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5 12:41최종 업데이트 20.09.2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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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정지용 생가 ⓒ 임현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눈으로만 읽어도 리듬이 절로 날 만한,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이 남긴 시다.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을, 한 편의 동화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수채화 같기도 한 작품이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정지용의 아명은 태몽을 근거로 한 지용(池龍)이다. 요즘 같았으면 팬들이 지드래곤이란 별명을 지어줬을 만도 하다. 옥천공립보통학교(초등)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들어간 뒤 문학 동인(同人)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19년 3·1운동 때 교내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받았다.

스물한 살 때인 1923년, 그는 그로부터 19년 뒤 윤동주가 들어가게 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현해탄을 건너온 1929년(27세) 이후로는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그런 상태로 43세 때 해방을 맞이했다.

서른 즈음이던 1930년대 초반에 그는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후배 시인들을 세상에 소개하는 데도 기여했다. 이상(1910년 생), 박목월(1915년 생), 박두진(1916년 생), 조지훈(1920년 생) 등이 그의 조력에 힘입어 등단했다.

해방 뒤 이화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한국어와 라틴어를 가르치게 된 정지용은 <경향신문> 편집주간 일도 하고,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위원장 활동도 했다. 1949년 11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시인 정지용 씨도 가맹'은 이때까지의 그의 문학 인생을 이렇게 정리했다.
 
23년이란 오랜 교원 생활의 경력보다도 시작(詩作)에 있어 이 땅에 처음으로 모더니즘을 도입하여 우리말의 참신한 구사로써 문단에 유닉한 지보(地步)를 차지하고 시집 <백록담>의 저자로서 더 많이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반면, 경제적으로는 언제나 불우하다고 하는 시인 정지용 씨는 또 열렬한 카토릭 신자이기도 하거니와 해방 후 임화(林和) 일파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문학가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남로당의 충실한 선전기관으로서 행세해오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때로는 중간파로 혹은 좌익으로서 세간에 커다란 의혹을 던져 왔었던 바.
 
해방 후에는 좌·우 대결의 중심에 서고 미군정과 한민당(한국민주당) 등의 친일세력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그는 문학적으로 '유니크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평가되는 저명한 시인이었다. 그런데 1949년 11월 뜻밖의 일로 그가 신문지상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위 기사 제목에 언급된 '가맹'과 관련된 일이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제주 4·3항쟁 진압을 반대하는 육군 14연대 장병들이 1948년 10월 남로당과 공조해 여수·순천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바로 이 여순항쟁(여순사건·여순반란)의 여파로 인해 진보 성향 인물들이 남로당원으로 의심 받고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던 때의 일이다. 이때 있었던 정지용에 관한 사건이 위 신문에 이렇게 보도됐다.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앞으로 3일 앞둔 4일 상오 현재, 서울지구에 자수하여 온 사람의 수는 3876명으로 그중 40퍼센트는 비(非)당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4일 아침까지 자수한 사람 중에는 전평(全平) 강릉지구위원장 이기성(51) 외 다수와, 세간에 월북하였다는 풍설까지 떠돌게 한 시인 정지용 씨도 가맹을 하여 왔는데, 문학인으로는 이번 정씨가 처음이라고 한다.
 
강제로 가입됐다는 말도 있지만, 위 기사에서 정지용이 자진해서 가맹했다고 말한 곳은 국민보도연맹이다. 좌파 출신 전향자들을 가입시켜 보호·지도함과 동시에 이들에게 갱생 기회를 준다는 명목 하에 출범한 이 단체는 실제로는 반미·반이승만 성향의 국민들을 관리하기 위한 기구였다. 위 기사는 정지용이 다음과 같이 가맹 동기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나는 소위 야간도주하여 38선을 넘었다는 시인 정지용이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러한 중상과 모략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내가 지금 추궁하고 싶지 않는데, 나는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이다. 나는 23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왔다. 월북했다는 소문에 내가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집을 옮기는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던 바,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권유가 있어 오늘 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볼까 한다.
 
이승만 정권은 좌파 성향과 반미·반이승만 성향을 버리면 안전한 삶의 기회를 줄 것처럼 했지만,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이들을 잡아들여 감옥에 넣고 마구 죽였다. 이로 인해 희생된 사람이 최소 5천에서 최대 20만 명이라는 추정이 있다. 정지용이 문학인으로서는 최초로 가맹했다는 단체는 그런 곳이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조금 지난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48세 된 정지용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붙들렸고 그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오늘날에는 그가 인천상륙작전 뒤 철수하는 북한군에 끌려 북행하다가 70년 전 이맘때인 그해 9월 25일 경기도에서 미군 폭격을 받고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그가 월북한 것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충북 옥천 정지용 문학관 전시실 입구에 설치된 정지용 밀랍인형 ⓒ 임현철

 
이로 인해 남한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 것 중 하나가 <향수>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이다. 1951년 10월 5일자 <자유신문> 기사 '공보 당국, 월북작가 작품판매 및 문필활동 금지방침 하달'에 따르면, 그는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 시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됐다.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이전 월북자는 A급(38명), 이후 월북자는 B급(24명), B급인지 아닌지 모호한 사람은 C급(12명)으로 분류했다. 그런 뒤 A급과 B급에 대해서는 이미 발행된 작품의 판매를 금지하고 향후 문필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C급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를 통해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정지용은 C급으로 분류됐고 그의 작품은 판매 금지처분을 받았다. 2018년에 <구보학보> 제20집에 실린 김미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논문 '월북문인 해금의 이면'에 따르면, 당시 중등 교과서에 실린 그의 작품만 해도 <고향>, <별똥 떨어진 곳>, <꾀꼬리와 국화> 등을 포함해 열 편 가까이 됐다. <향수>와 더불어 이런 작품들은 '부모'를 잃고 어둠을 헤매는 아이들이 되고 말았다.

정지용 작품에 대한 금기시는 문학적 차원을 넘어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에 대한 문학적 탄압은 해방 뒤 친일청산을 희구하고 민족분단을 반대한 사람들이 남로당 빨갱이 등으로 몰리며 한국 사회의 이단자로 내몰리던 부조리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런데 그가 갖는 역사적 의의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수구·보수세력에 의한 한국 현대사의 왜곡을 어느 정도 극복한 정치변혁과 관련해서도 상징성을 가질 만하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87년 9월 깊은샘 출판사에서 출간하여 정부에 납본한 <정지용 선집-시와 산문>이 1988년 1월 납본필증을 교부받으면서 시인 정지용이 공식적으로 납·월북 작가 해금 1호가 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해방정국 하에서 민중 및 진보진영이 친일세력 및 이승만 정권에 패한 뒤에 정지용은 국민보도연맹 문학분야 1호 가입자가 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랬던 그가 1987년 6월항쟁의 승리로 수구보수세력이 타격을 받은 직후에는 납북·월북 작가 해금 1호로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패배의 상징 중 하나였던 그가 승리의 상징 중 하나로 부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지용은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과 진보세력의 패배 및 역전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그와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아련한 시구를 가진 작품이다. <향수>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래이기도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상처와 영광을 동시에 상징하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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