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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 생가 앞 '시문학파 기념관'
 영랑 생가 앞 "시문학파 기념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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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28일 국군이 공산군을 밀어내고 서울을 되찾았다. 오랫동안 숨어지냈던 김영랑은 9월 27일 수복 기미가 강렬한 서울 거리에 잠시 공기를 쐬러 나왔다가 유탄에 맞고 말았다. 수복 이튿날인 9월 29일 김영랑은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로 154-62 '천주교 용인 공원묘원'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1934년 봄 4월에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1950년 가을 9월 마치 모란처럼 떨어져버렸다. 봄에 피어나 어느 무더운 날 문득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모란을 보며 시인은 비록 슬픔 속이지만 찬란한 새 봄을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환생을 기다릴 수 없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영랑을 만날 수 있는 곳

영랑을 만날 수 있는 두 곳을 더 추천한다. 모란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시인의 자취는 세 곳에 남아 있다. 앞에 묘소를 소개했고, 다른 한 곳은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이다. 
 
전남 강진 김영랑 생가
 전남 강진 김영랑 생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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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생가길 15(남성리 211-1번지)에 있는 옛집부터 찾아본다. 공식 이름이 '강진 영랑 생가'인 이 옛집은 국가민속문화재 제 25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인데,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등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변에 모란밭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공식 해설을 읽어본다.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큰 자취를 남긴 시인 영랑 김윤식(永郞 金允植, 1903-1950)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 본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 밭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불탑이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재능과 지식을 갖춘 '영랑 김윤식의 생가'라는 역사문화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건조물인 전통한옥과 근대 건조물의 이행기의 가옥으로서 문화변용의 한 형태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더불어, 영랑의 문학적 세계를 후손에게 길이 체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 가치가 중요하다. 당초에는 전남강진 기념물 강진영랑생가(제89호)로 지정(1986. 2. 7.)되었으나 신청(2007. 5. 3)을 받아 국가민속문화재 제252호로 지정(2007.10.12)되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영랑은 서울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했다. '거쳐'와 '수학'은 졸업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본 유학을 중도에 그만 둔 것은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강도 7.9의 관동대지진 때문이었다.

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자국 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동경 체류 조선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조선인들이 지진을 기화로 우물에 독약을 넣고 주택에 불을 질러 일본인을 대량 살해하려 든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분노한 일본인들이 무기를 들고 돌아다니며 마구 조선인을 학살했다. 이때 최소 6661명에서 2만3058명의 조선인이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휘문고보를 중퇴한 것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때문이었다. 당시 3학년이었던 영랑은 서울에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구두에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고향으로 왔다. 하지만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6개월에 걸쳐 수형 생활을 했다.

생가, 3·1운동기념비, 금서당 터, 시문학파 기념관

영랑 생가에서 나와 정면으로 100m쯤 내려오면 군청이 있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400m쯤 가면 탐진로 네거리(서성로 66)에 '강진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현지 안내판에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시인 영랑 김윤식이 기미독립선언문을 구두창에 숨겨 와 사흘 뒤인 3월 4일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에 들켜 좌절됐다'라는 내용이 새겨 있다.
 
김영랑이 어릴 때 수학했던 금서당 터.
 김영랑이 어릴 때 수학했던 금서당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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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그렇게 좌절되고 말았는가? 아니다.  안내판에는 '그러나 이 지방 의사(義士) 26명과 군민 4000여 명은 4월 4일 강진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으로 200여 명이 일제 경찰에 끌려가 갖은 악형을 받았으며, 그 중에는 옥사한 사람도 있었다'라는 해설이 더 쓰여 있다.

영랑 생가만 둘러보고 '시문학파 기념관'을 아니 볼 수는 없다. '시문학파 기념관'은 생가 바로 동쪽 길 건너에 붙어 있다. 그뿐이 아니다. 금서당(琴書堂) 터도 반드시 찾아보아야 한다. 생가와 기념관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50m쯤 오르면 영랑생가길 20-7 금서당 터에 닿는다.

이곳에 오르면 강진 전경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중앙초등학교 전신인 금서당은 강진의 신교육이 시작된 곳으로 어린 영랑이 공부를 배운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 19년 4월 4일 전교생 200여 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독립운동의 성지이기도 하다.
  
김영랑이 투옥되었던 대구형무소의 사형장 터에 세워진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에 들어가면 대구형무소 배치도, 이육사 부조 등이 설치되어 있다.
 김영랑이 투옥되었던 대구형무소의 사형장 터에 세워진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에 들어가면 대구형무소 배치도, 이육사 부조 등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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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로 가서 영랑이 투옥되었던 흔적을 살펴본다

영랑을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한 곳은 대구시 중구 공평로 22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이다. 대구형무소 사형장 터로, 1층에 대구형무소 구조도와 이육사 부조 등이 설치되어 있다. 영랑은 이곳 대구형무소에 갇혀 옥살이를 했고, 고문을 당하고 문초를 겪었다.

대구형무소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영랑의 자취 또한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어디 눈에 보이는 것만 실재하는가! 자세히 보면 모란이 피어 있고, 영랑의 밝은 웃음이 찾아온 사람을 반겨준다. 그것이 바로 '찬란한 슬픔'이다.

태그:#김영랑, #9월29일 오늘의역사, #시문학파 기념관, #모란이 피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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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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