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 11:47최종 업데이트 20.10.1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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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4세의 김교영 선생 그의 뒤에 있는 서가에 평생 모은 자료가 있다. ⓒ 민병래

 
1952년 1월 9일, 이른 아침부터 지리산 세석평전 아래 거림골에선 경남도당 긴급회의가 열렸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당과 사회단체는 소조로 나누어 산개하고 알아서 피신하고 알아서 살아 온다"는 간명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날 저녁, 경남도민청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나는 조장이 되어 지리산 천왕봉 동쪽에 있는 써리봉을 떠나야 했다. 내가 맡은 조에는 식사 담당을 했던 여성 동지들과 통신 일꾼, 이제 막 환자트(환자 아지트)에서 돌아와 겨우 걸을 수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이고 무장을 한 대원은 불과 세 명뿐이었다. 소조로 나뉜 모든 조들은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와 포위망 바깥의 인근 산을 목표로 출발했다. 도당에선 소조마다 비상미로 쌀 한 되와 생콩 한 되를 주고 비상선 1, 2, 3, 4 네 개를 알려주었다.


나는 써리봉을 출발하면서 산청과 하동 두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토벌군이 지펴놓은 장작불은 온 산을 에워쌀 듯 불타고 불길은 구불구불 동아줄처럼 이어졌다. 그 뒤로는 트럭과 지프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벌판 가득해 금세라도 지리산을 덮칠 것 같았다.

빨치산 토벌 2차 공세

52년 1월 10일로 예정된 국군의 '빨치산 토벌' 2차 공세는 규모가 대단했다. 동부전선에 있던 수도사단과 8사단 그리고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산하 5개 경찰연대와 국군 2개 예비연대가 동원되었다. 사천비행장의 제1전투 비행단도 출격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 외 의용경찰대나 사찰유격대를 합하면 무려 4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광양의 백운산까지 물 샐 틈 없이 에워쌌다. 51년 7월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이 열리면서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이승만 정부는 전방 병력을 동원해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조원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눈은 무릎까지 올라차 있고 바람은 웅웅거리며 울부짖어댔다. 갖고 있는 무기래야 아카보노 소총 세 자루에 탄약 몇십 알이 전부. 나는 무장정치공작대장, 척후대장을 해 본 터라 자신이 있었지만 주로 후방에 있던 조원들을 데리고 사선을 뚫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무엇보다 발들이 성치 않았다. 고무신을 전선 줄로 동여매었거나 짚신들을 신어 동상이 심한 대원이 여럿 있었다. 나는 궁리 끝에 뻗치기를 택하고 거림골에서 대성골로 넘어가는 음지를 향해 갔다.

음지는 눈이 한길이나 쌓여있어 수색하기 쉽지 않고 폭격이 주로 양지 쪽을 향했던 지난 작전을 되짚어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기울기가 얌전한 비탈에 눈을 치우고 나뭇가지와 낙엽으로 바닥을 다져 열다섯 명이 웅크리고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 위로 이불 홑청으로 쓰던 하얀 광목을 덮개로 펼쳤다. 눈과 같은 색깔이니 위장도 되고 바람막이도 됐다.

하루에 한 번 생콩 다섯 알과 쌀 서른 톨씩을 나눠줬다. 생콩은 배고픈 가운데 먹으니 비리지 않고 달았다. 51년 12월의 1차 공세에 비춰보면 2차 공세도 보름 정도가 될 듯해 아껴아껴 먹었다. 눈을 떠서 물 대신 먹었고 추위는 불을 피울 수 없으니 등을 기대고 앉아 서로의 체온으로 버티며 하루 종일 동상 환자들의 발을 주물렀다.

1월 10일 새벽부터 거림골과 피아골 등 모든 계곡과 능선에 압박이 시작되었다. 헬리콥터가 선무방송을 하며 투항하라는 전단지를 뿌리고 비행기에선 폭탄이 떨어졌다. 대성골 쪽에서는 쉴 틈 없이 총소리와 포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바심이 났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현상 선생님이나 도당 간부들은 안전할까? 이번 공세는 어찌어찌 넘기더라도 다음 공세는 어찌한단 말인가?" 유격대가 국군사단 1~2개를 묶어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전방의 병력이 동원되어 지리산을 둘러싸니 그저 독 안에 든 쥐였다. 지리산이 넓다 해도 사방 40km 안팎이라 주요 능선만 장악 당하면 대오는 각개격파될 수밖에 없었다.

