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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조선인이 만든 도자기 유럽에 팔아 전쟁 준비한 일본]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앞서 우리는 영국 외교관 사토우(Satow)가 일본에서 조선인 도자기 마을을 탐방한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조선인과의 최초 접촉에서 그는 서양 문화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진기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조선인들은 생면부지의 방문자에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호의와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조선의 인정에 사토우는 감동을 느꼈고 조선의 도자 예술에 경탄하였습니다. 동경으로 돌아간 뒤 그는 한글과 한국어 공부에 열중하였고 한국의 문물을 수집하기 시작하였지요. 지금 많은 수집품이 영국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겁니다.  

사토우는 훗날 본국의 당국자나 외교관들이 조선에 무력을 사용하자고 주장을 할 때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습니다. 조선을 미개국 대하듯이 우격다짐이나 무력으로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조선인 마을 방문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소프트 파워입니다. 

돌이켜 보면, 나 조지 포크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본국 정부의 무관심과 반대 속에서 조선에 기울었던 것은 나도 모르게 조선인과 그 문화에 빠졌기 때문일 겁니다. 나에 대한 어떤 학자의 글입니다. 
 
"조지 포크를 동시대의  Harry Parkes(주일, 주청 공사 역임)와 같은 영국 외교관들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 영국 외교관들은 포크와 달리 본국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승승장구했으며 마지막엔 국가로부터 큰 포상을 받았다. 만일 포크가 영국 외교관이었더라면 의심할 나위 없이 입신양명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1880년대의 미국인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는 헌신짝처럼 버려졌다(discarded like an old shoe). 그리고 몇 년 후 일본에서 스스로 택한 고립과 정부 배신의 희생물로 숨을 거두어야 했다." - Tyler Dennett, <Early American Policy in Korea, 1883-7>, Political Science Quarterly, Vol.38. No. 1(Mar., 1923). P.86 

미국과 한국을 깊이 경험했던 내가 보기에는, 처음부터 두 나라는 서로 상대를 인식하는 관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시종일관 자본주의의 실리적 동기에서 접근한 반면, 조선은 신의를 중시했으며 미국을 지나치게 믿고 의존하려 했습니다.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Korea가 처음으로 관심권에 들어온 것은 언제였고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일찍이 1845년 프라트(Zadoc Pratt)하원의원에 의해서였습니다. 국회 발언을 통해 그는 일본 및 조선과의 통상협정 체결을 권고했습니다.

미국이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장사속이 빤한 미국상인들은 조선에서 고려인삼을 직접 가져와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사속이 빤한 미국상인들은 조선에서 고려인삼을 직접 가져와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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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토록 이른 시기에 왜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요? 1845년의 시점은 해상에서 조난당한 미국의 고래잡이 배가 조선 바다에 떠밀려오는 일이 발생하기 10년가량 이전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문은 아닙니다.    

인삼 때문이었습니다. 인삼은 미국에서도 많이 나옵니다. 물론 성분과 효능에 차이가 있죠. 우리 미국인들은 인삼을 벌써 18세기 중반부터 중국에 내다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1757년 코넥티커트 주와 마사츄세츠주의 상인들이 영국의 동인도회사 선박으로 중국 광동으로 싣고 가 팔기 시작한 거지요.

미국산 인삼을 당시 중국인들은 화기삼(花旗蔘)이라 불렀습니다. 중국에서 미국을 '화기국'이라 부를 때였으니까요. 헌데 미국 상인들이 가만히 보니 조선에서 온 고려인삼이 경쟁자인 거예요. 그게 훨씬 더 비싸게 팔리는 겁니다.

장삿속이 빤한 미국상인들은 조선에서 고려인삼을 직접 가져와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겠죠. 그러려면 조선이 미국에 문을 열어야 할 터이므로 자연히 사업가들은 정계에 청원하였을 겁니다. 미국 국회에서 뜬금없이 조선이 거명된 배경입니다. 하지만 그 후로 조선은 다시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19세기 후반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및 신미양요를 거친 후 미국의 조선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1876년 3월 14일 북경 주재 미국 공사 George F. Seward가 국무장관 Fish에게 개인 편지를 보내 "조선과 해상사고협정shipwreck convention을 우선 체결하고 차차 통상 조약을 기대해 보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그런 소임을 맡겨주시라"라는 취지의 건의를 합니다.

