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6 08:06최종 업데이트 20.10.16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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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 진실화해위원회 자료사진

 
10·16이 있어 10·26도 있었다. 10·16이 있었기에 10·26이 유신체제의 마침표가 될 수 있었다. 김재규가 총을 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정보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날 밤 그의 옷 속에 권총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한국인들은 평화적 권력이양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며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같은 사람들이 그를 고무시켰기 때문만도 아니다.

근원적인 요인은 김재규가 1979년 10월 16일 이후의 부마민주항쟁(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일으킨 민주화운동, 아래 부마항쟁)에서 민중의 에너지를 확인한 데서 찾을 수 있다. 10·16이 그의 가슴을 자극했던 것이다. 박정희를 죽이고 투옥된 뒤인 1980년 1월 28일 작성한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김재규는 이렇게 술회했다.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마산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부마항쟁을 목격한 김재규는 10·16의 전도사가 되어 박정희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그는 현실을 직시할 것을 박정희에게 촉구했다. 위 보충서는 이렇게 말한다.
 
본인이 부산사태 직후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박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김계원 실장과 차지철 실장과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 사태는 체제 반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항에 조세 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귀는 막혀 있었다. 박정희는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쳐 있었다. 이것은 김재규가 유신체제에 대한 기대감을 거두고 몸 안에 총을 감추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박정희의 반응에 관해 보충서는 이렇게 말한다.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가 데모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 왕국 기둥에 도끼를

부마항쟁은 경남 거제에서 출생하고 부산에서 여섯 번 당선된 1979년 당시의 김영삼 의원(총 7선)을 상대로 박 정권이 신민당 총재직과 의원직을 박탈한 일로 인해 촉발된 측면이 컸다. 박 정권의 김영삼 박해가 경남·부산 민심을 자극하고 이로 인해 박 정권의 부조리가 부각되면서 민중항쟁이 폭발했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이는 국회를 무력화시키며 1인 영구집권을 도모하는 1972년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한국 민중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 왕국'을 유지하고자 헌법이 아닌 긴급조치로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부마항쟁은 긴급조치라는 사상누각에 세워진 박정희 왕국을 허물고자 그 누각의 기둥에 도끼를 들이대는 사건이었다.

2018년에 <한국과 국제사회> 제2권 제1호에 실린 정주신 한국정치사회연구소장의 논문 '10월 부마항쟁의 진실과 역사적 성찰'은 "부마항쟁은 대학생을 비롯해서 소시민, 영세상인, 도시빈민, 접객업 종업원, 자영업자, 노동자, 재수생, 고등학생 등 하층 도시민과 학생들의 주 참여 계층이 가세한 민중항쟁이었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부마항쟁이 즉자적인 반유신 민중봉기가 아니라 야당의 선동으로 발생한 '불순분자들'의 행동이나 '식당 보이'나 '똘마니' 그리고 '깡패' 등에 의한 단순한 소요로 본 행태는 통치자로서의 애민의 입장이기보다는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민중을 천민으로 본 발상이었다"고 말한다.

박 정권이 '불순분자, 식당 보이, 똘마니, 깡패'들로 비하한 서민 계층이 궐기했다는 것은, 2016년 연말 이래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는 이스라엘기까지 흔들며 이승만·박정희·박근혜를 연호하는 극우세력에게 '당신들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박정희 시대의 서민 상당수는 데모는 위험한 일이며 가방끈 긴 빨갱이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했다. 그랬던 그들이 데모대에 음료수나 맥주를 날라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시위에 참여했다. 극우세력의 주장처럼 박정희 시대가 살기 좋은 시대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부마항쟁은 박정희 시대를 살아본 서민대중이 박 정권에게 매기는 성적표와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 체제가 인간을 못살게 구는 악의 체제였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불순분자, 식당 보이, 똘마니, 깡패' 등이 1960년 4·19 혁명으로부터 19년 만에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했다는 것은 박 정권 18년 동안에 정치체제 못지않게 경제체제의 모순도 심화됐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저항에 나선 것은 박정희 체제가 정치적 자유나 민주주의뿐 아니라 경제적 분배에서마저 이들을 박대했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민란
 

부마항쟁 ⓒ 진실위 자료사진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같은 노동자 착취에 기초했다. 휴일이 한 달에 두 번만 있어도 감지덕지해 하면서 선반 기계 옆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쪽잠을 자며 철야로 노동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노예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국가와 경찰이 재벌과 대기업을 비호하는 속에 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그 시대의 노동에는 노예노동의 측면도 없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고도성장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기업가나 국가뿐 아니라 노동자도 적정한 분배를 받아야 한다. 노동력이 사실상 공짜로 착취되는 구조에서는 고도성장이 쉽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를 인간답게 대우하는 가운데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면 박정희 경제정책은 당연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는 가운데서 이룩한 것이므로, 그것은 재벌 및 대기업 혹은 국가의 고도성장이지 대한민국 전체의 고도성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부마항쟁은 박 정권의 고도성장이 알맹이 없는 허위에 불과했음을 폭로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갖는다.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과 교수가 금년에 <사회경제평론> 제62호에 기고한 '박정희 공업화 발전모델의 위기와 부마항쟁'에 이런 대목이 있다.
 
국가 주도 공업화 과정에 동원된 민중 블록은 성장의 과실 분배 과정에서는 배제되거나 희생되었다. 이는 만성 인플레이션 하에서의 물가 급등, 노동 착취 강화와 노동운동 탄압, 민중의 조세 부담 가중, 도시 하층민의 증가와 방치, 불로소득의 집중과 빈부격차 확대 등으로 나타났다.

민중 블록은 이러한 모순이 누적될수록 불만도 커져갔지만, '잘살아 보세'와 '선 선장, 후 분배'라는 성장 이데올로기 약속의 실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1976~1977년의 대호황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은 지켜지기는커녕 방위세와 부가가치세로 조세 부담만 급증하고, 1979년 4월의 경제안정화 조치로 불황의 부담이 전가되자 민중들의 불만은 분노로 바뀌었다.
 
열심히 노동하는 대다수가 고도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정권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는 소수만 혜택을 누리는 모순 구조는 '불순분자, 식당 보이, 똘마니, 깡패' 등이 저항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민중의 경제적 불만이 중요한 원인이 됐다는 점에서 부마항쟁은 고전적인 민란의 성격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우연적이기는 하지만 부마항쟁의 발생 시점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을 1969년 10월 17일에 통과시키고 유신체제를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했다. 10월 17일은 박정희 왕국의 초석을 다진 날이었다. 부마항쟁은 10월 16일 시작해서 10월 17일에도 거세게 번져나갔다. 박정희 왕국의 생일에 초를 뿌리는 항쟁이었던 것이다.

부마항쟁의 직접적 결과로 박 정권이 무너진 것은 아니므로 10·16이 박 정권의 마침표가 됐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10·26이 단독으로 마침표가 됐다고도 보기 힘들다. 10·16이 정권을 흔들어대지 않았다면 10·26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10.16과 10·26의 복합 작용에 의해 박 정권이 몰락했다고 보는 게 균형 잡힌 시각일 것이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에서 발생한 사건이므로 부마항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평가를 받아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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