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다산초당 정약용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600여권의 책을 편찬했다.
▲ 다산초당 정약용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600여권의 책을 편찬했다.
ⓒ 강대호

관련사진보기

 
유배 기간이 길어지면서 차츰 감시의 눈길도 느슨해지고 더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강진에 도착한 이듬해 강진현감 이안묵이 정약용이 임금을 원망한다고 조정에 무고하여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거소가 수색을 당했지만 무고로 마무리되었다.

1802년 "부친의 친우로 강진현 목리(현 강진군 도암면 향촌리)에 사는 윤택광이 몰래 조카 윤시유를 통해 술과 고기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위로해 주었다. 그 무렵 그의 친구로 강진 앞바다의 고이도(현 완도군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돌아가는 교리(校理) 김이재가 찾아왔다가 윤서유(윤택광의 아들)와 윤시유를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한 감시가 너무 심한 점을 지적하여 이때부터 서리들의 감시가 많이 풀리게 되었다." (주석 1)

1805년 겨울에 거처를 강진읍에서 북쪽으로 5리쯤 떨어진 우두봉 아래 있는 보은산방으로 다시 1806년 가을에는 읍내 남쪽 목리에 있던 제자 이청(李晴)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유배 이래 강진 읍내에서 8년여를 보내고, 마흔일곱 살이 되는 1808년 봄에 마지막 거처인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1808년 순조 8년 봄, 정약용은 강진현 남쪽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윤단(尹慱: 필자의 6대 조부)의 산정(山亭)이 있는 다산(茶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 강진군 도암면 귤동 뒷산이다. 귤동은 가을이면 노랗게 유자가 익어가던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이 속된 뜻을 두지 않고 한가롭게 천 여권 장서를 갖추고 책을 읽으며 지낸 산 속의 정자가 '다산초당'의 산실이 된 셈이다. (주석 2)
 
다산초당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 다산초당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 박윤희

관련사진보기

 
이때부터 후반부 10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100년 뒤에 남은' 각종 책을 집필하는,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에게 도움을 준 윤단 등은 어머니 해남 윤씨의 집안이었다. 이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후반 10년을 비교적 안정된 처소에서 유배생활을 할 수 있었고, 문중에 전해온 각종 서책은 '다산학'의 각종 저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약용은 미련 없이 읍내를 떠나 아름다운 경치와 생활의 안정이 보장되는 윤씨들의 산정(山亭)이었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만여 그루의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다산초당의 만덕산 산자락, 일명 '차동산'이라 부르는 지명과 연유하여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이름하였다.

다산은 이곳에서 구강포(강진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벗 삼아 이곳에 대(臺)를 쌓고 연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 지어 심고 물을 끌어다가 폭포를 만들고 동쪽과 서쪽 암자를 수리하여 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저술활동에 매진하였으며, 동시에 제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주석 3)


 
 여행자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주는 만덕산 중턱의 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머물땐 초가집이었다.
 여행자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주는 만덕산 중턱의 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머물땐 초가집이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정약용은 주변의 풍광을 즐겨하여 「다산 8경」, 「다산에 피는 꽃을 읊다」에 이어 「다산 4경」등을 지었다.
   
   다산 4경

 1. 석가산(石假山)

 모래톱의 기이한 돌 모아 산봉우리 만들며
 본디의 지닌 모습대로 실어다 꾸몄다네
 험준한 산 묘하고 안정되어 세 탑 모양
 험준한 바위 틈에 소나무 하나 심었네
 빙 두른 기이한 모습 봉황새가 쭈그린 듯
 뾰족한 곳 얼룩 무늬는 죽순등걸 솟았네
 거기에다 샘물 끌어 연못으로 둘렀으니
 고요히 물 밑 바라보니 푸르름이 어룽어룽.

 2. 정석(丁石)

 대나무 집 서쪽머리에 바위로 된 층계
 연꽃성 꽃주인은 정씨(丁氏)에게 돌아왔네
 학 날자 그림자 떨어져 이끼 무늬 푸르고
 기러기 발자국 깊어 글자 자취 푸르르다
 미불(米芾)은 절할 때도 거만한 모습 드러내고
 도잠(陶潛)은 술취해도 꾸민 행위 벗어났네
 부열(傅說)의 바위와 우(禹) 임금의 굴 온전히 잡초에 묻혔거늘
 어찌해서 구구하게 또 글자를 새기랴.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으며, 많은 저술이 이뤄진 다산초당 가는 길엔 뿌리들이 잔득 드러난 일명 '뿌리의 길'이 있다. 애초 푹신한 땅에 싹을 틔워 자랐을 나무들이 생명의 원천인 뿌리가 드러나는 시련을 극복하며 우람하게 자라며 독특한 길을 이룬 것이다. 다산초당을 향해 가며 정약용의 삶과 같단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 뿌리의 길을 떠올리며 삶의 용기를 얻곤 한다.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으며, 많은 저술이 이뤄진 다산초당 가는 길엔 뿌리들이 잔득 드러난 일명 "뿌리의 길"이 있다. 애초 푹신한 땅에 싹을 틔워 자랐을 나무들이 생명의 원천인 뿌리가 드러나는 시련을 극복하며 우람하게 자라며 독특한 길을 이룬 것이다. 다산초당을 향해 가며 정약용의 삶과 같단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 뿌리의 길을 떠올리며 삶의 용기를 얻곤 한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3. 약샘(藥泉)

 옹달샘엔 진흙 없어 모래만 떠냈을 뿐
 바가지 하나에 물을 떠서 비춘 노을 마신다
 처음에는 돌 속에서 물구멍을 찾아내
 끝내는 산속 약 달이는 사람 되었네
 어린 버들 길을 가리고 잎새도 비껴 떠 있고
 작은 복숭아 이마 맞대고 거꾸로 꽃이 폈네
 가래 삭이고 고질병 나아 몸에도 맞겠으며
 나머지 일이야 푸른 샘물로 차달이기 알맞겠네.

 4. 차 부뚜막(茶籠)

 푸른 돌 평평 갈아 붉은 글자 새겼으니
 초당 앞에 차 달이는 작은 부뚜막
 아가미 모양 찻주전자 반쯤 벌려 불에 깊이 휩싸이고
 짐승 귀처럼 뚫린 두 구멍 가느다란 김이 난다
 솔방울 주워 새로 숯불 갈아 피우니
 매화꽃처럼 보글보글 뒤늦게 샘물을 붓네
 정기를 빼앗음이야 끝내는 농담이니
 단약의 화로 만들어 신선되기를 배우네. (주석 4)


주석
1> 금장태, 앞의 책, 183~184쪽.
2> 윤동환, 『삶 따라 자취 따라 다산 정약용』, 228쪽, 다산 기념사업회, 2004.
3> 앞의 책, 229~230쪽.
4> 『다산시정선(상)』, 583~58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비밀결사 자신회 조직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