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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열린 보안사 고문가해자 고병천 등에 대한 구상권 행사 촉구 법무부 청원 기자회견에서 신윤경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2019.6.11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열린 고문 가해자 등에 대한 구상권 행사 촉구 법무부 청원 기자회견에서 신윤경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2019.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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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1950년생)는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에서 조부모, 모친 배병희, 숙부숙모 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1969년 3월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생이던 지난 1972년 3월 중순 밤 10시 30분경 이준호는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막 들었던 잠을 깼다. 친모와 친척들은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한국전쟁 중 부친과 함께 월북했던 숙부 이한수가 왔다고 말했다. 잠결의 속옷 바람이었던 이준호는 생전 처음 본 숙부에게 당황해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조부모는 뜻밖에 북에서 온 아들 이한수를 반가워했다. 하지만 모친과 친척들 모습에서 이준호는 당황함과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숙부 이한수는 약 30분 정도 머무르다가 곧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모친과 친척들은 한밤중에 가족회의를 했다. 한국전쟁 중 월북했던 뜻하지 않은 숙부의 방문에 대해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조부모는 극구 만류했다. "부모를 보고 싶어 찾아온 아들을 어떻게 신고하느냐?"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친척들은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했다. 그리고 뒤숭숭한 가슴을 안고 모두 잠을 청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이 없었고 그 다음해인 1973년 2월 이준호는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이준호는 방위병에 소집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 5월 의가사제대를 했다.

이준호가 제대한 1974년 겨울, 그는 모친과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이준호는 인천에서 전자제품상을 열고 자영업에 종사하다가 결혼했다. 그리고 5년 후인 1979년 10월 대우자동차에 입사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그로부터 약 6년이 흐른 1985년 1월 11일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의 아내가 회사로 전화를 했다. "어머니(배병희)가 경찰에 끌려갔어요!" 그는 즉시 회사에서 조퇴하고 급히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경찰은 그에게 "서울역 역전 파출소로 나오라"고 말했다. 그는 마음을 졸이며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아내와 함께 서울역 파출소로 갔다.

서울역 파출소에 도착하니 건장한 형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사들은 그의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근처 다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아내가 자리를 뜨자마자 형사들은 갑자기 어리둥절해 하던 이준호를 경찰차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차 바닥 쪽으로 누르고 외투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 "왜 그러냐? 당신들 누구냐?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가 무섭게 건장한 형사들은 그의 팔을 꺾고 굽힌 그의 등을 팔꿈치로 세게 내리쳤다. 심한 통증에 그는 숨쉬기도 버거웠다.

어머니와 아들을 고문한 경찰

그리고 적막 속에 차는 달렸다. 이준호는 나중에 알았다. 그가 도착한 곳이 서울시경 옥인동 대공분실이라는 것을. 이준호와 그의 모친 배병희는 이렇게 불법연행 되었다. 1985년 1월 11일부터 2월 19일 구속영장이 발부되기까지 모자는 대공분실에서 39일 동안 불법감금 되어 가혹한 고문조사를 받았다.

이준호와 그의 모친 배병희는 이후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로부터 각목과 손과 발을 이용한 구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고문을 견디지 못해 이준호는 결국 자신이 '간첩'이라고 허위자백 했다.

이준호는 1985년 4월 23일 서울형사지방법원 1심 공판에서 당시 수사기관에서 허위사실을 자백한 이유에 대해, 모친과 함께 고문을 당했고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것 아니냐. 시키는 대로 하면 내보내준다'고 해서 그렇게 진술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검찰에서 허위자백을 한 이유는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때 '검찰에 가서 부인해도 소용없으니 여기서 말한 대로 이야기하라. 이미 검찰보다 상급 기관인 안기부에서 결재가 난 일이니 여기서와 다르게 이야기해도 소용없다'며 몽둥이로 겁박해 허위진술을 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1985년 9월 23일 작성한 항소이유서에서도 이준호는 당시 "경찰에서의 48일간 감금 취조로부터 억압과 고문 등 고통스러움에 의한 본 피고인의 거짓 진술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1985년 10월 30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공판에서 이준호는 당시 "39일간 수사기관에서 구금되어 조사받는 동안 어머니와 함께 구타를 당했고, 발로 밟히고, 손으로 옆구리를 맞았다. 자백을 해야 어머니와 나갈 수 있다고 회유해 사실과 다른 허위자백을 했다. 수사관이 검찰에서도 수사기관에서와 같이 자백해야 공소가 취소되고 어머니와 함께 나갈 수 있으며 수사관들과 함께 공작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허위사실을 시인했다"고 진술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어머니를 볼모로 한 고문"
 
