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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박완서 작가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읽은 이래 오랫동안 작가의 애독자였다. 이제 더는 작가의 신작을 만날 수 없는 시절, 소개로 받은 <굴비 한번 쳐다 보고>는 박완서 작가만의 통찰력이 새삼 반갑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굴비 한번 쳐다보고
 굴비 한번 쳐다보고
ⓒ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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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우리가 잘 아는 '자린고비' 이야기다. 한참 자랄 나이의 세 아들을 둔 '자린고비'는 적어도 밥만 먹으면 죽진 않을 테니, 반찬 대신 소금기 허옇게 내솟은 굴비 한 마리를 사다 걸고 '밥 한 숟갈 먹고 굴비 한번 쳐다보고'를 외치며 그렇게 먹이며 키웠다. 그 덕분에 자린고비는 좋은 논과 밭을 세 아이들에게 남기고 죽었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세 아이들은 아버지가 가르쳐 준 '구호'에 따라 밥만 먹고 살아간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좋은 논과 밭에서 거둔 풍성한 쌀과 잡곡, 과일임에도 팔리지가 않았다. 외려 사람들은 '겉보기만 번지르르하고 맛도 없는 개살구'라며 비웃었다.

큰 아들을 돕던 둘째 아들은 팔리지도 않는 농사 짓기에 지쳐 떠났다. 어릴 적부터 굴비 쳐다보며 하도 울었던지 목청이 좋았던 둘째는 수월하게 소리를 익혔다. 하지만 웬걸, 둘째의 소리는 사람들의 흥을 돋구기는커녕 손님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해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텅 빈 소리'라는 것이다.

막내 역시 집을 떠났다. 우는 대신 뚫어져라 굴비를 쳐다보았던 막내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막내의 그림을 보고 말했다. '가짜처럼 진짜와 똑같을까'라고. 얼이 없다고 했다.
 
굴비 한번 쳐다보고
 굴비 한번 쳐다보고
ⓒ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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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 아들들은 다시 모였다. 지혜로운 노인을 찾았다. '뻔하지 않은가. 자네들은 남들이 다 아는 맛을 모른다는 걸세'. 세 아들은 때늦게 우습고도 눈물겹게 맛을 배운다. '아이고 뜨거워', '아이고 쓰라려', '아이고 저려'라고.

'근검 절약'의 대명사 자린고비 이야기에서 풀어진 이야기 보따리가 심상찮다. 아들들에게 밥만 먹이고 좋은 논과 밭을 남긴 아버지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물질적인 것에 매달려 아이들의 제대로 된 성장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부모, 아니 나아가 오늘날의 세상을 꼬집은 '촌철살인'일 것이다.

뭐 꼭 물질적인 것이라고 한정지을 것도 없이 남 보기에 번지르르한 것을 내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에 연연해 하는 '풍조' 자체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일 것이다.

코로나 시대 학교를 못 가고, 학원을 못 가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들은 조바심을 낸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예전에 조카가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가는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친구 얼굴을 잠깐이라도 보려고 애쓰는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했던 적이 있다.

가족들과의 따뜻한 저녁 밥상 대신, 인스턴트 음식을 베어물며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하며 살아오던 우리의 아이들.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이 과연 밥만 먹이는 자린고비와 무엇이 다를까.

그런데, 여기서 조금 방향을 틀면 이 이야기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을 것같다. 밥만 먹이며 키운 세 아들, 그 아이들이 뒤늦게 배우는 맵고, 짜고, 신 맛을 경험하는 표현이 '아이고 뜨거워', '아이고 쓰라려', '아이고 저려'이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뜨겁고 쓰리고 저린 경험을 해주고 싶었던가.

어떻게든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세상의 뜨겁고 쓰린 맛을 덜 맛보게 하면서 키우려 애쓰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맛을 경험하지 못한 아들들이 키운 농작물과 내지른 소리, 그린 그림에 '얼'이 없다는 건, 결국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뜨겁기도 쓰리기도 저리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앞서 내 자식에 세상 티끌 묻을까 탈탈 털지 말고 스스로 세상의 맛을 알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란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밥만 먹던 아이들은 '자린고비의 미성숙한 모습'이 투사된 결과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았다. 결국 세상 속으로 한 걸음씩 나아선다. '개인이 성장하고 발달하기 위해서는 가족으로 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야 한다는 보웬의 '자기 분화' 과정이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밥 맛밖에 몰랐던 아이들이 소리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는 과정이 외적인 자기 분화였다면, 개살구라고, 혼이 없다고, 얼이 없다고 조롱받던 세 아들은 지혜로운 노인을 찾아나서는 과정은 내적인 자기 분화이자, 성숙의 과정이다.

늦었지만 그래서 이만저만 고생을 해서 세상의 맛을 배운 세 아들은 아마도 더욱 소중하게 그 맛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낸 농작물과 소리, 그림이 더욱 풍성하고 깊은 맛을 내게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태그:#굴비 한번 쳐다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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