공세를 버텨내더라도 언젠가 타결될 정전협정에서 빨치산의 존재가 어떻게 다뤄질지도 걱정이었다. 조선인민군의 낙오병으로 인정돼 안전한 귀환 길이 열릴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는 무장집단이 되어 끝내 죽음으로 내몰릴지 알 수 없었다.

1월 하순이 다 되어서야 2차 공세는 끝났다. 총성이 멈춘 것을 확인한 우리 조는 천막을 걷고 나왔다. 여성 동지들은 손뼉을 치고 서로 얼싸안았다. 나는 뒷일을 부조장에게 부탁하고 대성골로 마구 달려갔다.   

함양군 서상면 뒷산에서 체포되다

내가 덕유산에 가게 된 것은 53년 4월, 지리산에서 경남도당의 송광일 부대 정치부 조직부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김삼홍 도당위원장은 나에게 "덕유산부대가 와해 직전이다. 지리산에서 인원을 보충해줄 테니 박문학 동지와 함께 가서 덕유산 부대를 재건하라"고 임무를 줬다.

부대장에 박문학, 예하에 26명으로 이만춘 부대, 28명으로 강동희 부대, 본부요원 5명 총 60명으로 덕유산 부대를 새로 꾸렸다. 나는 정치위원을 맡았다. 예전엔 부대를 새로 편성할 때 결의도 다지고 훈장도 수여했지만 빛 바랜 진달래 몇 송이와 남덕유산에서 불어오는 안개비만 지켜보는 초라한 출범이었다.

53년 봄, 지리산·덕유산 일대의 빨치산 세력은 사실상 소멸 상태였다. 52년 1월 공세로 남부군 직속 81사단과 경남도당 57사단이 거의 궤멸했다. 당시 나는 조원들과 눈구덩이 음지에 숨어 목숨을 건졌지만 1월 18일에 주력군은 대성골에 포위되어 박격포와 네이팜탄의 집중폭격을 받았다. 결국 남경우 도당위원장을 비롯 수뇌부와 핵심 군사력이 전멸당하다시피 했다. 이후로 빨치산은 '조선인민군 유격대'라는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함경남도 영흥군이 고향이었던 나는 덕유산 부대 시절인 53년 7월 휴전협정 타결 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고향에 돌아가리라 기대했건만, 협정문에는 유격대의 지위나 안전귀환에 대해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다. 고약하게도 토벌대는 "빨치산은 버림받았다"는 문구를 큼지막하게 인쇄한 전단을 뿌리며 대원들을 자극했다. 다들 궁금해하고 의아해했지만 "중앙당이 뜻이 있겠지요"하고 얼버무렸다.

9월에는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동지가 피살되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그 후로 야밤에 도주하는 동지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때마다 '트(아지트)'를 옮겨야 했고 국군 5사단의 압박이 날로 심해져 보급투쟁은 목숨을 건 작전이 되었다. 미래가 없는 단순한 연명, 대원들 어깨에 내리는 덕유산 달빛은 파리했고 멀리 향적봉은 묵언수행만 할 뿐이었다.

53년 11월 29일 나는 중앙당 문서 전달 때문에 강동희 부대장과 지리산으로 향했다. 도당연락부장인 임정택에게 서류를 넘겨주고 야간 행군으로 피곤한 몸을 뉘었을 때 총소리와 포성이 울렸다. 12월 1일, 5사단 토벌대가 또다시 공세를 시작한 것이다. 총소리는 불과 몇백 미터 앞이었다.

"김 동지, 일어나요. 적정이 코앞입니다." 임정택 부장이 다급하게 나를 깨웠다. 나는 총과 배낭을 둘러메면서 옆에 누운 강동희를 일으켜세웠다. 20명 남짓 되는 연락부성원들은 문서를 챙기느라 바빴다. "촛대봉으로 간다"는 외침에 비탈을 뛰기 시작했다. 지리산의 겨울답게 나뭇잎은 이미 다 떨어져 몸을 감출 수가 없었다. 쉬식 총알이 귓불을 스치고 매서운 골바람이 목덜미를 파고 들었다. 뒤에서는 "계곡 쪽으로 밀어붙여"라는 고함 소리가 등덜미를 잡아채듯 다가왔다. 황급히 뛰면서도 담요를 말아 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강동희와 나는 어렵사리 5사단 포위망을 뚫고 덕유산으로 가는 길에 함양에 있는 그의 집에 들러 식량을 구해가기로 했다. 강동희의 고향마을 뒷산에 도착해 잠깐이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를 보내며 나는 어둠 속에 웅크렸다. 아차! 시간 약속과 비상선을 정하지 않았네, 내가 탄식했을 때는 이미 그의 뒷모습에 달무리가 가득했고 먼 동네의 개 짖는 소리가 이마저도 삼켜 버렸다.

