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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10일 오전 9시45분]

문득문득 생각나는 한 청년이 있다. 그는 러시아의 북동부, 한겨울에는 영하 60℃를 넘나드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지방 야쿠츠크에서 온, 내가 만난 최초의 러시아인이다. 만났던 때가 2017년이었으니 이제 서른 살의 청년이 됐을 텐데 지금 그는 어디에 있을까? 고향 야쿠츠크에서 살고 있을까? 푸틴을 좋아한다고 했었으니 혹시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을까?

사드 반대 시위 도중 만난 러시아 청년

2016년 9월 국방부는 졸속으로 성주 성산포대에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주민들 강한 반발에 부딪혀 성주 끝자락, 김천과 맞닿은 소성리 롯데 골프장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가 롯데 측과 부지교환이라는 '불법·꼼수'를 작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롯데 본사 앞에서 롯데의 부지 공여 반대와 정부의 불법 사드 배치 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탄핵당한 권력의 대행자들은 오히려 더 조바심치며 사드 배치에 열을 올렸다.
  
지난 2017년 9월 7일 새벽, 경북 성주군 소성리 마을회관앞에서 사드 발사대 4기 추가배치를 막기 위해 농성중인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들을 경찰이 강제해산시키고 있다.
▲ 사드 추가배치 저지 주민 강제해산작전 지난 2017년 9월 7일 새벽, 경북 성주군 소성리 마을회관앞에서 사드 발사대 4기 추가배치를 막기 위해 농성중인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들을 경찰이 강제해산시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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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2017년 1월 말 어느 날, 추위를 피해 옅은 겨울 햇볕 아래에서 피켓 시위를 이어가는 내게 한 외국인 청년이 다가와서 '하이!'라며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미국에서 6개월간 공부하고 한국으로 왔다는 그 청년은 사드가 무엇인지, 왜 사드를 반대하는지 물어왔다. 나는 '사드는 미국을 위한 무기로, 한국에 있으면 오히려 주변국들과 관계가 불편해지고 전쟁의 위험만 높이게 될 것'이라고 짧은 영어로 설명했다.

그 청년은 내 설명에 쉽게 동의했고, 무척 인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한국을 좋아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미국은 상당히 좋아하고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러시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것 같다. 미국보다는 러시아가 더 가까운 나라가 아닌가? 중국과 러시아는 이웃 나라들이고 이 나라들과 잘 지내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닌가? 당신은 어떤가?" 

그러면서 청년은 세월호를 구조하기 위해 러시아 해군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안타까웠노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에게 '러시아와 너의 고향 야쿠츠크에 대해 찾아보고 공부해 보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러시아에 한 번 가 보겠노라'며 40분에 걸친 담화(?)를 마쳤다. 그는 2017년 당시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 놀라움과 감탄을 전하며, 사드 철회 투쟁의 승리를 응원하며 떠났다.
  
2018년의 봄, 또다시 좌절된 희망


그리고 2018년 봄.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모든 군사적 적대행위를 멈추고 전쟁의 실질적인 위협을 해소해 한반도 비핵화와 더불어 평화체제를 구축할 것을 선언했다. 온 나라가 흥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성리 진밭교를 지키던 중 작은 휴대전화로 김정은 위원장과 맞잡은 손을 높이 치켜들고 감격스러워하는 문재인 대통령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무렵 소성리 임시 사드 기지에는 한국군 편의시설을 핑계로 공사 차량이 드나들었고, 경찰은 주민들을 여러 차례 폭력적으로 진압했던 기억이 난다.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나흘 전에도 경찰은 폭력을 자행했다. 하지만 판문점의 봄바람이 곧 이곳 소성리에도 닿으리라, 그렇게 희망을 쏘아 올렸다.
  
지난 2018년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
▲ 군사분계선을 넘는 두 정상 지난 2018년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
ⓒ 한국 공동 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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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적폐의 주범을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인권과 사람을 앞세운 이가 대통령이 됐으니 그의 말대로 사드의 군사적 효용을 따져볼 것이고, 북한이 단·중거리 미사일을 두고 굳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남한에 쏠 이유가 없으니 미국 본토와 미군기지를 지키기 위한 사드 배치를 원점에서 다시 따져볼 것이고, 그러면 이미 답은 나온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박근혜 정부가 북한의 핵·미사일을 핑계로 가져다 놓은 저 괴물 같은 사드가 곧 명분을 잃고 소성리를 떠날 것이라고 믿었다.

소성리, 김천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투표장으로 향했던 나의 첫 번째 희망은 대선 후 4개월 만인 2017년 9월 7일, 그야말로 혹독하고 잔인한 대가를 치르게 됐다.

자정 무렵 깜깜한 소성리 골짜기에 만여 명의 경찰들이 깔렸다. 경찰은 주민들 집 대문과 담장은 물론이고 마을회관과 모든 길목을 다 막아선 채 미군이 싣고 온 사드 발사대 4기의 추가 반입을 강행했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사력을 다해 막고 있던 우리는 경찰의 주저 없는 폭력에 고착된 채 울부짖었다. 그리고 우리를 비웃는 듯 화사하게 웃는 미군이 운전하는 거대한 트럭들이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박근혜 사드는 나쁜 사드이고 문재인 사드는 착한 사드'가 된 이 촌극 같은 상황이 우리를 더 아프고, 분노케 했다.

