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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의 성을 가진 사람이 '계장'이라는 직책을 가져서 임계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직책이나 성씨(氏)와는 상관없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었다.

지금도 주상복합 건물의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작가는 '철밥통'이라는 공기업 정규직으로 38년간 일하다 퇴직 후 버스 회사 배차 계장, 아파트 경비원, 빌딩 주차관리원 겸 경비원, 버스터미널 보안요원 등의 일터를 거치며 4년째 시급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다.
 
책 <임계장 이야기> 앞표지
 책 <임계장 이야기> 앞표지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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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마흔을 앞둔 나는 두 자녀가 있다. 경력단절이 오래되면서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은 이제 실습만 앞두고 있다. 어느 날인가 거실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다가 남편과 내 나이를 계산해보니 아이들이 20대 중반이 되면 그 이후의 대책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부부의 노후까지 나아갈 것도 없이, 이미 그 전에 우리에게는 연금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 내가 여성으로서 50대, 60대가 되어서 나를 써줄 곳은 어디일까 고민해보니 돌봄노동밖에 없었다. 나의 자격증 취득이 경력단절 여성의 자기개발 스토리로만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확실하지만 어쩌면 뻔한 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인권활동가로 활동하면서 공권력과 싸우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고, 불의에 저항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을 꿈꿨던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임계장'이 되어 "최저임금으로 최고의 노동을 바쳐라!"(p250)는 고용주들의 요구에 넙죽 엎드리며 잘리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오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당신도 이제 화려한 시절은 갔으니 그 시절을 빨리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바닥에서 살아갈 수 있소."(p20)

은퇴 뒤 버스 배차원 면접에서 면접관이 작가에게 한 말이다. 이에 작가는 살아온 세월을 화려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시급노동의 세계에 몸을 맡기고 나니 지난 세월이 화려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은퇴 후,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고령자들에게 "따분하게 노는 것보다 일을 하시니 건강에도 좋고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p126)라고 묻는 정치인의 질문은 기혼 여성들의 노동을 "반찬값"을 위한 부수적인 노동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 없어"(p122)라는 동료 경비원의 충고에 고통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들었다는 작가는 그래도 최후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

봄이 되면 떨어지는 꽃잎을 치우지 않기 위해 아예 꽃봉오리로 있을 때 미리 털어내는 동료 경비원의 행동에 "꽃잎을 머금은 봉오리가 활짝 핀 꽃송이보다 더 값지지 않겠어요?"라며 인간다움의 마지막 끈을 부여잡는다.

가족들에게 이 책을 읽으며 마음 아파하지 말기를 신신당부할 정도로 '사람'으로서 받지 않아야 할 대접을 받으며 시급 노동자의 삶을 '임계장' 조정진 작가는 지나칠 정도로 덤덤하고 담백하게 써내려갔다.

우리는 이 담백함에 속지 말고, 덤덤함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임계장'이 될 수밖에 없을 우리의 미래.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가 무엇인지 이 책은 계속 묻는다. 답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건물주'가 답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덧붙이는 글 | - 천주교인권위원회 소식지 교회와인권 277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 글쓴이 배여진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입니다.


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조정진 (지은이), 후마니타스(2020)


태그:#임계장, #경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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