 이준호와 그의 모친 배병희는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로부터 각목과 손과 발을 이용한 구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받았다. 사진은 영화 <박하사탕>에서 경찰이 고문하는 장면
 이준호와 그의 모친 배병희는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로부터 각목과 손과 발을 이용한 구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받았다. 사진은 영화 <박하사탕>에서 경찰이 고문하는 장면
ⓒ 이스트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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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는 자신이 고문당한 상황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경찰수사관이 조서를 작성하는 동안 손과 발 등으로 매일 구타했고, 수사관들이 요구하는 대로 조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틀'을 가져오라는 등의 협박을 했다.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쳐서 넘어지면 뒤에서 다른 수사관이 목이나 허리, 등을 짓밟고, 잠을 안 재우고 의자에서 자게하고, 강한 서치라이트 같은 것을 약 3일간 비추었다. 1974년 2차 접촉사실을 조작할 때에는 잠을 전혀 자지 못하게 한 채 진술서를 작성했으며, 잠을 못 잔 상태에서 정신이 몽롱해 진술서를 작성하게 했다.

39일간 영장 없는 불법 구금 상태에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당한 채 모진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너 하나쯤 죽어나가도 아무도 모른다.' 공포의 시간은 수사관들이 원하는 답변을 할 때까지 지속됐다. 결국 전쟁 때 월북한 숙부가 두 차례 고향집을 찾아왔고, 지령을 받아 국가기밀을 탐지했다는 허위자백을 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어머니를 볼모로 한 고문이었다. '네 어머니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려면 우리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수사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이준호는 그곳에서 39일간 불법구금상태에서 모친과 함께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사내는 그를 계속 발로 차며 폭행했다. 이준호는 그 운동화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나이키 운동화'는 그를 '빨갱이'라고 불렀다. 눈에 불빛을 비춰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가 빨리 풀려나길 바란다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라" 했다.

이준호의 1985년 4월 11일과 4월 22일자 접견기록에는 수사과정에서 강제로 쏘인 불빛의 후유장애인 눈의 통증을 호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모친 배병희(1927년생)는 "이준호보다 약간 먼저 연행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수사기관에 구금되었다"고 진술했다.

배병희는 1985년 4월 23일 1심 공판에서 경찰과 검찰에서 행하지 않은 범행사실을 진술한 이유에 대해 "수사기관이 시키는 대로 하면 내보내준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1985년 12월 18일 서울고등법원 공판에서도 '검사 앞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자백한 것은 아들이 이미 자백을 했고 아들의 말과 같이 진술해야 나갈 수 있다고 해서 허위진술을 했다'고 증언했다.

아들 살리기 위해 거짓 자백한 어머니
 

한글을 더듬더듬 겨우 읽을 줄 알던 어머니 배병희는 옆방에서 고문으로 울부짖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또 "시키는 대로 해야 아들과 빨리 풀려날 수 있다"는 수사관들의 말을 믿고 그들이 써온 진술서를 그리듯이 베껴 썼다.

뒤이어 줄줄이 끌려온 이준호의 누나와 매형, 숙부와 숙모도 "네 동생, 조카, 어머니를 살리려면!"이라는 수사관들의 협박에 시키는 대로 '간첩'이라고 허위자백을 해야 했다.

이준호의 숙모 이명금은 1985년 5월 17일 1심 공판에서, 1985년 1월 14일부터 28일까지 수사기관에서 감금된 상태에서 14일간 조사를 받았다며 이렇게 증언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 이한순과 함께 1985년 1월 경 3명의 수사관에 의해 영장도 없이 가택수사와 임의동행을 요구받아 응했으며, 이 당시 구금된 일수는 14일이다."

