳐 동학농민혁명을 서술하였다. 그는 2차 동학농민항쟁이 항일전쟁으로 발전했다고 하며, 여기에서 독립운동사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249쪽)고 썼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그 자체가 항일 독립운동이었다(255쪽)고 주장했다. 일제 침략에 항거해 동학혁명전쟁과 의병전쟁이 독립운동사의 봉우리를 만들었다(256쪽)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는 아래와 같이 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주장하였다.
"독립운동이 일제 침략에 대하여 주권보존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학혁명운동도 그 일환의 하나로 주목해야 한다. …후기 동학운동은 직접적으로 일제의 침략군과 싸운 대일전쟁 그 자체였던 것이기 때문에 독립운동사의 위치에서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273쪽)

"제2차 봉기에 이르러서는 그 동학농민군의 항일전쟁은 직접적인 것이었고 동학군의 항쟁은 혁명전쟁의 성격을 나타내 독립운동사의 측면에서 보면 그대로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이었던 것이다. …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는 항일구국전쟁의 개전이며 한편 한국 독립운동사의 알찬 개막이기도 한 것이다." (277쪽) 

이와 같이 조동걸은 2차 동학농민혁명이 독립운동이고 대일전쟁 그 자체였기에 독립운동사의 범주에 포함되며, 한국 독립운동사의 개막이었다고 썼다. 이러한 조동걸의 주장은 친일 역사학자로 알려진 이병도가 1954년에 폭동이라고 주장한 동학란을 일거에 비판한 것이었다.

조동걸 "동학군 항쟁은 혁명전쟁의 성격,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 

이로써 보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진즉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서훈이 되지 못했을까?

이는 조 교수가 서울대, 고려대 출신 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경북대 출신이었다. 서울대 출신 이병도(1896∼1989)와 고려대 출신 신석호(1904∼1981)가 독립유공 서훈 내규를 정했고,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전봉준, 최시형 등)는 서훈을 받을 수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중용했고, 역사학계도 친일 역사학자들이 장악했다. 이병도와 신석호가 대표였다(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 특히 이병도는 1954년 「동학란의 역사적 의의-그 1회갑을 당하여-」(<사상계>, 1954, 11)라는 글을 써서, 최고의 항일독립운동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으로 기술, 폭동과 동란으로 매도한 적도 있다. 

그 후 1962년 이병도와 신석호는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라고 독립유공 서훈 내규를 정하고, 둘 다 그해부터 독립유공 서훈 심사위원이 돼 심사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의 제자들이 심사위원이 됐으니, 스승이 정한 내규를 고칠 리가 없었지 않겠나. 이런 내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후 조동걸은 <독립운동사>제10권(대중투쟁사)(1978)의 「농민편」 논문을 대폭 수정 보완해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오늘의 사상신서 8, 한길사, 1979)라는 저서를 발간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2차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이고 독립운동사 범주에 포함되며, 한국 독립운동사 개막이었으며, 항일독립전쟁의 장을 열었다고 썼다. 동학농민혁명을 12쪽에 걸쳐 기술하면서, 그는 독립운동사의 기점을 2차 동학농민혁명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에 담긴 내용은 그의 <식민지 조선의 농민운동>(<우사 조동걸 저술전집>9, 역사공간, 2010, 44∼59쪽.)에 그대로 이어졌다.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의 모습 (출처: <식민지 조선의 농민운동>, 47쪽.)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최시형 선생(중앙)과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오른쪽).
▲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의 모습 (출처: <식민지 조선의 농민운동>, 47쪽.)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최시형 선생(중앙)과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오른쪽).
ⓒ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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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조동걸이 유신 계도 연설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77년 유신 5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토론자로 참여하여 유신 경제와 박정희를 비판하고, 급기야 1979년 3월에 비판적인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를 발간하자, 조동걸의 구속을 결정했다. 다행히도 그 해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돼 그는 구속을 면하였다.

