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34~38년 다산 서거 100주년에 즈음하여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한 금속활자본으로는 처음 펴낸 『여유당전서』. 70년대초에 서울 고서점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입수한 여유당전서.
▲ 1934~38년 다산 서거 100주년에 즈음하여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한 금속활자본으로는 처음 펴낸 『여유당전서』. 70년대초에 서울 고서점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입수한 여유당전서. 1934~38년 다산 서거 100주년에 즈음하여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한 금속활자본으로는 처음 펴낸 『여유당전서』. 70년대초에 서울 고서점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입수한 여유당전서.
ⓒ 김삼웅

관련사진보기

 
나는 젊은 시절부터 언젠가 '다산'에 오르고자 틈틈이 다산과 관련한 자료를 찾고 읽었다. 그래저래 모은 책이 130여 종에 이르고 관련 논문을 합치면 200종이 넘는다.

그중에는 1934~38년 다산 서거 100주년에 즈음하여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한 금속활자본으로는 처음 펴낸 『여유당전서』 여러 질을, 1975년에 내 수준으로는 거액을 주고 매입한 자료도 포함된다. 그리고 다산의 고향이기도 하는 남양주로 이사하여 살고 있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시사(時事)에 쫓기면서 그야말로 '소일'을 하고 있을 때 다산 선생에 관한 연구는 세세연년 쌓여갔다. 그 이전부터 쑤욱 훑어보면 정인보ㆍ안재홍을 필두로 최익한ㆍ고승제ㆍ홍이섭ㆍ이을호ㆍ김영호ㆍ정해창ㆍ이우성ㆍ금장태ㆍ박석무ㆍ송재소ㆍ김상홍ㆍ임경택ㆍ심경호ㆍ조성을ㆍ정민ㆍ고미숙(무순) 제씨들의 연구업적이 속속 출간되었다. 특히 박석무ㆍ정민 두 분의 연구는 현재도 꾸준히 이어진다.

학계에서는 드물게 2000년부터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다산학(茶山學)』이라는 연구서가 계속 간행되고, 이에 앞서 1978년부터 『다산학보』가 간행되었다. 척박하기 그지 없는 우리 학계에서 이같은 일은 이례에 속한다.

북한에서도 연구성과는 괄목할만하다. 북한과학원 철학연구소는 다산선생 탄생 200주년 기념논문집 『정다산 연구』를 1962년에 출간하였다.

"그는 봉건적 억압과 착취를 반대하여 싸운 당시의 우리 민중이 낳은 역사적 인물이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하여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와 농민대중의 참상을 겪으면서 그는 '낡은 우리나라를 혁신하자'는 애국적 염원으로 농민해방과 사회개혁을 위한 수많은 저술을 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북한에서는 또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최익한(崔益韓)이 1938년 국내 신문에 연재했던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1989년에 이를 묶어 『실학파와 정다산』을 펴내었다.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차 월북한 뒤 그곳에 머물면서 정치활동보다 『조선사회정책사』, 『조선명장전』, 『정다산선집』 등을 간행하였다. 『실학파와 정다산』은 다산 관련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로 꼽힌다. 최익한의 저서는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전경
▲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전경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전경
ⓒ 윤돌

관련사진보기

 
한국(남한)에서 다산에 관한 연구는 꾸준히 이어졌다. 책 권이나 읽고 글 줄이나 쓴 사람 치고 다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만큼 인문ㆍ역사ㆍ과학 분야를 뛰어넘어 실학과 한국학의 중심가치로 탐구되고 일반화되었다. 유배지를 찾는 기행문과 소설도 여러 편이 나오고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다산의 평전ㆍ전기도 이미 여러 권이 출간되었다. 이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결실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능력ㆍ전문성으로 보아 이 분들의 성과를 뛰어넘을 자신이 희박하다. 그럼에도 새로 쓰게 된 것은 지난 수 십년 동안 자료모음의 정성이고, 나름의 몇 가지 의문점을 찾고 덧붙이고자 함이다. 의문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조 두 번째의 문화적 르네상스라는 정조 연대에 계몽군주가 있고 그 주위에 다산을 비롯 채제공ㆍ홍대용ㆍ박제가ㆍ이덕무ㆍ이가환ㆍ이옥ㆍ김려 등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음에도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정치가 무너지고, 하루 아침에 다시 낡은 수구파에 권력이 넘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둘째, 조선사회가 두 차례 호란을 겪은 뒤 극심했던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어젠다가 바뀌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성호 이익의 중농학파→연암 박지원의 이용후생파→다산 정약용의 경세치용파로 이어지면서도 이들 실학파가 정치세력의 중심이 되지 못한 이유?

