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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드러난 뼛 더미. 불과 3.8제곱미터에 몰려 있었고 ,헝크러진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마치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무너져 내린 듯 어지럽게 널려 있다.
 20일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드러난 뼛 더미. 불과 3.8제곱미터에 몰려 있었고 ,헝크러진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마치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무너져 내린 듯 어지럽게 널려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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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드러난 뼛 더미. 불과 3.8제곱미터에 몰려 있었고 ,헝크러진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마치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무너져 내린 듯 어지럽게 널려 있다.
 20일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드러난 뼛 더미. 불과 3.8제곱미터에 몰려 있었고 ,헝크러진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마치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무너져 내린 듯 어지럽게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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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이뤄진 대전 골령골에서 피해자들의 유해가 장작더미처럼 쌓인 채로 발견됐다. 공동조사단은 "묻지 않고 던져 그대로 쌓아놓은 것 같다"고 추정했다.

지난달 22일부터 40일간의 일정으로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은 20일 대전 골령골 제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해는 불과 8.6㎡ 너비에 몰려 있었고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마치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무너져 내린 듯 널려 있는 모습이었다. 박선주 유해발굴단장도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는 "흙을 덮지 않고 시체를 던져서 그대로 쌓아 놓은 것 같다"고 밝혔다.

실제 당시 북한 유격대 신분으로 학살 현장을 방문한 목격자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학살 직후)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골령골 현장을 방문했는데 시체가 온통 시커멓게 그을린 데다 퉁퉁 부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한동안 시체를 땅속에 묻었지만, 이후에는 묻을 여유조차 없어 학살 후 시체더미에 휘발유를 끼얹어 불태웠다는 것이다.

10대 추정 치아도 발견
 
20일 드러난 뼛 더미 인근에서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이 발굴됐다. 골령골의 경우 놓은 산성도와 습기로 대부분의 유해가 삭아 없어진 상태다.
 20일 드러난 뼛 더미 인근에서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이 발굴됐다. 골령골의 경우 놓은 산성도와 습기로 대부분의 유해가 삭아 없어진 상태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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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로 추정하는 희생자 치아도 3구가 발굴됐다. 박 단장은 "치아 상태로 볼 때 10대로 추정된다"며 "모두 세 사람의 것"이라고  밝혔다. 10대 희생자의 유해가 확인 된 것은 지난 12일에 이어 두 번째다.

드러난 유해 아래쪽에도 뼈가 쌓여 있는 것으로 보여 좁은 공간에 몇 명의 유해가  더 있을지 아직 짐작을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수습된 유해는 40여 구로 이날 드러난 유해까지 포함할 경우 발굴 유해는 80여 구에 이른다.

이번 유해발굴은 골령골 평화역사공원 조성을 위해 예정 터 내에서 유해를 수습하고자 시작됐다. 행정안전부는 골령골에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을 조성하기로 하고, 현재 설계 국제 공모를 진행 중이다.

골령골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희생자 규모는 최소 4000여 명에서 최대 7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가해자들은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었고, 그들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가 자행됐다.

태그:#골령골,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대전 동구청, #뼛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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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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