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남 진주시의 비거 테마공원 조성사업을 둘러싸고 논란이다. 이에 강주인문학연구회가 문헌 등에 나타나 있는 ‘비거’와 관련한 글을 보내와 싣는다. <오마이뉴스>는 이와 관련한 찬반 논쟁글을 기다린다.[편집자말]
11. 비거의 실체를 증명하기 위한 연구 - 인천하늘고등학교의 연구

2017년 인천하늘고등학교에서는 '비거'의 실체를 증명해 보기 위해 연구 프로젝트로 만들어 9개월간의 문헌 검토와 실험, 진주성 현장 조사 등을 통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2017 인천하늘고등학교 창의 융합 프로젝트
-정평구의 비거(飛車) 연구- 의 연구 결과

문제 제기 1. 정평구의 비거 이야기, 과연 역사적 진실인가? (3분야로 나누어 연구)
2. 과연 무인 비행체가 진주성에서 이륙할 수 있을까?(5분야로 나누어 연구)
참여 인원 : 연구원(42명)은 모두 인천하늘고등학교 학생(34명)과 교사(8명)가 8개 팀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그 밖에 연구 설계, 기획, 지도, 자문으로 인천고 등학교 교원과 인천대학 교수들이 15명이 참여하여 모두 57명이 이 연구에 관 여하였다.
연구 기간 : 연구 설계(2017년 1월)부터 연구 성과 발표(2017년 9월)까지 모두 9개월에 걸쳐 연구를 수행하였다.
 

2017년 인천하늘고등학교 연구팀이 진주성에서는 사람이 타고 날 수 있는 비거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실험과 현장 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8개의 연구 팀 중에서 비거의 제작과 비행에 관해 연구한 세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1592년 당시 비거의 재료는 한지와 대나무였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현대의 초경량 소재보다 60배 이상 무겁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언급된 동력원인 풀무는 인력 비행체를 띄울 만한 동력원이 될 수 없으며, 풀무의 비연속적인 동력 발생을 동력원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인간의 힘(풀무질)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비거는 비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열기구 형태의 비거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의 힘으로 비행하는 인력 비행기는 최근에 와서야 성공하였다.

2. 릴리엔탈(독일의 비행기 연구가, 편집자 주)의 글라이드와 과천과학관에 전시된 글라이드 형태 비거의 가로세로비를 비교한 결과, 과천과학관 전시 비거의 가로세로비가 가장 작았으며, 이는 충분한 양력을 얻기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또한 들림힘(부력, 편집자 주)의 평형이 맞지 않음을 통해 불안정한 비거를 조종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1592년 당시 기술로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거를 원하는 곳으로 조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3. 플라잉 더미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의 재료와 기술로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플라잉 더미는 실제 사람을 태우는 비행체가 아니기 때문에 강도가 큰 대나무를 골격으로 삼고, 명주천 또는 한지로 날개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충분히 구현할 수 있다.

※ 플라잉 더미(Flying dummy) : '하늘을 나는 인형'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수행하면서, 독일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무인 비행체인 '파라더미'를 날려 보내 독일군의 총탄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연구팀에서는 이 이름에서 따와 '플라잉 더미'라 이름 지었다. <편집자 주>
 

인천하늘고등학교에서는 2017년 9월 <인천하늘고등학교 창의융합프로젝트 -정평구의 비거(飛車)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으며, SBS에서는 이 프로젝트 수행의 전 과정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그해 9월 17일에 방영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요컨대 이 인천하늘고등학교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16세기 우리나라 과학 기술로서는 무인 비행체를 만들 수 있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유인 비행체인 '비거'를 만들어 진주성전투에 사용할 수 없었음을 말해 준다.
 