강동희를 기다리는데 1월의 한기가 온 몸에 파고들었다. 어깨가 떨리고 잇몸이 딱딱 부딪혔다. 동상기가 있었던 오른 쪽 발가락들이 에렸다. 이미 돌아올 만한 시간도 한참 지난 터여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조각 달빛 하나 의지하고 남덕유산을 향해 움직였다. 

체포되던 54년 1월 9일은 함양군 서상면 그러니까 강동희의 집 유림면에서 약 40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덕유산 코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몇몇 무덤이 있고 그 옆에는 초막이 있었다. 들어가 보니 눈먼 부부가 묘지기를 겸해서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청해 밥 한그릇과 물김치를 얻어먹었다. 53년 12월 1일 이래 근 40일 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밥이었다. 모처럼 한술 밥을 먹었더니 오랫동안 못 잔 잠이 밀려왔다. 나는 묘지 근처에서 웅크려 햇빛을 쐬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야. 새끼야, 일어나! 이 놈 아주 코를 골고 자빠졌네" 고함소리에 나는 퍼뜩 잠이 깼다. 착검된 칼 등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파고 들었다. 팔뚝으로 햇살을 가리며 일어서는데 얼핏 보아도 국군수색대 대여섯 명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내 몸에 품었던 K2 소총은 이미 수색대 손에 들려 있었다. 잠든 사이에 수색대에 발견되고 만 것이다.

전선 줄로 포박당하며 뒤를 돌아보니 멀리 덕유산 향적봉은 고개를 돌리며 짐짓 모른 체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가 외려 무덤 위에 올라앉아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50년 9월 28일부터 시작된 3년 반에 걸친 빨치산 생활은 그날 그렇게 끝났다.
 

양심수 후원회 명예회장 권오헌 선생과 같이 했다. ⓒ 민병래

 
십년 넘게 단물 빨아간 형사들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앞 다방에서 만난 남부서형사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김교영이! 사회안전법으로 거주지 신고 안 하면 징역 사는 거 알지?"하며 협박을 했다. 나는 흠칫했다. 54년 1월 체포된 나는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으로 남원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10년형을 판결받고 전주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전향하라"며 끔찍한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형사들에게 '대농건설 토목부장' 명함을 건네며 그동안 강화도 공사장에서 숙식을 해서 몰랐다고 사정했다. 그들은 내 명함을 보고 적이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전주교도소 다음으로 산 수원형무소에서 목공을 배웠다. 61년 출소해서 수원 장안면에서 2년간 머슴을 살다가, 아내를 만나 63년 서울 옥수동 산꼭대기에 보증금 3000원 월세 300원하는 단칸방을 얻고 목수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65년 10월에 나간 공룡콘크리트 공업진흥주식회사에서 설계가 잘못된 것을 집어냈고 그 일로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기사로 채용될 수 있었다.

그 후로 서울시 주택 500동을 짓는 남가좌 현장, 소양감댐 이설도로 공사장에서 경력을 쌓았고 '사회안전법'이 발효된 무렵인 76년 10월에는 강화도 삼삼면의 양수발전소를 짓는 현장소장이 되었다. 78년 1월부로 대농건설 토목부장이 되었는데 바로 이 무렵에 누군가가 나를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신고를 했다. 그리고 남부서 형사들이 보름 동안 탐문 끝에 (지금은 재개발로 지번이 없어진) 금호동 3가 1448번지에 있던 우리 집을 알아낸 것이다.

명함을 받아 든 남부서형사들은 어떻게 대농건설에 들어갔으며 월급은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자술서에 쓰게 했다. 건장한 형사들 셋 앞에서 중년의 남자가 옹송거리고 있으니 다방 안의 호기심이 모두 나를 향했다.