이후 조동걸은 1979년 6월에서 1981년 2월까지 안동대 교수로, 1981년 3월에서 1997년 8월까지 국민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86년~1992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1992년까지 독립기념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겸직했다. 1980년 조동걸은 <의병들의 항쟁>이라는 저서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을 서술하면서, 독립운동 성격이 있다고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동학혁명운동은 처음에 당시의 봉건체제에 대한 혁명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후에는 일본군의 파병에 따라 혁명전쟁으로 확대되어 반제국주의운동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동학혁명운동이 독립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있으며 아울러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50쪽)

이런 주장은 1989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행한 <한말 의병전쟁>(독립운동사 교양총서 2-①)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보완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처음에는 당시의 봉건체제에 대한 혁명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후에는(제2차 봉기) 일본군의 침입에 대한 혁명전쟁으로 나타났다. 혁명전쟁이란 혁명운동의 진행 중에 반혁명적 외국군의 침략을 받아 혁명군이 그 외국군과 싸우는 전쟁을 말한다. 그런데 혁명전쟁이 궁극적인 목표는 혁명이라고 해도 ,당장에는 외국군의 침략에 대한 반제국주의 전쟁으로 전개된다. 여기에 동학농민전쟁이 독립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있으며 아울러 독립운동의 기점으로서 의병전쟁과 함께 각광을 받는 것이다."(24쪽)
"동학운동, 반제국주의 전쟁으로 전개... 여기에 독립운동 성격 있어" 

위의 내용은 그의 <대한제국의 의병전쟁>(<우사 조동걸 저술전집>4, 역사공간, 2010, 122쪽)에 그대로 이어졌다. <한말 의병전쟁>에서 그는 1894년 7월에 일어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인 갑오왜란을 서술하였으며,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그해 8월에 봉기한 서상철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을 기술하였다.
 
조동걸, <한말 의병전쟁> <한말 의병전쟁>
▲ 조동걸, <한말 의병전쟁> <한말 의병전쟁>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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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그는 「의병전쟁의 단계적 이해」(<동학> 제1집, 동학선양회, 1990)라는 논문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을 일제 침략군에 대한 혁명전쟁이어서, 반제의병운동의 효시가 되었다(76쪽)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수비군을 해산, 무장을 해제시킨 사건을 "갑오왜란"이라고 하였고, 갑오왜란으로 대한민국이 반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고 보았다.

계속해서 그는 반식민지 상태라는 것은 "주권이 제약을 받고 종속적인 상태로 되어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1894년부터 반제독립운동이 전개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79쪽)라며, 1894년 반제독립운동으로 안동의 서상철이 일으킨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을 제시하여 강조하였다.

1995년 「청사에 빛나는 한말 의병항쟁」(<민족정기론>수정 재판, 경산대, 1995)이라는 논문에서, 조동걸은 1894년의 갑오의병을 독립운동의 선구로 보았으며, 1894년의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전쟁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사의 막이 올랐다(257∼258쪽)고 논증했다. 위 내용은 그의 <한국근대사 별고>(<우사 조동걸 저술전집>16, 36쪽.)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1998년 조동걸은 자신의 저서인 <한국근현대사의 이해와 논리>(지식산업사, 1998.)에서,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를 설명하면서, 1894년의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이 한국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었다'고 아래와 같이 논증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은 어떻게 달랐을까. 1) 독립운동을 면면히 이어온 지구성이 첫 번째로 다른 점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왜란에 대항하여 의병이 봉기하고, 이어 일본군의 침략을 맞아 동학농민전쟁이 다시 일어나 독립운동의 포문을 연 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50년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4쪽)
이러한 주장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행한 그의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291쪽.)의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에 그대로 이어졌다. 위와 같은 내용은 그의 <한국독립운동사 총설>(<우사 조동걸 저술전집>3, 295쪽.)에 수록되었다.

이상과 같이 조동걸은 1954년 이병도의 주장을 24년 뒤인 1978년에 <독립운동사>제10권 「농민편」과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1979)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혁명운동으로 기술하면서, 독립운동사의 기점이 2차 동학농민혁명에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이 2차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독립운동사의 범주에 넣었다. 2차 동학농민혁명을 한국독립운동사의 개막으로, 주를 단 논문을 통해 논증하였다.   그는 1995년 자신의 논문을 통해, 갑오의병(1894)을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정정하였다. 1998년 자신의 저서를 통해, 1894년의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이 한국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었다'고 논증하였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2017년 서거할 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였다.

조동걸 주장은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국가보훈처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전봉준, 최시형 등)의 서훈은 올해에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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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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