이준호의 숙부 이한순은 "이준호와 배병희가 연행되고 며칠 뒤인 1985년 1월 14일 인천 자택에서 수사관 3명에 의해 처와 함께 영장 없이 연행되어 각기 다른 방에서 약 2주일간 조사를 받았다"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수사 첫날 벽에 물구나무서기를 시작으로, 수사관들이 요구하는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면 수사실에 있던 수사관들이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고 발로 가슴을 가격하는 등의 폭행을 수시로 당했으며, 수사 기간 내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한 불빛을 얼굴에 자주 비추어 눈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서울시경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으면서 내가 6․25 당시 월북한 형 이한수를 만나기 위해 입북한 사실이 있었다는 허위사실을 조서에 기재할 것을 요구하며 물구나무세우기, 불빛을 비춰 잠 안 재우기, 구타, 물고문 등을 당했다.

이러한 고문조사를 거쳐 1985년 2월 17일 경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해 발부받고, 2월 27일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사건을 송치 받은 검찰은 한 달여 조사를 한 다음 3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 검사 고영주(1949~)가 기소했다. 검사 고영주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2010년), 방송문화진흥회 감사 및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2012년), 헌법수호국민운동본부 상임위원장(2015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2015~2017) 등 요직을 지냈고 문재인 대통령을 후보시절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해 기소되기도 했다.

한편 1심 재판에서 이준호는 "고문과 협박, 회유를 받아서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을 했다. 1972년 숙부가 고향집을 찾아와 30분간 머물다 간 일이 있지만, 지령을 받은 일도 간첩 노릇을 한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의 변론을 맡은 보수적인 반공검사 출신 오제도(1917~2001) 변호사도 "신고하지 않은 잘못은 있겠지만, 간첩은 조작된 것이다. 내가 바로 국가보안법 책도 쓰고 만든 사람인데, 이 사건은 말도 안 된다. 이렇게 하려고 보안법을 만든 것이 아니다. 모진 구타와 잦은 회유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고 법원에서 주장했다. 하지만 아무소용이 없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재판장 부장판사 안문태, 판사 이동영, 권순일)은 1985년 7월 23일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다는 것을 인정할 자료가 없다"며 이준호에게 징역 10년, 배병희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재판장 부장판사 이원배, 판사 곽동효, 박장우)은 1985년 12월 18일 이준호에게 징역 7년 배병희에게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다. 이어서 대법원(대법원 판사 김형시, 정태균, 이정우, 신정철)은 1986년 3월 25일 상고를 기각해 원심을 확정했다.

남편 이준호와 시어머니 배병희가 '간첩죄'로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딸들과 시할머니를 부양하며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낮에는 악착같이 일하고 밤이면 홀로 울었다.

"애들이 우리 아빠 간첩이래"

하루는 어린 딸들이 와서 물었다. "엄마, 간첩이 뭐야? 애들이 우리 아빠 간첩이래." 그는 그 길로 짐을 싸서 이사해야 했다. 또 이사 간 집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시어머니가 '간첩'이란 소식을 들은 집주인이 갑자기 전세가격을 크게 올려달라고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또 이사를 가야 했다.

이준호, 배병희 모자는 1992년 4월 30월과 1988년 10월 31일 각각 7년과 3년 6월의 형을 살고 만기출소 했다. 출소한 이준호는 지난 7년 동안 못다 한 가장의 책임을 다하려고 일자리를 구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어렵사리 취업을 해도 곧 그만둬야 했다. 수시로 새 직장에 찾아와 사장에게 자신이 간첩으로 최근에 출소했다고 알리는 경찰 때문이었다.

더욱이 보안관찰법에 의한 신고의무는 이준호에게 창살 없는 또 다른 감옥살이였다. 그가 하루는 담당 경찰에게 "내 사건은 조작되었고 너무나 억울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이준호는 '재범의 우려'가 있는 보안관찰자가 됐다.

