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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양평에 국내 최대 규모 스타벅스 '더양평DTR점'이 문을 열었다. 매장 개점 이틀 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SNS 계정에 매장 방문 사진이 올라와 화제가 돼기도 했다. 

양평에 있는 특별한 카페에 가기 전 스타벅스 더양평DTR점에 가보았다. 스타벅스 앞을 지나가는 4차선 도로의 한 차선 전체가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 이용자 차량으로 꽉 차 있었다.

덕분에 인근 시민들은 출퇴근 시간 교통 체증이 일상화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양평시민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남한강 뷰도 이제는 스타벅스 방문객의 전유물이 되다시피했다.

양평은 8월 초까지만 해도 코로나 확진자가 2명뿐이었던 청정 지역이었다. 하지만 '더양평DTR점'에 확진자가 다녀간 뒤 매장은 임시 폐장됐다. 오픈한 지 1달이 채 되지 않았던 이달 12일에 생긴 일이다.

스타벅스 덕분에 양평으로의 인구 유입은 늘었다지만 그 덕은 스타벅스만 누렸다. 세계 최대 커피 프랜차이즈의 등장으로 양평의 작은 카페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 주 이동 수단인 양평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마을의 작은 카페보다 차 타고 5분만 이동하면 접근 가능한 '신상' 스타벅스가 매력적인 탓이다.
 
내부에는 짙은 우드톤의 가구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다.
 내부에는 짙은 우드톤의 가구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다.
ⓒ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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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날 우리가 찾은 곳은 '조르쥬상드'. '더양평DTR' 정도는 신경도 안 쓰는 카페 주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의 이름은 시인 안정옥이다. 그가 필사한 뮈세와 빅토르 위고의 시가 벽에 붙어 있다. 그것도 찢어낸 책 페이지 위에 꽉 채워 시 두 편을 다 써놓았다.

문가 옆에 소설가 조르쥬상드의 초상화도 놓여 있다. 모두 19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카페의 벽면을 가득 채운 시, 책장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을 보다보면 19세기 프랑스 카페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시인 안정옥이 운영하는 카페 '조르쥬상드'에는 공격적인 마케팅도, 넓은 주차장도, 남한강 뷰도 없다. 다만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인과 단골의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그를 단골들에게서 빼내 앞에 앉혔다.
 
열심히 인터뷰에 응해주고 있는 안정옥 시인.
 열심히 인터뷰에 응해주고 있는 안정옥 시인.
ⓒ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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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양평에 북카페를 열게 되었나요?
"오랫동안 서울에 살다가 양평에 전원주택 지어서 내려왔어요. 집에서 살림하면서 시를 쓰려고 하니까 집중도 안 되고, 다양한 것들로부터 자극을 받을 기회가 없었죠. 작업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보니 북카페를 시작하게 됐어요."
 
안 시인은 시를 쓸 때 큰 창 앞의 키 높은 책상을 애용한다.
 안 시인은 시를 쓸 때 큰 창 앞의 키 높은 책상을 애용한다.
ⓒ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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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를 쓰기 위해 손님을 만나는 북카페를 내기로 했다니. 우리는 창가 자리에 불빛을 내고 있는 시인의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 북카페 손님들은 사장님이 시인인 줄 알고 있나요?
"시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어요. 시인이 어디 나가서 내세울 직업은 아니거든요. 제가 아직 만족할 만한 좋은 시를 못 썼는데 시인이라고 말하기 부끄럽더라고요. 좀 더 경지에 올라야 할 수 있는 말 아니겠어요?"

90년에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하여 30년 동안 시인으로 살아온 그는 쉬지 않고 3년 마다 시집을 출간했다. 가장 최근 작품으로 시인의 9번째 시집인 <연애의 위대함에 대하여>(2019)까지. 그에게 30년 동안 시를 쓸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퇴고하다보면 너무 힘들어서 토하고 싶어져요.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쓰다보면 시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힐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마음으로 계속 쓰다 보니 90년대 등단한 사람 중 시집 낸 횟수는 제가 1등 아니면 2등이더라고요."
 