이에 대해 피쉬 장관은 6월 24일 "조선과 협상을 시도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 현재로선 좋을 것이오. 단지 귀하가 제기한 문제와 제안은 염두에는 두겠소"라고 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국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조선의 완강한 쇄국정책을 뚫고 오랜 기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교가 성사된 것은 전적으로 슈펠트(R.W. Shufeldt) 제독의 개인적인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조선의 한 지식인이 작용하였습니다. 이 점은 중요한데도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1882년 1월 조선과의 협상을 추진하고 있던 슈펠트가 본국 정부로부터 받은 지침은, '이번에 해상사고협정 shipwreck convention을 타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더 나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슈펠트는 더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가 1882년 5월에 체결된 한미 조약입니다.

서양국가로서는 미국이 조선과 최초로 수교를 함으로써 양국의 운명적인 관계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로써 조선은 마침내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약문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명시한 것은 기념비적 사건이었습니다.

독립국 조항은 청나라 측이 완강히 반대했지만, 슈펠트의 끈질긴 노력으로 성사되었던 것이죠. 이 조약으로 미국은 비로소 자유롭게 조선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양자의 이해가 합치된 좋은 출발이었지요.   

슈펠트가 없었더라면 언제 수교가 이뤄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슈펠트가 바로 한미 관계의 시초이자 원조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의문이 듭니다. 왜 슈펠트는 그처럼 유별난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공명심이나 애국심이었을까요? 사람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의 특별한 조선체험이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그 역사의 현장으로 시공 여행을 떠나봅니다.  

한미조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

1866년에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대해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H.H.Bel)이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사건 발생 한 달 남짓 후인 1866년 11월이었습니다. 미국 배가 불에 탔고 미국인이 죽었다는 사실에 격분한 사령관은 해군장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조선을 응징하기 위하여 함대 병력을 1500명 내지 2000명으로 증강시켜 서울을 점령하자고 건의합니다.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벨 사령관은 휘하의 함정 "와츄세트Wachusett"호를 조선에 파견합니다. 그 함장이 바로 슈펠트였습니다.  

슈펠트는 1867년 1월 21일(양력) 중국 치푸(오늘날의 옌타이)에서 출항하여 이틀 후인 23일 조선의 서해안의 군도( Sir James Hall group of islands)를 마주하는 바다(황해도 장연 長淵 앞바다) 에 닻을 내립니다. 일주일간 머물면서 탐문 활동을 하는 한편 한 통의 편지를 지방관을 통해 국왕 앞으로 보냅니다.

편지를 받아 본 조정은 대책 마련에 부심합니다. 헌데 이상한 일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슈펠트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혹한 때문에 물이 얼어붙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1월 30일 서둘러 서해안을 떠난 슈펠트는 2월 3일 거문도 탐사를 마친 후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것은 슈펠트가 국왕에게 보냈다는 그 편지입니다. 미국이 조선에 보낸 최초의 편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문건이 아닐 수 없지요. 과연 어떤 내용이었으며 어떤 톤이었을까요?  

슈펠트는 편지(한문본)에서 자신을 "대미국(大美國) 흠명수사총병관(欽命水師總兵官) 서(舒)"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서(舒)는 슈펠트를 지칭합니다. 한편 국왕에 대해서는 "대조선국 대국대왕"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합니다. 편지 본문에서 그는 우선 자신이 이번에 이끌고 온 함정은 "공격이나 전쟁 등을 목적으로 내항한 것이 아님"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지난 여름에 조난당한 미국상선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을 조선 측이 안전하게 송환해 준 데 대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헌데 그 언어가 실로 정중하고 곡진합니다.