말 잔치뿐인 '평화'... 그가 보여줬던 '군사적 힘'

그런 그가 해가 바뀌자마자 남북 8000만 겨레와 전 세계인을 TV 앞에 앉혀놓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선언했다. 어리석은 나는 다시 한번 희망을 품었다. 그동안 무시당하고 짓밟힌 기억들은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후보 시절 그 많았던 선거용 사절단(?)도 이제는 발길을 끊고, 최근엔 사드의 '사'자도 꺼내지 않은 채 언급이 없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소성리 진밭교의 봄꽃들과 함께 설렜던 봄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화려한 말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평화는 힘으로 일구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한 손에는 전쟁 무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김정은 위원장의 손을 잡은 채 일구는 평화를 말하는 것인가. 남북교류를 사사건건 방해하는 미국에 큰 소리 한 번 못 치고 '평화' '평화' 말 잔치만 요란했다. 적어도 소성리 사드 기지에서 그가 보여준 '힘의 평화'는 군사적 힘이었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가 소성리 임시 사드 기지에 4기의 사드 발사대를 추가 배치한 후 사드 성능개량도 진행되고 있다. 종말모드로만 사용하겠다며 중국의 반발을 무마시켰던 사드 레이다를 예상대로 전방모드로 작동시킬 가능성을 함의하는 여러 시험들을 진행하고 있고, 마셜 제도 콰잘린에서는 사드 레이다와 발사대를 이격해서 요격하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한다. 성능 좋은 사드 레이더를 성주 소성리에 들여놓고 미군기지와 미국 본토 및 인도태평양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주한미군 긴급작전 요구라는 이름으로 진행돼 온 사드의 성능개량을 위해 미국은 이미 방위비 분담금을 소성리 사드 기지에 위법하게 가져다 썼으며 앞으로도 계속 쓰기 위한 예산안까지 반영해 놨다고 한다. 결국, 이렇게 하려고 수천 명의 경찰이 수시로 소성리를 불법과 폭력으로 짓밟았던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온 국민이 긴장했던 지난 5월 29일에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내린 정부가 오히려 대규모 경찰병력을 마을로 배치해 감염을 두려워하는 주민들과 대치시켰다. 문재인 대통령이 8000만 겨레 앞에서, 전 세계인들 앞에서 말한 평화가 결국 어떤 평화인지, 그 모순된 형용을 입증할 증거가 더 필요할까.
  
국방부와 주한미군은 지난 5월 29일 오전 4시 15분께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사드기지에 사드 장비와 공사 장비 등을 반입했다.
 국방부와 주한미군은 지난 5월 29일 오전 4시 15분께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사드기지에 사드 장비와 공사 장비 등을 반입했다.
ⓒ 소성리 종합상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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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와 통일로 가는 사드 투쟁

그러나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드 배치를 철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희망인 '핵 없는 한반도에서 돌이킬 수 없는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리라'던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북미 정상의 싱가포르 성명과 하노이 잠정합의안이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이 이뤄진다면 북한의 핵·미사일을 핑계로 들여온 사드는 명분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또한, 2016년 8월부터 시작된 우리의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은 사드를 매개로 한국을 미국의 MD에 깊숙이 편입시키고 한·미·일 삼각 동맹 아래 두는 것은 물론, 북한과 중국, 러시아까지 적으로 만드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과 전략무기를 철회시키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한반도에 핵전쟁의 참화를 불러올 사드를 두고 어찌 내 이웃 성주 소성리와 내가 사는 김천의 평화만을 지키겠으며, 북·중·러와 대결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무기 사드를 두고 어찌 한반도 평화를 위한 판문점 선언과 평양 선언이 이행되길 바라겠는가?

두 아이를 키우며 소시민으로만 살던 내게 이런 거대한 생각들이 시시때때로 찾아와 각성시킨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는 문재인 정부의 침묵, 방관, 동의 속에서 사드 정식 배치와 성능개량을 위한 불법과 폭력이 얼마나 자행될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우리의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은 미국의 전쟁 무기를 이 땅에서 뿌리 뽑기 위한 것이며,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와 통일로 가는 투쟁이다. 우리는 이제껏 저항하고 지켜온 시간보다 더 잘 싸워나갈 것이다.

한국, 중국, 러시아가 가까운 이웃으로 살면 좋겠다던 러시아 청년의 희망이 하루빨리 분단선을 넘어 남북을 잇는 철길 위에서 현실이 되면 좋겠다. 마침내 남북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중국, 러시아와 좋은 이웃이 되면 좋겠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한 러시아 청년이 희망했던 그 러시아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사드 장비를 반입시키기 위해 아귀처럼 달려들어 우리를 짓밟던 경찰들을 보고 6.25 전쟁은 전쟁도 아니라며 몸서리치던 '금연 할매'와 함께, 폭력과 모멸과 거짓의 시간을 잊고 난생처음 내 손으로 일군 평화의 값진 열매를 흡족히 누리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종희씨는 사드배치반대김천시민대책위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사드, #평화, #소성리, #김천, #평양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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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는 정부, 특정 정치세력, 기업에 정치적 재정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합니다. 2004년부터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 특별협의지위를 부여받아 유엔의 공식적인 시민사회 파트너로 활동하는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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