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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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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6월 16일 회갑을 맞았다.

귀향한 지 3년, 고향에 정착하여 빈곤한 살림살이와 노년의 병마로 신음하면서도, 그동안 독서와 저술로 쉴새없이 글을 썼다. 이가환ㆍ이기양ㆍ권철신ㆍ오석충과 둘째형 정약전의 묘지명을 지었다. 또 둘째 며느리의 묘지명을 쓰고 윤지범ㆍ윤지눌ㆍ이유수ㆍ윤서유 등 먼저 간 벗들을 그리면서 묘지명을 지었다.

회갑 날에는 모처럼 친지와 원근에서 벗들과 강진에서 제자들이 찾아왔다. 누구보다 반가운 손님들이었다. 다산초당에 남겨두고 온 사연들을 물었다. 못 속의 잉어 두 마리는 잘 자랐는지, 선춘화(동백)는 피었는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회갑을 맞아 그동안 준비해온 자신의 묘지명을 썼다. 옛적부터 선비ㆍ학자들이 자기 묘지명을 지은 바 적지 않지만, 정약용처럼 방대한 묘지명을 쓴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의 묘지명은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의 자서전이었다. 

역사상 루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서전(참회록) 등을 제외하고, 명사들의 회고록(자서전)이 'PR판' 즉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만 알린다"는 세평이 따르지만,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은 정직한 기록과 품격 있는 서술로 알려진다. 
  
다산 정약용의 묘소 남양주시 조안면 '여유당' 뒤편 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대개 묘지명은 가까운 친지가 쓰는 법인데, 다산은 스스로 묘지명을 썼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잘 모르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 다산 정약용의 묘소 남양주시 조안면 "여유당" 뒤편 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대개 묘지명은 가까운 친지가 쓰는 법인데, 다산은 스스로 묘지명을 썼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잘 모르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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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굳이 회갑에 묘지명을 썼을까.

이후 14년을 더 살았지만, 당시 빈곤과 건강상태가 언제 눈을 감을 지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세도정치가 언제 끝날지도 막막하여 더 이상 출사할 기회도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을 터이다.

「자찬묘지명」은 두 가지를 지었다.

「광중본(壙中本)」은 무덤 속에 넣을 것이고, 「집중본(集中本)」은 자신의 문집이 간행되면 수록할 것으로 작성하였다. 앞에 것은 요약본이고 뒤엣 것은 분량이 많았다. 「집중본」의 첫 장은 이렇게 막을 연다.

이 무덤은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이요, 자(字)는 미용(美庸), 또 다른 자는 송보(頌甫)라고도 했으며,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 (주석 9)

   
 정약용이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 정조와 그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정약용이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 정조와 그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이다. 다산 유적지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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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60년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살아온 일을 상세히 적었다. 주요 저술을 짓게된 배경과 내용을 요약하고, 정조의 은총과 궐내의 은밀한 비사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는 데만 뜻이 아니라 "한평생을 다시 돌려 내가 금년부터 정밀하게 몸을 닦아 실천한다면…."라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데도 의미를 두었다. 

나는 건륭(乾隆) 임오년(1762)에 태어나 지금 도광(道光)의 임오(1822)를 만났으니 갑자(甲子)가 한 바퀴 돈 60년의 돌이다. 뭐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햇수다. 수습하여 결론을 맺고 한평생을 다시 돌려 내가 금년부터 정밀하게 몸을 닦아 실천한다면 명명(明命)을 살펴서 나머지 인생을 끝마칠 거다. 그리고는 집 뒤란의 자(子)의 방향 쪽에다 널 들어갈 구덩이의 모형을 그어놓고 나의 평생의 언행(言行)을 대략 기록하여 무덤 속에 넣을 묘지(墓誌)로 삼겠다. (주석 10)

「자찬묘지명」은 별도의 '보유(補遺)'를 통해 미처 기록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한다. "명(銘)에 이르기를"에서 이 같은 의도를 살필 수 있다.

 네가 너희 착함을 기록했음이 
 여러 장이 되는구료
 너의 감추어진 사실을 기록했기에
 더 이상의 죄악은 없겠도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四書)ㆍ육경(六經)을 안다"라고 했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널리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
 찬양이야 할 게 없다
 몸소 행하여 증명시켜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분운(紛紜)함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창광(猖狂)을 거두어들여서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慶事)가 있으리라. (주석 11)


주석
9> 『다산 산문선』, 11쪽.
10> 앞의 책, 62쪽.
11> 앞의 책, 62~6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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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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