나 김교영은 1927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머슴이던 김순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농민동맹이 있어 몇 년 동안 소작쟁의가 격렬했고 경찰지서를 습격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도 투쟁에 가담해 몇 번인가 구류를 살았다. 일본 경찰이 "이 마을은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항일 분위기와 좌익 성향이 강했다. 

영흥군 농민투쟁의 열기가 가라앉자 일본경찰은 농민운동 연루자와 지역청년들을 모아 1943년에 '방공단'과 '보국대'를 만들었다. 열일곱 살인 나도 강제로 가입이 되었는데 보국대에서는 조밥에 간장물을 먹으며 비행장건설과 농업용수로 건설에 동원되었다. 그러다 나는 카바이드를 교체하다가 얼굴에 화상을 입어 치료 중에 해방을 맞았다. 당시 열아홉살이던 나는 영흥군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했다. 46년 3월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에 당원번호 40832로 입당했고 빨간 당증을 받았다.

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영흥군 민청부위원장이었던 나는 8월 8일 중앙당으로부터 내일까지 평양으로 오라는 소환통지서를 받았다. 45년에 아버지가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기에 나는 난감했다. 집까지 다녀오기엔 민청업무 인계사항이 너무 많아 결국 나는 "조국통일전쟁에 나갑니다. 어머니..."하고 몇자 적어 다른 동지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내려와서는 하동군 민청위원장이 되어 섬진강에서 식량과 포탄을 날랐다. 9월 28일,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하자 후퇴를 지시받고 평양에서 내려올 때 입었던 반소매 차림으로 지리산에 입산했다. 그날로 빨치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거실에서 김교영 그의 거실은 마치 화원과 같다. ⓒ 민병래

 
이후 형사들은 사흘마다 호출해서 3일간의 생활을 진술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회사 업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삼남매는 중고등학생으로 한참 크고 있었고 출소장기수들이 내가 맡은 현장에 와서 일도 하고 때로는 자재납품도 하던 터라 대농건설 토목부장 자리는 소중했다. 당연히 회사에는 내가 빨치산 출신임이 알려져서는 안 됐다.

남부서 형사들에게 사정을 봐달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속내를 드러냈다. "대기업 부장으로 돈을 많이 버니, 월급의 2/3는 우리에게 주고 1/3로 생활해라. 그러면 회사에 알리지도 않고 사흘 단위로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기가 막혔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부서 형사들은 5년 동안 나를 그렇게 울궈먹더니 거주지 관할 성동경찰서로 넘겨버렸다. 단물이지만 오래되니 뒤탈을 염려한 눈치였다.

새로운 담당 성동서 형사도 마찬가지였다. 상고를 나온 딸이 취직할 때 내야 하는 소견서를 잘 써 줄 테니 거액을 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1984년 7월 30일에 퇴직할 때까지 그들에게 단물을 빨리면서 가족들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퇴직하곤 아직 아이들이 공부 중이라 86년 8월부터 길음 1동에서 대우여관을 임대해 숙박업을 했다. 나중에는 문화촌에 있는 세원여인숙까지 임대해서 두 군데를 운영했다.

다행히 87년 6월 항쟁으로 89년 3월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 장사는 편한 마음으로 했다. 그러나 여관 벌이가 신통치 않아 내 나이 칠십 두 살이 되던 해인 98년 7월 10일 대우여관과 여인숙을 접으면서 집에 들어앉았다.
 

김교영 선생이 평생 동안 모은 자료들. ⓒ 김교영

   
남은 여생은 지리산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2020년 이제 내 나이 94세, 마지막 바람은 그동안 내가 오랜 세월 모으고 작성한 자료와 메모가 '지리산'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에 쓰여지는 것이다.

수원교도소에서 출소한 후로 나는 지리산에서의 일을 정리했는데 대학 노트 몇 권이나 되는 분량이었다. 그런데 형사들이 찾아오자 불안해진 장모님이 장독대에 숨긴 것을 찾아내 모두 태워버렸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내 몸이 불태워진 듯했다.

대우 여관 일을 하면서 다시 마음을 추스렸다. 손님을 기다리다 보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는데 그 고요한 시간에 나는 다시 지리산을 기록해나갔다.

빗점골과 거림골에서 쫓겨가며 들이켰던 계곡물,
몇 날 며칠을 굶은 채 세석평전에 다다라서 만났던 상고대,
어느 비탈길에서 주검을 낙엽으로 덮으며 만난 천왕봉의 노을빛 .
 

