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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의재.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당해 강진에 와 처음 머물던 곳이다.
 사의재.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당해 강진에 와 처음 머물던 곳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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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유배 중일 때 두 아들이 차례로 한 번씩 찾아왔다. 말을 타거나 걸어서 '아버지 찾아 600리'였다.

헤어지고 5년 만인 1805년 겨울에 큰 아들 학연이 찾아왔다. 술집의 골방시절 때이라 숙식이 마땅찮아 읍내 우이산 우두봉 기슭에 자리잡은 보은산방의 스님에게 신세를 졌다. 아들은 가정의 생활이 어려워 어린 당나귀를 타고 왔다. 이때의 정황을 아버지는 시로 남겼다. 제1연이다.

 손님이 와 대문을 두드리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내 아들이었네

 수염이 더부룩이 자랐는데
 이목을 보니 그래도 알 만하였네

 너를 그리워한 지 사 오년에
 꿈에 보면 언제나 아름다웠네

 장부가 갑자기 앞에서 절을 하니
 어색하고도 정이 가지 않아
 안부 형편은 감히 묻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시간을 끌었다네

 입은 옷이 황토 범벅인데
 허리뼈라도 다치지나 않았는지

 종을 불러 말 모양을 보았더니
 새끼당나귀에 갈기가 나 있었는데

 내가 성내 꾸짖을까봐서
 좋은 말이라 탈 만하다고 하네

 말은 안 해도 속이 얼마나 쓰리던지
 너무 언짢고 맥이 확 풀렸다네. (주석 8)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200년전 정약용 선생이 걸었던 길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200년전 정약용 선생이 걸었던 길이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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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내려온 아들과 함께 보은산방에서 부자는 『주역』을 공부하며 한겨울을 지낼 수 있었다.

"유학자로서 불가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내달라고 요청한 것에는 비굴한 것 그 이상의 아픔이 내제해 있다." (주석 9)

다시 세월이 흘러 8년 만인 1808년 4월 20일 이번에는 둘째 학유가 찾아왔다. 유배 당시 15세이던 아들이 어느새 수염이 덥수룩한 스물두 살 청년이 되었다.

 모습은 내아들이 분명한데
 수염이 나서 다른 사람과 같구나

 집소식 비록 가지고 왔으나
 오히려 믿지 못하겠네.
 
 다산 정약용이 아내가 보내온 치마를 잘라 만든 '하피첩'
 다산 정약용이 아내가 보내온 치마를 잘라 만든 "하피첩"
ⓒ 보물 168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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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 귀양살이한 지 몇 년이 지난 뒤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 여섯 폭을 인편으로 보냈다. 이를 잘 간수하고 있다가 1810년 가위로 잘라 하피첩(霞帔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을 쓰고, 나머지는 외동딸이 시집갈 때 「매조도(梅鳥圖)」를 그려 선물하였다. 「제하피첩(題霞帔帖)」이란 글이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몸져누워 있던 아내가 헌 치마 다섯 폭을 인편에 보내 주었다. 아마 그녀가 시집올 때에 입고 왔던 분홍색 치마였나 본데 붉은 색깔도 거의 바랬고 노란색도 역시 없어져 가는 것이었다. 단정하고 곱게 장정된 책으로 만들고자 가위로 재단하여 조그마한 첩을 만들고, 손이 가는 대로 경계해 주는 말을 지어서 두 아들에게 넘겨 주련다.

아마도 뒷날 이 글을 보고 감회가 일어날 것이고 아버지, 어머니의 좋은 은택(恩澤)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리워하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나리라. '노을처럼 붉은 치마로 만든 첩(霞帔帖)'이라고 붙인 이름은 '붉은치마(紅裙)'라고 하면 '기생'이라는 뜻이 있어 은근하게 돌려서 지은 것이다. (주석 10)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분홍색 치마를 남편에게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다산의 설명이 없으니 알 길이 없으나 우리의 입장으로 나름의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다산은 40세, 아내 홍씨는 41세의 나이로 생이별 했던 부부는 10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독수공방으로 지냈다. 아내로서는 어쩌면 남편이 자기를 잊고 딴생각이라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고 해서 무엇인가 자극을 주어 자신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장롱 속에서 꺼내 인편에 보냈을 것이다.

절대로 잊지 말라는 강한 요구이기도 하지만, 은근하게 사랑의 정을 표시하려는 뜻이기도 했으리라. 이런 아내의 의중을 읽었기에 남편은 두 사람의 사랑의 열매인 아들과 딸에게 경계의 글과 함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서 주었을 것이다. (주석 11)


실제로 남편은 한 때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이 부문은 뒤에서 다시 정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배 이후 폐족상태의 집안을 유지하며 세 자식을 홀로 키우는 아내를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1806년 「아내에게 부치다」에 잘 나타난다.

 아내에게 부치다

 하룻밤 지는 꽃은 1천 잎이고
 우는 비둘기와 어미 제비 지붕 맴돌고 있다
 외로운 나그네 돌아가란 말 없으니
 어느 때나 침방에 들어 꽃다운 잔치를 여나
 생각을 말아야지
 생각을 말아야지 하면서도 애처롭게 꿈속에서나 얼굴 보고지고. (주석 12)


주석
8> 김상홍, 『아버지 다산』, 143~145쪽, 글 항아리, 2010.
9> 앞의 책, 150쪽.
10> 박석무, 앞의 책, 477~478쪽.
11> 앞의 책, 479쪽.
12> 『다산시정선(하)』, 53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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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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