진주시가 만든 '진주재조명 역사 미니다큐 - 비거'의 한 장면.
 진주시가 만든 "진주재조명 역사 미니다큐 - 비거"의 한 장면.
ⓒ 진주시청

관련사진보기

 

12. 비거에 관련 자료의 전시- 항공우주박물관

'비거' 관련 자료는 국립항공박물관, 국립과천과학관, 농업기술센터 천문관, 공군사관학교박물관, 항공우주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으며, 거기에 '비거'에 관한 설명이 들어 있다. 여기서는 경남 사천에 있는 항공우주박물관의 비거에 관한 설명과 비거를 제작하여 비행 실험을 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정평구(鄭平九)의 비차(飛車)

조선시대 철종(1831~1863) 때 고증학자 이규경(李圭景) 선생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실린 비차변증설(飛車變證設[오자임])

- 임진왜란(1592년)때 영남의 진주성(晉州城)[원문에는 그냥 고성(孤城)으로 되어 있음],이 왜군에 포위되었을 때 성주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비차(飛車)를 만들어 타고 성으로 들어가 성주를 태우고 약 10m 높이[원문에는 없음]로 날아가 30리 밖으로 날아나와 인명을 구했다.

- 비차(飛車)는 4명을 태울 수가 있고 따오기와 같은 모양으로서 양각풍(회오리바람)이 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광풍이 불면 추락한다고 기술되어 있다.[이 내용은 비거 제작자 윤달규에 관한 이야기 뒤에 있는 것이라, 성주가 타고 날아간 '비거'에 관한 이야기인지, 윤달규가 만든 비거에 관한 이야기인지, 그 밖의 다른 사람이 만든 '비거에 관한 이야기인지 불분명한 것임]
 

건국대학교(建國大學校) 비차(飛車)연구팀 모형 복원

비차 제원 및 비행 성능

- 탑승인원 : 1명 - 공허중량 : 32.5kg
- 주 날개 총면적 : 43.3㎡ - 골격구조 : 대나무(마른 竹 이용)
- 전 폭 : 11.46㎡ - 날 개 천 : 무명천(얇은 화선지를 접착)
- 전 장 : 6.30m - 바 퀴 : 소나무
- 차 륜 폭 : 0.72m - 바 퀴 축 : 참나무
- 최대활공거리 : 74m - 결속재료 : 무명끈
- 활 공 비 : 3.7 - 머 리 : 무명천과 솜
- 최대고도 : 20m


설계/제작된 비차(飛車)는 경기도 안산에서 2000년 3월 3일 첫 비행을 하였으나, 바람이 약하여 커다란 활공비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3월 4일 30회의 시험 비행을 마치고, 최종적인 실험에서 약 10초 동안 최대 비행고도 20m에서 최대비행거리 74를 비행하였다. 이로써 비차(飛車)가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또한 비행을 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였다.

건국대학교 비차 연구팀에서 복원된 모형은 비행 후 파손되어 지금은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의 문제점을 적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비거가 실제로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비거의 실체에 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데 어떻게 비거를 복원할 수 있을까? 더구나 실물도 아닌 모형[실물을 본뜬 모양]을 복원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2) 맨 첫 번째 제목에 '정평구'란 이름이 나와 있는데 그 밑의 글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서산고>에 있는 비거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규경의 글에 성주가 타고 날아간 비거 제작자를 정평구라고 한 내용이 없으니 제목과 설명글이 맞지 않는다.

(3) 이규경의 글에는 비행 고도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도 무엇을 근거로 '10m' 높이로 날아갔다고 말하고 있는가?

(4) '비거'에 관한 옛 이야기를 앞세운 것은 임진왜란 때 사용되었다는 '비거'를 만들어 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재료는 16세기에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했지만, 제작은 21세기의 항공과학자들의 기술과 지식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이것을 과연 16세기말 비거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설사 그런 '비거'가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전쟁 당시의 진주성에서는 활주로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또 진주성은 바람이 잘 불어오지 않은 곳이라 이륙하기 힘든 곳이다. 실험에서 최대활공거리가 74m라 했는데 그 정도 거리를 비행을 했으면 진주성 남쪽에 있는 남강에 추락해 익사했든지, 왜군 진영에 떨어져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태그:#비거, #진주시, #하늘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이 기자의 최신기사사과값이 선거판을 흔든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