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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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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철학과 사상은 봉건군주 시대에 성장한 특수 산물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반상질서가 강고한 사회구조였다. 그 역시 양반 출신이었고, 집에는 노비(종)가 있었다. 각별한 군왕의 총애를 받았고, 몰락 뒤 세도정치가 국정을 농단했으나 허수아비일망정 권력의 정점에는 임금이 존재하였다.

그런 시기에 쓴 「탕론(湯論)」은 그가 봉건지배체제를 뛰어넘는 근대의 혁명적 사상가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다수의 연구가들은 그의 천재성과 개혁성을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전근대인의 범주에 가두려 한다. 그는 전근대를 뛰어넘은 근대인인가, 아닌가, 묻게 된다.
  
‘수령은 백성을 위해서 있다’는 다산 정약용의 사상. 백성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 문구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수령은 백성을 위해서 있다’는 다산 정약용의 사상. 백성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 문구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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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적인 개혁적 사론이라 할 『탕론』은 1797년(정조21) 36세 때 2년여 동안의 황해도 곡산부사를 마친 뒤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재야 시절이 아닌 재조시절의 작품이다. 1799년 5월 형조참의에 제수되었기 때문이다. 

곡산부사 시절 부당한 조세에 항의하여 백성 1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몰려와 집단시위를 벌인 주동자에게 "한 고을에 너와 같은 자가 있어서 형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 원통함을 펼 수 있어야 한다"고 풀어주었던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목민관 정약용의 관용정신을 뛰어넘어 '민본(民本)' 사상의 근원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민본은 전통적인 유교 통치철학의 곰팡이 핀 용어가 아니라 근대적인 '민(民)'의 가치를 의미한다.

그는 「원목(原牧)」이나 『목민심서』 등에서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인가?",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은 토지를 밭으로 여기는데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밭으로 삼으니, 살갗을 벗기고 골수를 두들기는 것을 밭갈이로 삼으며 머릿수를 세어 거두어들이는 것을 가을걷이로 삼는다"라고 논급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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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론」은 이같은 언설보다 훨씬 앞선다. 군주체제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탕(湯)이 걸(桀)을 쫓아낸 것은 옳은 일인가? 신하로서 임금을 쳤는데도 옳은 일인가? 이것은 옛 도를 답습하는 것이요 탕 임금이 처음으로 열어 놓은 일은 아니다." 

「탕론」의 첫 대목은 이렇듯 '반역'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탕은 중국 하나라 걸왕이 폭정을 일삼자 축출하고 자신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상(商) 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이후 동양에서도 폭군방벌사상이 전해지고 실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임금과 신하들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다산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임금과 신하들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다산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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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다시 묻는다.

"대저 천자(天子)의 지위는 어떻게 해서 소유한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져 천자가 된 것인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나 천자가 된 것인가?"

대단히 불손하고 그야말로 사문난적에 이르는 발상이다. 맹자가 주창한 폭군방벌사상은 조선시대에 금압의 대상이었다. 서양에서는 중세기 절대주의 국가에서 신민의 저항이 높아가는 단계에서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이 제기되었다. 왕이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고 왕권에는 제한이 없으며 모든 신민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조선을 포함 동양의 임금(황제)들도 다르지 않았다. 

정약용은 이어서 왕이나 천자가 생겨난 근원을 밝힌다.

근원을 더듬어 보면 이러하다. 5가(家)가 1린(隣)이고 5가에서 우두머리로 추대한 사람이 인장(隣長)이 된다. 5린이 1리(里)이고 5린에서 우두머리로 추대된 사람이 이장(里長)이 된다. 5비(鄙)가 1현(縣)이고 5비에서 우두머리로 추대된 사람이 현장(縣長)이 된다. 또 여러 현장들이 다 같이 추대한 사람이 제후(諸侯)가 되는 것이요, 제후들이 다 같이 추대한 사람이 천자가 되는 것이고 보면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주석 1)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에 있는 정약용 선생 상
▲ 정약용 선생 상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에 있는 정약용 선생 상
ⓒ 위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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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대된 인물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추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대저 여러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은 또한 여러 사람이 추대하지 않으면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5가(家)가 화협하지 못하게 되면 5가가 의논하여 인장을 개정할 수가 있고, 5린이 화협하지 못하면 25가가 의논하여 이장을 개정할 수가 있고, 구후(九侯)와 팔백(八伯)이 화협하지 못하면 구후와 팔백이 의논하여 천자(天子)를 개정할 수 있다. 구후와 팔백이 천자를 개정하는 것은 5가가 인장을 개정하고 25가가 이장을 개정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누가 신하가 임금을 쳤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석 2)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한 송풍암
▲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한 송풍암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한 송풍암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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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민주권설을 제시한다. 민(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므로 아래로부터 다스리는 자들을 차례로 선택해야 한다는, 현대의 선거제도의 발상이다.

한(漢)나라 이후로는 천자가 제후를 세웠고 제후가 현장을 세웠고 현장이 이장을 세웠고 이장이 인장을 세웠기 때문에 감히 공손하지 않은 짓을 하면 '역(逆)'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른바 역이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하였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한 것은 순(順)이고, 지금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세웠으니 아랫사람을 세운 것은 역이다. 

그러므로 왕망(王莽)ㆍ조조(曹操)ㆍ사마의(司馬懿)ㆍ유유(劉裕)ㆍ소연(蕭衍) 등은 역이고, 무왕(武王)ㆍ탕왕(湯王)ㆍ황제(黃帝) 등은 현명한 왕이요 성스러운 황제(皇帝)이다. (주석 3)


그의 고난에 찬 생애는 이같은 '혁명성'에서 발원한다고 하겠다. 


주석
1> 김지용, 『다산의시문(하)』, 「탕론」, 900쪽, 명문당, 2002.
2> 앞의 책, 901쪽.
3> 앞의 책, 901~90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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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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