자신으로 인해 딸들의 취직은 물론 혼사도 어려웠다. 큰딸은 결혼을 앞두고 사귄 남자친구 부모로부터 '헤어지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딸의 등을 밀어 그는 외국으로 보냈다. 이 땅에서는 '간첩의 딸'이 살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준호는 출소를 하고도 죄인처럼 살았다.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는 아무 곳에도 취직을 할 수 없었던 이준호와 아내는 할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공사장에 하루살이처럼 '노가다'로 나갔다. 그리고 10여 년간의 '노가다' 생활과 고문후유증으로 그와 아내는 여러 병을 얻었다. 그 후 이준호는 트럭으로 화물을 운반하며 생계를 꾸렸다.

고문하고 진급한 경찰 김현창
 

그를 고문하던 당시 서울시경 옥인동 대공분실 경찰 김현창은 이 사건 공로로 1985년 12월 경장에서 경사로 특진했다. 이어서 김현창은 1989년 3월에 청룡봉사상 충상을 받고 경위로 진급했다.

지난 2006년 필자가 한때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자백 외에 증거가 없는 사건에 대해 검찰은 경찰의 수사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을 요구하는 형사소송의 원칙을 방기하고 기소했고, 법원은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로 조작된 것이라는 호소를 무시하고 유죄판결을 했고, 그 불법수사와 위법한 재판으로 인해 수년간 징역을 살고 나서도 간첩으로 낙인찍혀 고통을 당한 전형적인 간첩조작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위 진실위 결정을 근거로 이준호는 재심을 신청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난 2009년 7월 10일 서울고법에서 재심재판이 열렸다. 이날 재심선고에 앞서 이준호는 법정에서 그는 준비해온 최후진술을 이렇게 읽었다.
 
국가가 한 번 간첩이라고 한 이상 아무리 바르고 곧게 살려고 해도 우리 가족은 간첩의 가족이고 대한민국의 불가촉천민입니다. 헌 누더기 같은, 그러나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억울한 덫을 벗겨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의 행복은 1985년 1월11일, 어머니와 제가 끌려가던 그날 거기에 멈춰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은 판결에서 이준호·배병희 모자는 24년 6개월 만에 마침내 무죄를 선고 받았다. 무죄판결선고 후 재판장은 계속해 판결문을 읽었다.

"한 서민가정의 가장으로, 어린 손녀들을 둔 시골 할머니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던 피고인들은 어느날 간첩으로 지목돼 자백을 강요받았고 이어진 재판절차에서 억울함을 간절히 호소하였음에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통의 세월을 감내해온 피고인과 가족들의 고통과 설움이 가시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억울함을 안고 사는 피해자들이 더 이상 없기를 희망한다."

이날 이준호와 배병희 모자는 법정에서 서로의 얼굴을 감싸며 울었다.

 고영주 "기억나지 않아 할 말 없다"
 
 허위사실을 주장해 문재인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위원회 이사장이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서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8.8.23
 허위사실을 주장해 문재인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위원회 이사장이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서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8.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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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심에서 불법구금과 고문이 모두 인정됐지만, 그를 고문한 경찰관 김현창은 진실위 조사에서 "당시 수사 과정에서 불법적인 행위가 없었다" 주장했다.

그리고 지난 2013년 양승태 대법원은 기존의 판례를 뒤집고 이준호와 같은 조작간첩 피해자들에 대해 최소한의 권리 행사 기간을 축소했다. 양승태 대법원의 이런 결정으로, 이준호와 배병희 모자를 비롯한, 인혁당재건위사건(1974년), 박동운 등 '진도가족간첩단사건'(1981년),  '송씨일가사건'(1982년), 오주석 등 '일본친·인척 간첩사건'(1983년), 정영 등 '미법도간첩사건'(1983년) 등의 피해자들은 손해배상 청구를 거부당했다. 또 이미 가집행한 손해배상금을 고율의 법정 이자와 함께 반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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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85년 이준호를 기소했던 서울지검 당시 검사 고영주는 지난 2016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이준호·배병희 사건에 대해 "기억나지 않아 할 말 없다"고 답변했다.

태그:#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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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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