셋째, 다산은 "조선인으로서 조선시"를 지어야 한다고 누누히 역설하면서 정작 본인은 500여 권의 저술 중 시 한 편도 한글로 짓지 않는 배경은 무엇일까. 또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적극 호응하고 더욱 강경방식으로 대응하도록 촉구한 것은 한자에 중독된 당시 지식인사회의 구조적 틀을 그 역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다산보다 훨씬 앞선 허균이나 김만중 등은 한글로 소설과 시를 지었지 않았던가?

넷째, 강진에서 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곡창지역 호남농민들의 탄압과 수탈상을 지켜보며, "어느 것 하나라도 병들지 앟은 것이 없어서 이를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쓰게 되고, 이런 책들을 동학군지도자 전봉준ㆍ김개남 등이 읽고 동학혁명의 이론적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동학혁명기 동학군은 '다산비결'이란 문건을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는 설도 전한다. 이에 대해 실상을 찾고자 한다.

다섯째, 그는 배교자인가 아닌가?

"(천주를)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성토하기를 홍역같이 하였는데, 양심이 이미 회복되자 이치가 자명해졌으므로, 전일에 일찍이 흠모한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하나도 허황하고 괴이하고 망령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천주교와 단절했다는 다산의 상소문 일절이다.

지금 한국 유학계열의 연구자들은 다산이 천주교를 배교했다 하고, 한국천주교측에서는 '복자(福者)'로 지정하였다. 또한 다산은 해배된 지 2~3년 후부터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다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종부성사를 믿고 운명하였다고 주장, 로마 교황청에 '성인품(聖人品)'으로 청원하였다. 그는 과연 배교자인가, 살아남기 위한 거짓 진술이었던가.

여섯째, 그의 수많은 저술 중에 유독 『목민심서』와 『흠흠심서』 등만 널리 알려지고 읽히게 된 배경은 무엇때문인가? 다산은 오히려 『주역사전』과 『상례사전』을 들었다. 그는 다른 모든 저술이 사라져도 이 두 권만은 오랫동안 전해지길 바랐다.

"만약 내가 사면을 받게 되어 이 두 가지 책만이라도 후세에 전해진다면 나머지 책들을 없애버린다해도 괜찮겠다." (「두 아들에게 주는 교훈」)

일곱째,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500여 권의 저술을 하고, 해배되어 고향에서 18년을 더 살면서 달리 새로운 책을 쓰지 않았다. 「자찬묘지명」을 짓고, 『흠흠신서』와 『매씨서평』 등의 수정 그리고 이가환ㆍ정약전ㆍ권철신 등의 묘지명을 짓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왜 일까? 기력이 소진했던 것인가, 아니면 해배 후 감시와 수구파 집권의 정국 상황에서 필화를 피하고자 해서였을까?

여덟째, 그의 호는 사암(俟菴)ㆍ탁옹(籜翁)ㆍ태수(苔叟)ㆍ자하도인(紫霞道人)ㆍ철마산인(鐵馬山人)ㆍ열수(洌水)ㆍ다산 등이 있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였다. 그는 생전에 다산이란 호를 저술에 명기하지 않았고, 사암과 열수라는 호를 주로 사용하였다. 귀향하여 지은 「자찬묘지명」에는 '사암'이란 호를 썼다. 그런데 왜 후대에 이르러 다산이 열수나 사암 대신 호로 쓰이게 된 것일까.

아홉째, 정약용에게도 숨기고 싶은 곡절이 있었다. 대부분의 평전ㆍ전기에는 삭제되고, 구전이나 야사 정도로 전한다. 강진 유배 시절에 취한 소실과 딸 홍임의 문제다. 1999년에 서울의 고서점에서 「남당사(南塘詞) 16수」가 발굴되었다. 해배될 때 남편을 따라 왔으나 정부인으로부터 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향리로 돌아가 시름과 원망과 그리움에 의지하여「남당사」를 지었는가? 작자는 정약용, 소실 정씨, 제3자 중 누구이고 인륜대사를 그는 왜 모른 채 했을까.
  
여유당 표석
▲ 여유당 표석 여유당 표석
ⓒ 변종만

관련사진보기

 
이 같은 의문들은 어쩌면 소소한 호기심 수준일지 모른다. 다산은 척박한 그 시대에 오로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보호하려는 애민정신과, 배교여부와는 상관없이 서학에 접하면서 왜래문화와 전통문화의 조화를 통한 균형감각, 여기에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는 합리적 학문자세 그리고 과학적인 실용정신 등으로 당대 학문의 선구자였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지표가 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다산 역시 완벽한 성인은 아니기에 아홉가지 줄기에도 관심을 갖고 거목에 접근하려 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다산, #정약용평전, #정약용, #다산정약용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지식인 134인 시국선언' 주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