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1 14:18최종 업데이트 20.08.31 14:18
  • 본문듣기
   

도쿄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2019.7.23 ⓒ 연합뉴스

 
1974년 8월 30일 낮 12시 6분경이었다. 도쿄 왕궁(황거) 인근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에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다. "건물 현관 앞에 폭탄 2개를 장치해 놓았으니, 곧 대비하라"는 연락이었다. 발신자는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일반 임대 건물이 돼 있는 마루노우치니초메 빌딩이 당시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였다. 이곳은 꽤 민감한 위치에 있다. 서쪽의 왕궁으로부터 불과 800m이고, 왕궁 서북쪽의 야스쿠니신사로부터는 도보 20분 거리다.
 
그 시각에 이웃 건물에서는 기무라 도시오 외무 대신이 참석하는 외신기자클럽 오찬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무라 도시오는 아베 신조의 외종조부(외작은할아버지)이자 박정희 정권과 합작해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한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재임 1964~1972년)의 최측근이었다.
 
낯선 전화는 농담이 아니었다. 40분 뒤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현관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고, 유리 파편이 200m 밖에까지 날아갔다. 8명이 희생되고 376명이 부상을 입었다. 
 

1974년 당시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위치. ⓒ 구글 지도

 
그날 빌딩에는 약 4천 명이 있었다. 12시 46분 당시 이들 대부분은 건물 밖에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폭탄을 설치한 측이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고자 그 시각을 선택하고 사전에 예고도 한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이 폭탄 공격을 받는 상징적 효과에 더 주목했던 듯하다.
 
폭탄 공격의 목적은 미쓰비시의 죄악을 폭로하고 향후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었다. 3주 뒤인 9월 23일 나온 성명에서 이런 목적이 드러났다. 성명 서두에서 "1974년 8월 30일 미쓰비시 폭파 '다이아몬드 작전'을 결행한 것은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늑대(부대)다"라고 자신을 밝힌 이들은 미쓰비시그룹을 이렇게 규정했다.
 
"미쓰비시는 과거 식민지주의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일제(日帝)의 중추로 기능해왔고, 장사라는 가면 하에 음지에서 썩은 고기를 먹는 일제의 중추적 기둥이다."
 
1970년 반체제 대학 서클로 시작해 1972년에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을 결성하고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에 맞선 투쟁에 나선 이들은,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산하 부대인 자신들이 일으킨 8월 30일 폭탄 공격의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이번 다이아몬드 작전은 미쓰비시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제의 침략기업·식민자(植民者)에 대한 공격이다. 늑대의 폭탄에 의해 폭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은 '같은 처지의 노동자'도, '관계 없는 일반 시민'도 아니다. 그들은 일제의 중추에 기생하고 식민지주의에 참여하며 식민지 인민의 피로 살을 찌우는 식민자들이다."
 
그런 뒤 '늑대'는 노동 착취로 이윤을 불리는 일본 내외의 대자본가 및 그들과 협력하는 정치권력을 상대로 이렇게 경고했다.
 
"늑대는 일본 제국 내부와 세계의 반일투쟁으로 일어나는 인민들에 의지하여 일제 정치·경제의 중심부를 서서히 침식하고 파괴한다. 또 신(新)대동아공영권을 향해 또 다시 책동하는 제국주의자·식민지주의자들을 처형한다."
 
성명 마지막 부분에서 '늑대'는 폭파 피해자를 '전사자'로 규정하면서, 미쓰비시와 일본 기업들에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마지막으로, 미쓰비시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제의 침략기업·식민자에게 경고한다. 해외 활동을 완전히 정지하라. 해외 자산을 정리하고 개발도상국의 자산을 모두 포기하라. 이 경고를 따르는 것이 더 이상의 전사자를 늘리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일본이 떼돈 번 이유

19세기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변방에 불과했던 일본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것은 일련의 침략전쟁들 덕분이었다. 일례로 1894년에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청일전쟁을 도발한 뒤 청나라한테서 2억 량의 배상금을 받아갔다. 3억 6천만 엔에 해당하는 이 돈은 청나라 3년 치 국가 예산, 일본 4년 반치 국가 예산에 해당했다. 이것이 일본의 군비와 산업을 일으키는 밑천이 됐다.
 
일련의 침략전쟁은 일본 국가권력이 관할하는 민중과 영토의 범위를 확장했다. 이는 조세 수입원의 확대로 이어졌다. 또 일본이 관할 민중을 납세자나 징병 대상자로 활용하는 단계를 넘어서 이들을 성노예나 노예노동자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편승해 큰 돈을 번 것이 일본 재벌들이다.
 
미쓰비시중공업보다 1개월 먼저 한국 대법원으로부터 강제징용 피해자 4인에게 각 1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은 일본제철(신일철주금)은 약 1만 명의 한국인들에게 노예노동을 시켰다. 그에 비해 미쓰비시가 노예로 전락시킨 한국인 노동자는 약 10만 명이다.