손님들 모두 커피를 한 잔 씩 들고 유리창 너머로 남한강의 모습을 즐기고 있다.
 손님들 모두 커피를 한 잔 씩 들고 유리창 너머로 남한강의 모습을 즐기고 있다.
ⓒ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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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해하지 않고 묵묵히 '시인'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카페 운영에도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양평에서는 낯선 형태의 카페라 처음부터 손님들이 많이 찾지  않았지만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양평에 스타벅스가 생기며 시인은 처음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새로운 카페가 생길 때마다 두 달간은 가게가 휘청거려요. 그러다가도 새로 연 카페가 망해서 문을 닫고, 그런 과정들이 반복되어 왔죠.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지금 양평에 스타벅스가 2군데나 생겨서 근처 카페들이 다 문을 닫았어요. 처음 스타벅스가 생기고 그 주위를 지나가는데 양평 남녀노소 다 거기 가 있더라고요. 작은 동네에 그런 게 들어오니까 주변 카페들이 버티질 못해요. 저희 가게는 단골층이 탄탄해서 버티고 있지만."

원래 사람 만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시인의 삶은 카페 단골들을 만나면서 변화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양평 사람들의 소심함에 놀랐어요. 양평이 고립된 도시이다 보니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아 보였죠. 일상생활이나 커피 맛이 어떤지 물어봐도 얘기를 안 하더라고요. 그랬던 사람들이 안면을 좀 트면 집에 있는 고구마나 배추를 자루 채로 끌고 와서 나눠주기도 하고. 그 순박한 모습이 예뻐 보이더라고요.

가끔 오는 무속인 아줌마 한분이 있어요. 신당에서 다른 사람의 고민거리를 덜어주는 사람이 카페에 와서 고민 상담을 하는 거예요. 본인이 모시는 신도 있을 텐데. 내가 무속인 고민까지 상담을 해주는 구나. 무속인 위에 시인이 있구나 싶었죠. 시의 신이 더 세구나. 이 일화로 시를 한 편 썼어요."
 
시인의 카페에는 손님들 발자취조차 멋스럽다.
 시인의 카페에는 손님들 발자취조차 멋스럽다.
ⓒ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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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카페 운영 전에 주로 사물, 꽃을 소재로 글을 썼다. 하지만 단골들의 영향을 받으며 사람과 심리에 대한 시를 쓰게 됐다. 양평 시민의 소리에 '카페에서 바라본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칼럼들도 그 영향의 일부였다.

시인은 자신이 손님에게 영감을 받았듯이 손님에게 받은 영감을 다시 돌려주는 방법을 찾고 있다.

"북카페 이름이자 실존 인물인 조르쥬상드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에서 카페는 시인, 예술가, 철학자들과 같은 지식인들이 토론을 나누며 서로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는 공간이었죠. 19세기 프랑스의 카페처럼 '조르쥬상드'가 양평 주민들에게 그러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들 사이에 안 시인도 미처 몰랐던 귀중한 책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이 책들 사이에 안 시인도 미처 몰랐던 귀중한 책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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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로 북카페에 작가를 초청해 손님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카페의 벽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는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귀중한 책(기형도 시집 1판 1쇄)들은 물론 원서, 소설, 동화, 만화, 심리 테스트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다.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책을 빌려주기도 한다. 중고 책들은 카운터 앞에 쌓아놓고 저렴하게 팔고 있다. 이 책들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카페 사장님과 시인 중 선호하는 수식어는 무엇인가요?
"손님들이 와서 사장님이라고 하면 듣기 싫더라고요. 시인 소리 듣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니까. 아줌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요즘에는 아줌마, 아저씨라는 말이 격하돼서 안 좋게 받아들이던데 예전에는 굉장히 친숙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거든요. 커피를 마시면서 편하게 얘기를 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조르쥬상드'의 아줌마가 좋겠네요."

태그:#스타벅스, #양평DTR,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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