긴 밤을 밝히며 쓰고 또 썼다.

1952년 1월 18일, 대성골에서 쓰러져간 동지들의 이름 하나 하나!
환자트를 가린 나뭇가지 옆에 무심히 핀 민들레, 동상 때문에 똑 똑 부러진 발가락들
그날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평양행 기차를 탔던 죄스러움
 

그렇게 매일 매일 써 내려갔다. 그러노라면 대우여관에는 어김없이 새벽이 찾아왔다.
  

장기수 어르신들과 함께 한 김교영 선생. 맨 오른쪽 중절모를 쓴이다. ⓒ 김교영

 
못다 한 이야기
① 이 글은 김교영 선생이 15년 전 통일광장(대표 권낙기)의 도움을 받아 자기 삶을 16시간에 걸쳐 구술하고 녹화를 한 내용을 토대로 쓰여졌다. 지금은 김교영 선생이 고령이어서 사실에 대한 재확인이나 보충문답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양심수후원회(대표 김혜순) 등 주변인들의 진술을 참고로 작성했다. 

이 글은 전부 A4 11매로 작성되었는데 지면 관계상 많이 축약되었다. 이 글의 전문은 10월 13일부터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에서 볼 수 있다. 
 
⓶ 김교영은 아홉 살 때 인흥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70명 정도가 한 학년이었고 전교생은 400명 가량 되었다. 선생은 6명인데 1~2학년은 한국인이 맡았고 3~6학년 담당 교사와 교장은 일본인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그는 영흥명륜사설학술강습회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정규학교가 아니었는데 학도병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선생이어서 은근히 민족사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농민동맹으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이 만든 야학에도 나가서 그들의 감옥살이 얘기를 들으면서 컸다고 회고했다.
 
⓷ 당시 영흥군의 소작쟁의는 치열하고 격렬했다. 32년 2월 9일에는 면사무소와 지서를 습격하고 3월 29일에는 경찰과 교전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주동자들은 함흥법원에서 징역선고를 받았고 장종철 같은 지도자는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다 해방이 되어서야 나왔다. 영흥군 여성들도 수수밭으로 피한 마을사람들에게 밤을 도와 음식을 나르고 함경선 철로를 기습할 때도 주저 없이 동참했다.
 
⓸ 1950년 9월28일 입산해서 54년 1월9일 잡히기까지 김교영이 지리산 등에서 맡았던 직책은 아래와 같다.
: 1950년 12월 경남도 민청선전부장(정치문화교양부장)
: 1951년 1월 황매산 블록책(지구당 책임자)로 임명
: 1951년 경남도당 남경우위원장으로부터 경남도당 직속선행대장(도당정치공작대)에 임명됨, 이후 민청선전부장으로 복귀.
: 52년 4월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 8지대(송광일부대) 정치부선전부장으로 복무.
: 53년 4월 중국해방인민군 출신 박문학부대 정치위원으로 발탁. 덕유산에서 활동. 실록 정순덕의 주인공,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도 이곳에서 함께 활동함
: 53년 9월1일 체제개편시에 북부지구당 선정부장
: 54년 1월 9일 함양군 서상면 뒷산에서 피체
: 54년 남원포로수용소에서 10년 언도받고 전주교도소로 이송 이후 수원형무소 이감.
: 1961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
 
⓹ 강동희는 집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신고로 마을 의용대에 자수 형식으로 피검되어 남원포로 수용소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⓺ 89년에 발간된 <실록 정순덕> 중권 232쪽 12줄에는 노영호부대 정치위원 이창권을 김교영으로 오인한 서술이 있다. "김교영이 체포되어 부는 바람에 많은 동지들이 잡혔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다고 정순덕은 회고하고 이를 <실록 정순덕> 하권에서 정오표를 붙이는 식으로 바로잡기로 했는데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정순덕은 김교영에게 자필로 "김 선생님 용서빕니다. 죄송합니다. 1992년 3월 8일 정순덕 드림"이라고 사과 편지를 썼다. 김교영이 지리산에 대한 자료와 기록에 오랜 세월 집착한 이유도 이 점이 계기가 되었다.
 
⓻ 남부서와 성동서 형사들의 실명은 김교영 선생이 정확하게 구술했다. 하지만 40여 년 넘게 지난 일이고 당사자 사실 확인 중이어서 여기선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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