미쓰비시에 의한 노예노동은 과장되기는 하지만 영화 <군함도>로도 잘 알려져 있다. 노동자 임금을 떼먹는 수준을 넘어서 노동자를 노예로 부리는 단계까지 나아갔으니 떼돈을 모으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조선인 강제징용의 참상을 보여준 영화 '군함도'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미쓰비시는 일본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을 위해 군함과 전투기 등을 제작한 전범기업이다. 이 그룹은 일본의 대외침략에 발맞춰 급성장했다. 생명을 살상하는 무기를 만들어 큰 돈을 번 기업이니 이들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위 폭파 사건을 보도한 1974년 8월 3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어제 낮 일(日) 미쓰비시중공업(에)서 폭발 사고'에 실린 "(경찰은) 미쓰비시 재벌을 '죽음의 상인'이라 욕해온 극좌 테러 분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라는 대목은 '극좌 테러 분자들'의 입을 빌려 미쓰비시를 '죽음의 상인'으로 은근히 비판하는 문구일 수 있다.
 
1981년에 히사시 하나부치 홋카이도정보대학 교수는 <경제학 연구> 제31권 제3호에 기고한 '태평양전쟁기의 미쓰비시 재벌 재편 과정'에서 "고정자본은 1936년부터 41년까지 1억 7400만 엔에서 6억 2500만 엔으로 3.6배 증가했고, 자회사·관계회사 등의 사외 투자도 1억 5000만 엔에서 2억 2800만 엔으로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강제징용이 활발했던 1941~1945년 기간에도 미쓰비시의 이윤은 계속 증가했다.
 
그런데도 미쓰비시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장부상으로는 다 처리된 것처럼 돼 있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로 인한 문제제기가 미쓰비시중공업 폭파 사건 얼마 전에도 있었다.
 
일본 재벌의 적나라한 윤리 의식

폭파 사건 22일 전인 8월 8일 강제징용 피해자인 박해군씨가 신영수씨와 함께 미쓰비시 조선소를 방문했다. 체불 임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1945년 일제 패망으로부터 근 30년이 된 이때까지도 임금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근무한 곳은 히로시마였다. 이들은 1945년 8월 6일 그곳에 있었다. 강제징용 피해자인 동시에 원폭 피해자였던 것이다. 1974년 8월 1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일(日) 미쓰비시 보상 거부'는 이들의 미쓰비시 방문을 이렇게 보도했다.
 
2차 대전 때 강제징용에 끌려갔다가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한국인 피폭자들의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 중인 박해군씨는 8일 일본에서 처음으로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은 신영수와 함께 히로시마시의 미쓰비시 조선소를 방문하고 보상 문제를 협의했다. 

피해자들의 청구에 대한 미쓰비시의 반응은 이랬다.
 
"미쓰비시 측은 '보상에 응할 의무는 없으며 한·일 양국 정부 간에서 교섭할 문제'라며 보상 요구를 거부하고, 박씨가 요구한 미불 임금 요구에 대해서는 2차 대전 후 송금할 수 없어 미쓰비시가 히로시마 법무국에 공탁한 1900명의 저금 19만 엔만은 '받을 사람이 확실하면 공탁을 취소하여 지불하겠다'고 밝혔다."
 
미쓰비시는 한국인 10만 명을 강제징용해 놓고도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 회사 근무 중에 일어난 원폭 피해에 대해서도 아무런 책임 의식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재벌의 윤리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법원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를 확정한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앞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발언을 하고 있다. 2018.11.29 ⓒ 연합뉴스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전범기업들이 한국인이나 중국인들한테만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들로 인해 일본 민중도 희생을 당했다. 전범기업들은 자신들과 정치권력의 이익을 '일본 민족의 영광'으로 포장하고 무고한 대중을 착취하고 전쟁터에 내몰았다. 그래 놓고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들은 패전 뒤에도 형태만 바꾼 채 과거의 기업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
 
일본 경제가 패망 뒤에 신속히 성장한 것을 경이적인 눈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일제 패망 뒤에 미군이 재벌개혁을 하는 시늉만 하다가 일본 재벌들을 살려줬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패망이 일본 재벌들의 경제력에는 큰 타격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 재벌들이 보수 정권 및 미국과 연대해 과거의 착취를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에 일본 민중은 그들에 대한 저항에 불을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민중 역시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자들이지만, 이들은 '자기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들로 간주돼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뒤늦게나마 국가 지원을 통해 한을 풀 길이 열리고 있지만, 지금이나 예전이나 일본인들한테는 그나마 그런 기회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런 구조적 제약 속에서 일본 민중은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들이 반핵 평화운동을 벌이고 1960년 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를 반대한 것은 재벌과 정치권력의 욕심 때문에 자신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절절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1974년 8월 30일 미쓰비시중공업 본사가 폭탄 공격을 받은 것도 그런 정서를 반영한다. 이 시기에 그 같은 대담한 공격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68혁명과 베트남전쟁 등으로 인해 1970년을 전후해 미국 및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다소 위축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쓰비시그룹은 1974년에 참혹한 일을 겪고도 아직까지 반성하지 않고 있다. 한국인 10만 명을 강제동원하고 노예처럼 부린 일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내놓지 않고 있다. 1974년에 '늑대'는 "해외 자산을 정리하고 개발도상국의 자산을 모두 포기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한 푼의 돈도 쓸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