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5 17:13최종 업데이트 20.09.1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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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자민당 새 총재 ⓒ 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자민당의 새로운 총재가 됐다. 아베 총리의 급작스러운 사임으로 14일 양원총회 형태로 열린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른 입후보자인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을 여유롭게 따돌렸다. 양원총회는 긴급을 요하는 시국에서 실시되는 총재 선거로, 2007년 아베 신조 총리 사임 시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과 아소 다로 간사장 간의 총재선거 때 열린 바 있다. 13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아베 신조 총리가 그때와 같은 이유로 사임했고, 마치 잘 짜인 시나리오를 보는 듯한 형태로 양원총회가 열렸다.

반전은 없었다. 스가 관방장관은 국회의원 표 394표와 지방 표 141표(47개 도도부현 각 3표씩) 중 288표와 89표를 획득, 총 투표수의 70%에 달하는 377표를 얻어 그야말로 압승을 거뒀다. 지방 표에서 그나마 존재감을 발휘할 것이라 예상됐던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은 의원 표 26표, 지방 표 42표로 68표에 그쳐 기시다 정조회장의 89표(의원 표 79표, 지방 표 10표)에도 못 미치는 성적으로 꼴찌를 기록했다.

특히 지방 표에서조차 스가 관방장관에 더블스코어로 지는 바람에 총리는커녕 앞으로의 정치적 생명조차 위험해졌다. 결과론이지만 이번 총재선거 자체가 아베 신조의 설계 아니냐라는 말도 나온다.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 이시바 시게루를 은퇴시키기 위한 '작전상 사임'이라는 것이다.
 

8월 28일 사의 표명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 연합뉴스

 
아베의 작전상 사임?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베 신조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베 신조의 열등감과 그로 인한 승부 집착은 원래 유명했다.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는 "아베 총리 주변 사람들은 전부 다 도쿄대학 출신인데 아베 총리만 세이케이 대학에 들어갔다"면서 "청소년 시절 형성된 열등감과 비뚤어진 집착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한 '비뚤어진 집착'이 이시바를 향하게 된 계기는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도유망하던 제1차 아베내각은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이른바 '비틀린 국회'가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직접적으로 당시의 아베 총리를 비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때 처음이자 공개적으로 '아베 사임'을 외쳤던 사람이 바로 이시바 시게루였다. 통상선거가 끝난 후 열린 자민당 의원총회에서 아베 총리의 면전에 대고 "(총리는 선거결과를) 책임지겠다고 자꾸 말하는데, 그런 말 말고 어떤 식으로 책임질 것인지 뭘 어떻게 책임지고 새롭게 바꿀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라고 말해 존재감을 내보였다.

당시 이시바 시게루는 그럴듯한 직책이 없었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2년간 방위청 장관을 한 것이 전부였고, 아베 내각 이후 들어서는 후쿠다 내각에서 '성'으로 승격된 방위성 장관을 1년간 맡았지만 제1차 아베 내각에서는 일개 다선의원이었다.

당시 그의 발언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베 신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하지만 아베 신조의 성격상 절치부심했을 것이고 라이벌로 떠오른 이시바 시게루를 어떻게든 짓밟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2012년 9월에 열렸던 자민당 총재선거가 아쉽다는 말이 나온다.

아베와 이시바의 악연

그 선거는, 선거 그 자체로도 명승부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할 그야말로 분수령이기도 했다. 첫 번째 실수는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당시 자민당 총재의 불출마였다. 원래라면 야당시절의 자민당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당내를 결속시켜온 다니가키가 최유력 후보로 떠올라야 하는데, 당시 간사장을 맡고 있던 이시하라 노부테루(이시하라 신타로의 아들) 간사장이 적극적인 출마 의사를 표명하는 바람에 각 파벌의 의향이 갈라지면서 당내 화합을 중시한 다니가키가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해 버린다. 이후 선거는 아베 등 무려 5명의 후보가 난립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차피 그 해 중의원 총선거는 예정되어 있었고 자민당의 집권여당 복귀가 거의 확정적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출마해 재선했다면, 그래서 아베 총리가 아닌 다니가키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출범했다면 일본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두 번째 아쉬움은 결선투표제이다. 자민당 총재선거는 한 후보가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득표수 1위, 2위 후보 간 결선투표제를 치르게 되어 있다.

