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다산 정약용 초상화.
 다산 정약용 초상화.
ⓒ 이재형

관련사진보기

 
정약용이 살던 시대 동아시아는 중국의 한자문명권이었다. 한자가 문화와 문명의 매체역할을 하였다. 세종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3년 뒤 이를 반포했으나 여전히 공용문자로는 한문이 사용되고, 훈민정음을 지배층에서는 언문(諺文)이라 일컬으면서 아이들과 부녀자들의 글로 치부되었다. 

연산군 때는 왕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 사건이 일어나자 언문 사용과 학습을 일체 금지하고 언문 서적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호학군주 정조는 '문체반정'의 구실 아래 이른바 패관소설류를 규제하고 정약용도 이에 적극 동조한 바 있다. 

정약용은 그 많은 글(책)을 모두 한자로 지었다. 유배 시절에 자식들에게 쓴 편지에서 "시대를 상심하고 시속을 안타까워하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다. 찬미하고 권면하고 징계하는 뜻이 없다면 시가 아니다"라고 '시대정신'을 일깨우면서도 모든 글을 한자로 썼다. 

정약용보다 193년 전에 태어난 허균(許筠, 1569~1618)과, 125년 전에 출생한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당대의 유가의 명문거족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다. 두 사람 역시 대단한 개혁성향이어서 사대부가 누리는 영욕이 엇갈리는 삶을 살았다.

허균은 "이조 굴지의 시인 문장가이었고 천주교를 최초로 도입한 자이고, 소설 『홍길동전』즉 한글소설의 최초의 작가이고 소위 실학파로서는 유형원보다 반세기가 먼저요, 그는 유자인 동시에 불가이고 참의설의 도창으로 도가 내지 풍수학자이고 또한 철저한 본능지상주의자이다." (주석 10)


김만중은 광산김씨의 거족 출신으로 예학의 대가 김장생의 종손이다. 16세 때에 진사시에 일등 합격한 뒤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 당쟁에 휘말려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을 쓰는 사람은 자기나라의 말을 두고 남의나라 말을 쓰는 데 급급하니, 이는 곧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것과 같다"면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글로 지었다. 

김만중은 "당시 문화적인 모든 현상이 중국문화권에 꽁꽁 묶여있을 당시, 한국인은 한국어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뛰어난 국민문학론을 제창하였을 뿐 아니라, 시문에 있어서나 소설에 있어서도 이들에 대한 일가견을 갖고 폭넓은 범동양적인 지식의 경험을 통하여 문학창작에 임한 위대한 작가라는 것이다." (주석 11)


두 사람을 소환하는 데는 한글로 작품을 썼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에 비해 개혁성이나 진보성향에서 못지 않았던 정약용은 왜 한 편의 글도 한글로 짓기 않았을까. 

다산(茶山)의 문학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의 하나는 그의 시가 강한 민족주체의식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민족 또는 국가란 개념은 중국과의 관련하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중국의 문자인 한자로 시를 쓰면서 민족주체의식을 담는다는 일이 언뜻 모순되는 말인 것 같지만 다산은 그 나름대로 중화주의의 절대적 권위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그의 '조선시 선언'으로 응축된다. (주석 12)


정약용은 "나는 본래 조선 사람 / 조선시 즐겨쓰리"라고 선언한다. 「노인의 일대 쾌사」에서 문학적 주체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1ㆍ2연을 소개한다. 

1> 노인의 즐거운 일 하나는
    붓 가는 대로 마음대로 시 쓰는 것
   
   어려운 운자에 신경 안 쓰고 
   퇴고하느라 더디지 않고

   흥이나면 뜻을 싣고   뜻이 이르면 바로 시를 쓰네.

2>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즐거이 조선시를 쓰노라

    그대는 그대의 법을 쓰면 되지
    시작법에 어긋난다 떠드는 자 누구뇨

    중국시의 구구한 격률을
    먼 곳의 우리가 어이 안단 말인가. (주석 13)


그가 이 같은 시를 한자로 쓴 것은 아쉽지만, "당시 조선 후기 문단이 문학 사대주의에 빠진 것을  비판하고, 자신은 조선인으로서 조선시를 쓴다고 선언한 것" (주석 14) 에서 그나마 의미를 찾게 된다.
  

주석
10> 김동욱, 「이씨조선의 이방인 허균」, 『사상계』, 제68호, 181~182쪽, 1959.
11> 『김만중 연구』, 정규복「해설」, 4쪽, 새문사, 1983. 
12> 송재소, 『다산시연구』, 33쪽, 창작사, 1986.
13> 김상홍, 앞의 책, 323쪽.
14> 앞의 책, 32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