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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 1. 19.  부산포로수용소에서 기간 병이 포로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깎아주고 있다.
 1951. 1. 19. 부산포로수용소에서 기간 병이 포로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깎아주고 있다.
ⓒ NARA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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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이발소 이야기
 

어린 시절 나는 부잣집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꽤나 호강스럽게 자랄 만도 한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좀 산다는 다른 집 애들은 주로 공부만 하게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린 내게 온갖 잔일을 다 시켰다.

쇠죽 끓이는 일, 꼴망태기 메고 소 꼴 뜯는 일, 산이나 강둑에서 소를 치는 일, 새참 나르는 일, 모내기 때 못줄 잡는 일, 디딜방아 찧는 일, 보리나 콩 추수 때 도리깨질, 논두렁에 콩 심는 일, 산에 나무하러 가는 일 등, 당시 농촌에서 하는 일은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나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처럼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우리 집보다 훨씬 못사는 집에서도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는데, 왜 나는 가난한 집 자식 이상으로 막일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부끄러웠고 창피스러웠던 기억이 한둘이 아니다.

그 무렵, 때때로 꼴망태기를 메고 가다가 내 또래 여자애를 보면 창피스러워 숨곤 했다. 역전에 사는 아이들은 검정 교복에 신발도 운동화요, 머리도 하이칼라(스포츠형)인데 나는 언제나 평상복에 고무신이요, 까까머리였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막깎기' 이발료도 아끼려고 나를 철길 건너 각산 홍씨네 무허가 이발소로 데리고 갔다. 그 집 헛간은 간이 이발소로 거적문을 올리면 맨땅바닥에 딱딱한 나무 의자만 덜렁 놓였을 뿐이다. 요즘 그 흔한 거울도 없었다.

홍 이발사는 이빨 빠진 바리캉으로 내 머리를 사정없이 마구 밀었다. 그 바리캉이 내 머리통을 전후좌우 마구 헤집고 누빌 때면, 두피가 따끔따끔하여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머리 깎는 일은 잠깐이면 끝났다. 그 뒤에 머리 감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
  
 할아버지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할아버지는 산이나 들에 갔다가 돌아오실 때에 산딸기를 따다가 칡잎에 싸 오셨다. 어느 날 안흥산골에 살 때 산책 중, 산딸기를 보자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카메라에 담았다. 앞으로 기사에 종종 내가 촬영한 사진도 넣을 예정이다.
 할아버지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할아버지는 산이나 들에 갔다가 돌아오실 때에 산딸기를 따다가 칡잎에 싸 오셨다. 어느 날 안흥산골에 살 때 산책 중, 산딸기를 보자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카메라에 담았다. 앞으로 기사에 종종 내가 촬영한 사진도 넣을 예정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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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쇠 할아버지

나는 머리에 남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고는 그 집 우물가로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은 다음 세숫대야에다 부었다. 그런 다음 머리를 거기다 담근 후 새까만 빨랫비누로 칠한 뒤 박박 문질렀다. 그러면 머리통이 화끈했다.

"시원하지? 쇠똥이 벗겨지니까 인물이 훤하다."

할아버지는 눈두덩이 벌겋게 된 손자가 안쓰러웠던지 점방(구멍가게, 요즘의 편의점)으로 데려가서 눈깔사탕 한 줌을 사주었다. 나는 그걸 입에 한입 물고 염소 새끼마냥 할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쩌다 내 입에서 '쌍시옷' 소리가 나오면 할아버지는 당장 날벼락이었다. 내 입에서 불평할 때 흔히 아이들이 쓰는 '아이씨!'라는 말이 나올 때면 당장 회초리였다. 내가 꼭 심기가 언짢을 때는 대신에 '아이참!'이라 하라고 일러주었다.

아무튼 할아버지의 엄한 훈육으로 평생 쌍시옷이 들어간 말은 쓰지 않고 살았다. 집안 어른이 오면 꼭 큰절을 드리게 했고, 손님이 가지고 온 과자나 과일은 반드시 어른이 먹으라고 줄 때야 비로소 맛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손이 귀할수록 마구잡이로 키워야 한다고 늘 말씀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말씀의 의미를 몰랐다. 할아버지는 구식으로 으레 그런 분, 워낙 구두쇠라서 매사에 아끼고 야단치는 분으로만 여겼다.

"귀한 자식일수록 속으로 사랑하라"는 그 할아버지의 말씀이 이즈음에야 진하게 감명을 준 것은, 부모의 지나친 보호 아래 자란 자식들이 인생 길이 빗나가는 걸 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구미중학교 3학년 봄소풍 때 금오산 다혜폭포(큰폭포) 아래에서(1960. 5.)
 구미중학교 3학년 봄소풍 때 금오산 다혜폭포(큰폭포) 아래에서(1960.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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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진학하다

할아버지는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데 숱한 역경이 굽이굽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귀한 손자지만, 당신이 손자의 평생을 책임질 수 없다고 나를 엄하게 키웠나 보다. 물거품 같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그 어떤 역경이나 시련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을 길러주는 게 올바른 교육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여 이태 만에 기왓장까지 왕창 내려앉고 말았다. 그 중 가장 큰 까닭은 아버지의 무모한 국회의원 출마 때문이었다. 그것도 경상도 감자바위라는 선산에서 애초에는 진보당으로 출마하려다가, 그 당이 해산되는 바람에 대신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했다가 낙선했다.

1958년 4월, 나는 구미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무렵 밥술이나 먹는 집 아이들은 대부분 대구나 김천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 집안 살림은 갑자기 어려워져 구미중학교조차도 외가의 학비 지원으로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가족마저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서울로, 어머니와 막냇동생은 김천 외가로, 미혼고모들은 부산에서, 동생들은 여러 고모 댁으로 흩어졌다. 나는 고향에 남아 큰고모 댁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때 큰고모 댁은 살림이 넉넉지 않아 점방과 함께 닭과 토끼를 길렀다. 그래서 하교 후에는 닭과 토끼 먹이로 개구리를 잡거나 망태를 메고 풀을 뜯으러 다녔다. 매 분기마다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면 외가로 갔다.

내가 외가에 가면 외삼촌께서 알아차리고 돌아올 때면 등록금을 챙겨줬다. 중학교 재학 3년 동안 그렇게 외가에서 등록금을 받아왔다. 나는 외가에서 학비를 얻고 50리 길이나 되는 먼 길을 돌아올 때는 늘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김천시 금릉군 어모면 다남동의 외가
 김천시 금릉군 어모면 다남동의 외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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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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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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