후보가 무려 5명이었기 때문에서 결선투표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1차 투표에서 이시바 시게루가 예상을 뒤엎고 압도적인 1등을 기록할 것이라곤 예상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만 하더라도 고작 15명에 불과한 소규모 파벌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자민당 최대 파벌 세이와정책연구회의 든든한 뒷배를 가진 아베 신조 후보와 현역 간사장이라는 프리미엄을 가진 이시하라 노부테루가 1, 2위를 해 결선투표에 나갈 것이라는 전망을 뒤엎고 이시바 시게루가 1위를 기록한다.

이시바가 획득한 국회의원 표는 34표에 그쳐 이시하라 노부테루(58표), 아베 신조(54표)에 밀렸지만, 300표로 설정된 당원산정 표에서 165표나 획득해 아베 신조(87표)를 거의 더블스코어로 눌러 버렸다. 당시 이시바의 총 획득 표는 199표였는데, 투표 총 수가 498표였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너무나 아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결국 2위 아베 신조(141표)와 결선투표를 치러야 했는데, 자민당 총재 공선 규정 23조에 따라 결선투표는 국회의원만 참여할 수 있다.
 

이시바 시게루 ⓒ AP=연합뉴스

 
당시 자민당 의원은 198명이었는데, 이 결선투표에서 이시바 시게루는 89표 획득에 그쳐 108표를 획득한 아베 신조가 자민당 총재에 올랐다. 그리고 자민당은 그 해 12월의 총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둬 집권여당으로 복귀했다. 아베 신조는 당연히 총리가 되었고, 그 이후 7년 8개월간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그 기간 동안 일본은 쇠락의 길을 거듭했다.

그만큼 2012년의 자민당 총재선거는 일본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그 자체로도 얼마나 드문 사례인지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결선투표는 1972년 다나가 가쿠에이와 후쿠다 다케오 이후 40년 만에 열린 것이었고, 1차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한 후보가 1위 후보를 이긴 것은 1956년 12월 이시바시 단잔이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를 역전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가는 1년용, 더 큰 그림은...

이러한 사례들을 종합해 본다면 아베 신조의 멘털리티 상 이시바 시게루는 반드시 짓밟아야 할 정적 중의 정적이다. 2007년의 개인적 원한, 2012년의 두려움이 결합돼 이시바 만큼은 은퇴시키겠다는 각본을 그린 것이 아닐까라는 점이다. 물론 몸 상태가 안 좋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리고 코로나19와 각종 스캔들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총리직을 수행하기에 힘든 상황이라는 판단에 이왕 물러난다면 일생의 라이벌 또한 은퇴시키겠다는 시나리오를 그릴 수도 있다. 실제 결과가 그것을 말한다. 서두에 언급했듯 2위도 아닌 3위이다. 이시바의 최대 강점인 지방 표조차 아베가 지명한 스가 관방장관에게 더블스코어로 밀렸다.

스가 관방장관은 특별한 이념을 추종하기보다 성실과 신의를 강점으로 하며 현실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나쁘게 말하면 포퓰리스트이고 좋게 말하면 민의를 중시한다. 리더 타입이 아니다. 절판된 저서 <정치인의 각오>나 최근 번역 출간된 <일본의 내일> 스가 편을 읽어보면 그러한 매니지먼트적 발상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정치인은 직접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를 움직여야 하며 자신은 카리스마나 리더십이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마키아벨리를 즐겨 읽는다고 하면서도 '군주론'보다 '정략론'에 끌린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총리가 되어도 여전히 그는 아베 신조, 아소 다로, 그리고 니카이 간사장과 함께 상의하며 정국을 운영해 나갈 것이다. 결국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14일 총재 경선이 끝난 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로부터 축하 꽃다발을 받는 스가 신임 자민당 총재. ⓒ 연합뉴스

 
스가 총리는 어차피 임기가 1년이다. 연내 해산 후 총선거를 실시한다 하더라도 내년 9월에 다시 총재선거를 열어야 한다. 이 선거에서 스가가 출마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아베, 아소, 니카이 등은 정식 총재선거에서 기시다 후미오 체제로 간다는 플랜을 세워뒀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미리 이시바 시게루라는 싹을 잘라야 한다. 그 전략은, 비록 결과론이지만 기가 막히게 성공했고, 이시바 시게루는 과거 오자와 이치로가 그러했듯 '탈당' 정도의 임팩트를 주지 않는 한 자민당에서는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은퇴할 가능성이 커졌다. 2012년 전도유망한 차세대 리더였던 이시하라 노부테루가 어느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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