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서 인상적인 '첫 등장 씬'하면,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꼽는 사람이 많다. 관상가가 풍문으로만 전해 듣던 '이리 상'을 직접 확인하게 되는 그 장면은 스토리 전개상 변곡점이 되는 중요한 대목이었다. 수양대군 역의 이정재 배우가 별다른 대사나 액션 없이도, 배우로서의 가치와 아우라를 여과 없이 증명해 낸 덕분에 그 장면은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의 삭발 씬 만큼이나 수많은 여성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낼 수 있었다.
 
이정재 배우가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레이 역으로 열연하며 또 한 번 충격적인 등장 씬과 함께 관객을 찾고 있다. 형의 장례식에서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복수를 다짐하는 냉정한 야쿠자 레이의 눈빛에서 관객들은 세월과 함께 깊어진 이정재 배우의 연기 내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범죄' 장르에 특화된 라인업 완성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년 8월 5일, 황정민과 이정재의 조합만으로도 화제를 모은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드디어 개봉되었다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년 8월 5일, 황정민과 이정재의 조합만으로도 화제를 모은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드디어 개봉되었다 ⓒ CJ 엔터테인먼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2015년 영화 '오피스'로 데뷔해서 제16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한 홍원찬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함께 맡았고,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직 특수요원이자 현직 청부살인업자인 인남 역에 황정민 배우, 형의 복수를 위해 물불 안가리고 인남을 쫓는 야쿠자 레이 역에 이정재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범죄' 장르에 특화된 완벽한 라인업을 완성했다.
 
사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배우 황정민과 이정재의 만남만으로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2013년 영화 <신세계>에서 공동 주연을 맡으며 극 중 끈끈한 브로맨스를 선보였고 수많은 팬덤을 형성한 바 있기 때문이다. "어이, 브라더!" "거 중구형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와 같은 배우들의 대사는 큰 인기를 끌며 각종 예능프로그램에서 패러디 되기도 하였다.
 
홍원찬 감독 또한 그동안 <내가 범인이다>, <추격자>, <황해> 등의 작품에서 각색을 맡으며 범죄물에 타고난 재능을 다수의 영화 팬들에게 인정받아 왔다. 따라서 홍 감독이 황정민, 이정재 배우와 손잡고 내놓은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은 클 수밖에 없다. 코로나 시국으로 전반적으로 영화 관람률이 저조한 요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현재 누적 관객수 430만을 넘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한때 정부를 위해 일하던 특수요원 인남(황정민)은 몸담고 있던 조직이 무너지고, 사랑하는 여자 영주(최희서)마저 떠나 보낸 뒤  청부살인업자가 되어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 일본에서 마지막 의뢰 대상을 살해하는 데 성공한 인남은 은퇴를 결심하지만, 그 와중에 뜻밖에 영주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누군가에 의해 처참히 훼손된 영주의 시신을 인계받으며 분개하는 인남. 인남은 영주가 자신의 아이를 낳아서 태국에서 혼자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이가 납치된 이후,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인남은 자신의 남은 생을 걸고,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방콕으로 떠난다.
 
납치된 아이를 찾기 위해 방콕을 종횡무진 누비는 인남의 뒤를 레이가 바짝 쫓는다. 살인 과정이 마치 짐승을 도축하는 것처럼 잔인하다 하여 '백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레이. 인남이 마지막으로 죽였던 남자가 바로 레이의 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인남은 두 사람의 결말이 파국일 수밖에 없음을 예견한다.

아동 장기매매를 일삼는 인신매매 조직에게 납치된 딸을 찾고, 또 레이로부터 자신과 딸을 지켜야 한다는 두 가지 난관에 동시 봉착한 인남. 과연 인남은 다만 '악'에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선악의 이분법 대립에서 벗어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한 장면 배우 이정재는 그간의 이미지를 벗고 냉혹하면서도 편집증적인 야쿠자 킬러 레이 역을 맡아 열연했다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한 장면 배우 이정재는 그간의 이미지를 벗고 냉혹하면서도 편집증적인 야쿠자 킬러 레이 역을 맡아 열연했다 ⓒ CJ 엔터테인먼트

 
이 영화에서 감독은 선악의 이분법적인 대립을 보여주진 않는다.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인신매매 조직에 맞서 싸우긴 해도 주인공 인남 또한 오랫동안 살인을 업으로 삼아 온 악당이며 결코 '선'을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남을 쫓는 레이 역시 전형적인 악인의 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애초에 형의 죽음이 인남을 쫓게 된 도화선이 되기는 했지만, 인남을 쫓는 과정에서 레이가 애초에 품었던 복수심은 사라지고 만다. 레이가 인남을 쫓는 이유, 죽이려는 이유는 그 어떤 필연적인 '목적성'도 갖지 못한다.
 
이 영화는 '납치된 아이를 구출해야 하는 아버지'라는 신파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시종일관 펼쳐지는 총과 칼과 주먹질이 난무하는 폭력적인 장면에 일종의 면죄부를 준다.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저렇게 나쁜 놈으로부터, 저렇게 가련한 아이를 구하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묵인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황정민과 이정재 배우의 재회는 <신세계> 속편의 제작을 두 손 모아 염원하고 있는 팬들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정재 배우는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신세계>의 속편이 제작되기 위해서는 자신과 황정민이 이십 대 청년 시절을 연기해야 하는 데 그것은 좀 어렵지 않겠느냐는 너스레로 속편 제작이 없을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신세계> 팬이라면 속편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이 영화로 달래봐도 좋지 않을까? 물론 이야기가 얽혀가는 과정에서 인물 간에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야 한다는, '개연성'을 중시하는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배우의 착착 감기는 연기 호흡과 한국과 일본 태국을 오가며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 씬, 차량 추격 씬을 기대하고 관람한다면 충분히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다. 판단은 물론 관객의 몫이다.
다만악 이정재 황정민 2020년 8월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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