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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전에 봉안된 정조대왕 영정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대왕 영정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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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유능한 임금이었다.

세종에 이어 두 번째로 문화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아들의 외척까지 '손을 봐'서 정치적으로 태평성대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를 뒤주에 갇혀 죽이도록 한 세력의 울안에서 권좌에 올랐다. 아무리 영민한 군왕이라도 꿈꾸던 개혁정치를 펴기 어려운 정국이었다. 아버지(사도세자)를 죽이도록 한 기득권 세력이 요로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조선사회의 전환기에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정조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정부기관 외에 별도로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립하고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북학사상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는 전시대에 이룩한 문화 중심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는 한편, 선진문명을 일구어 내고 있던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하여 상호 보완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그가 탁월한 추진력을 갖추고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당대의 어느 학자와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흔여덟 살, 왕위에 오른 지 24년 만이다. 7년 전부터 온 몸에 종기가 나고 고름이 흐르고 현기증과 두통에 시달려왔다. 『정조실록』이나 노론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밀찰'에서도 병세의 내용이 적혀 있다. 또 다른 견해도 전한다. 이른바 독살설이다. 수 년 동안 앓아온 종기로 갑자기 죽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주석 3)
 
아버지 묘소 가까운 화산에 함께 묻혀 못다한 부자의 정을 나누시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지만 건릉에는 고운 햇살이 가득합니다. 조선의 성군 정조대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 아버지 묘소 가까운 화산에 함께 묻혀 못다한 부자의 정을 나누시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지만 건릉에는 고운 햇살이 가득합니다. 조선의 성군 정조대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아버지 묘소 가까운 화산에 함께 묻혀 못다한 부자의 정을 나누시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지만 건릉에는 고운 햇살이 가득합니다. 조선의 성군 정조대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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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죽음을 놓고 항간에 독살설이 나돌았다. 특히 정조의 죽음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남인은 독살설에 무게를 뒀다. 남인의 핵심 정약용도 「기고금도장씨여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에서 간접적으로 정조의 독살을 거론했다. 하지만 정조 독살설은 근거가 불확실하다.

당시 정치 지형을 감안할 때 독살의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살을 증명할 만한 뚜렷한 증거도 없다. 이에 따라 그때나 지금이나 정조는 독살당한 것이 아니라 병사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주석 4)

정조의 돌연한 죽음은 정약용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참극이었다. 그가 권좌에 앉자 있어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이제 이리ㆍ승냥이 떼 우글거리는 들판에 내팽개쳐진 어린양의 신세가 되었다. 정조의 영구가 수원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며 목놓아 울면서 이별의 시 「계인일술애(啓引日述哀)」를 지었다.

 영구 수레 밤에사 노량나루 모래톱에 이르니
 일천 개의 등촉이 비단장막을 에워싸네
 단청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같은데
 임금님 넋은 어느 틈에 화성으로 가셨는가
 천 줄기 흐르는 눈물은 옷깃 흠뻑 적시고
 바람 속의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곽과 대궐은 옛 모습 그대로이나
 임금님 영정모신 서향각 배알도 못하게 막네.
 
건릉의 정자각으로 향하는 신도와 어도는 정조대왕의 고뇌가 가득해 보입니다.
▲ 건릉의 정자각으로 향하는 신도와 어도는 정조대왕의 고뇌가 가득해 보입니다. 건릉의 정자각으로 향하는 신도와 어도는 정조대왕의 고뇌가 가득해 보입니다.
ⓒ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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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돌연한 죽음은 좁게는 정양용과 그 형제들의 고난으로, 넓게는 국가적 환난으로 나타났다. 한 연구가는 "정조시대는 꽃망울을 터뜨렸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여 미래를 위한 씨를 생산하지 못했다"고 평한다.

정조는 반석이 될 제도를 마련하고 인재를 배치해 이를 국가 조직이 유지하고 이끌도록 해야 했지만 스스로 반석이 되어 조정을 독점했다. 그리하여 그가 죽자 순식간에 국가를 떠받치고 있던 반석이 사라졌고 동시에 왕실과 국가가 붕괴되는 사태가 도래하고 말았다.

이렇듯 정조 시대는 꽃망울은 터뜨렸지만 열매는 맺지 못하여 미래를 위한 씨를 생산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정조는 현실을 가꾸었지만 미래는 열지 못한 미완의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조가 일궜던 문화 혁신의 꽃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주석 5)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정약용의 고난은 유배 18년 동안 민족지성사의 열매를 남기게 되었으니.


주석
3> 정옥자, 『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 11쪽, 일지사, 2000.
4> 박영규, 앞의 책, 346~347쪽.
5> 앞의 책, 35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다산, #정약용평전, #정약용, #다산정약용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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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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