"미국인들은 이 일을 듣고 귀국의 자애로운 은혜를 찬미해 마지 않습니다.(本國人聞此事, 無不欣美貴國慈愛之恩 본국인문차사, 무불흔미귀국자애지은)"

이어서 그는 서프라이즈호 조난에 뒤이어 발생한 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내항했음을 밝히면서 생존 선원의 선상 인도를 요청합니다. 생존 선원이 있을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죠. 편지 말미에 그는 "이제부터 양국이 종전의 우호에 비추어 서로 상해하는 일이 없기를 원할 뿐입니다. 거듭 양국이 화목하고 상선의 해운이 안전하기를 희망합니다"는 말로써 끝을 맺습니다.  

조선 조정은 긴박감 속에서 이 편지의 진의와 대책을 두고 설왕설래했으나 결국 국왕의 답장은 보내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현지 지방관에게 적절이 대응하라고 통지합니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슈펠트가 급히 떠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정작 흥미로운 조화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와 슈펠트와의 인연

당시 평양감사로 있던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는 우리측이 슈펠트에게 셔먼호 사건에 대하여 진상을 설명해 주지도 못했고 답장을 주지도 않은 것을 큰 실수이자 실기로 보았습니다.

그는 "일을 그르침이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더구나 상대가 무척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편지를 보내왔는데 우리가 묵살했으니 어찌 문화민족이라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강대국의 함장을 그렇게 취급했으니 무슨 앙화가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박규수는 열불이 났을 겁니다.

박규수는 당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출판된 <해국도지>를 탐독했기 때문입니다. <해국도지>에는 미국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실려 있었고 미국이 매우 좋은 나라라고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박규수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한창 병이 심하여 누워 있었는데 병석에서 소식을 듣고 분격을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붓을 잡았습니다. 다음에 그 일로 미국인이 또 올 것을 대비하여 일종의 모의 서한을 작성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문의 명문이 탄생합니다. 

그 내용은 너무 길어 여기 옮길 수 없지만, 박규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제너널 셔먼호의 진실을 당당히 그리고 자상히 소명하였습니다. 박규수는 말미에 "이 사건의 시말은 이상으로 다 말했습니다. 귀국의 풍속이 예양을 숭상하며... 귀 서한에 '종전의 우호에 비추어 서로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이나 우려를 할 것이 없습니다. 이에 삼가 답하니 반드시 양지하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글을 끝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켰던 장본인이기도 했던 박규수가 직접 지은 이 글은 훗날 조정에서 공식 답서로 채택되어 북경을 거쳐 미국에 전해집니다. 물론 영문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아마도 북경 주재 미국공사관에서 번역하였겠죠. 이 글은 슈펠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면서 동시에 조선 측이 미국에 보낸 최초의 공한(公翰, 공적인 편지)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큰 문헌입니다.

더구나 박규수의 이 명문은 일부 미국인들로 하여금 조선을 달리 보게 만들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슈펠트는 훗날 이 글에 대하여 "위정자의 높은 식견이 담겨 있고 진술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본질적 증거를 갖추고 있어 셔먼호의 진실을 믿게 되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슈펠트의 지인이었던 사전트(Sargent) 의원은 수호조약 체결을 주장하면서 이를 낙관하는 근거로서 박규수의 문장이 보여준 개명적 위정자의 경륜과 휴머니티(the sentiments of enlightened statesamaship and humanity)를 들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슈펠트와 박규수가 주고받은 글이 촉매와 효모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응당 받아야 할 주목과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두 나라 모두에서. 만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면 조명을 받았을 터인데. 

한미 조약을 서명한 후 귀국한 슈펠트는 격무와 과로로 인해 오랫동안 몸져누웠지만 그의 노력은 파동을 일으킵니다. 곧 서울에 미국 공사관이 들어선 데 이어 미국 땅에 조선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1883년 9월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조선의 '특별 사절단Special Mission'이라 불렀고 조선에서는 '보빙사'라는 어려운 말로 불렀습니다. 그들을 내가 안내하게 됨으로써 나의 운명은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한미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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