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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2018년 어느 날이었다.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켜고, 이런저런 소식들을 확인하는데, 유독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벽돌 책이라 불릴 만큼 두툼한 두께에, 거울 앞 민소매 차림의 여성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어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때 받은 느낌 때문인지, 이슬아를 좀 더 알고 싶어 이리저리 검색해 본 결과, 한 달 구독료 만 원을 지불하면, 작가가 쓴 글을 날마다 전자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내 입장에선 굉장히 신선하고 파격적인 행보여서 92년생은 이렇게 젊고 유연하구나, 감탄했다.
 
이슬아라는 이름을 알게 해 준 그녀의 첫 책. 거울 앞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표지가 인상적이다.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라는 이름을 알게 해 준 그녀의 첫 책. 거울 앞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표지가 인상적이다.
ⓒ 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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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구독 서비스는 아쉽게도 휴재 상태. '꿩 대신 닭이라도'라는 심정으로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구매했다. 처음 읽은 이슬아의 글은 뭐랄까. 분명 신선하고 파격적이었으나 기존 산문 스타일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나는, 그녀의 문장이 너무 날 음식처럼, 마음대로 자라난 풀처럼 느껴져 조금 버거웠다.
 
이슬아를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된 <깨끗한 존경> 
내용은 물론 책 제목과 표지까지 많은 울림을 줬다.
▲ 이슬아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 이슬아를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된 <깨끗한 존경> 내용은 물론 책 제목과 표지까지 많은 울림을 줬다.
ⓒ 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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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한동안 이슬아의 존재를 잊고 지내다, <깨끗한 존경>이라는 그녀의 인터뷰집을 접하며 이슬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슬아가 다양한 직업, 다양한 위치에 자리한 한 명 한 명과 대화하고 느낀 걸 풀어낸 솜씨가 탁월했다.

정혜윤의 인터뷰에서는 소외된 사람들을 잊지 않을 것을 다짐했고, 김한민 편에선 채식에 관한 나의 편견을 정정할 수 있었으며, 김원영을 보며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기준을, 유진목에게선 그녀의 출간 리스트를 모조리 읽어 보고 싶어졌다.

알토란 같은 대화들을 잘 엮어 하나의 깨끗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그녀, 이슬아가 점점 더 좋아져 버렸다.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거 같다는 예감마저 들었다.
 
이제는 명실공히 국민작가의 대열에 합류한 이슬아. 그녀의 새 책 <부지런한 사랑>이다
▲ 이슬아 신간 부지런한 사랑 이제는 명실공히 국민작가의 대열에 합류한 이슬아. 그녀의 새 책 <부지런한 사랑>이다
ⓒ 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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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그녀의 신간 <부지런한 사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동네 책방에 기별을 넣었다.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이슬아 글방'이란 표지 타이틀과 벌거숭이 산에 밑둥만 남은 한 그루의 나무가 이제 갓 잘린 듯 보이는 나무를 부둥켜안고 있는 표지 그림을 보며 마음 한켠에서 찌르르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위로' '공감' '사랑' 같은 단어들도 함께 떠올랐다. 천천히, 책 장을 넘겨갔다.

​책엔 이슬아가 글쓰기 교사로 몸담으며 글방 아이들(때론 청소년과 성인들)과 함께 써 내려간 시간들이 그녀만의 독특한 문체로 담겨있었다.

어느 한 곳 와닿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명문대 재학생도 아닌, 심지어 문예 창작 전공자도 아닌, 평범한 스물셋의 아가씨'가 글쓰기 교사를 자처하며 방을 붙이는 일부터 처음엔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글방을 찾은 아이들이 끝내 스스로의 이야기를 꾹꾹 눌러 쓰게 된 일, 그리고 사랑 이야기만 주구장창 써대던 그녀의 10대 시절 일 등등. 마지막 한 페이지까지 흡족했다. 덕분에 이슬아를 더욱 사랑하게 될 거 같다는 예감도 실제가 되었고.

 
"옛날에 엄마랑 아빠는 63빌딩에서 커피를 마셨다. 엄마가 전해준 말이다. 둘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 엄마가 아빠에게 "너 시간 있니?"라고 물었다. 아빠는 "응"이라고 대답했다. 엄마가 물었다. "나랑 결혼할래?" 그러자 아빠의 영혼이 찬물에 적셔진 것처럼 놀랐다.
-부지런한 사랑, 여수글방 조이한의 글
  
언젠가 이슬아와 함께 글쓰기 수업에 다녔던 친구가 '어느새 너는 숙련된 세탁소 사장님처럼 글을 쓴다고. 혹은 사부작사부작 장사하는 국숫집 사장님처럼 글을 쓴다고' 했다는데 이 문장엔 나도 밑줄을 그으며 동의했다. 그게 어떤 의미일지 마음으로 느껴졌달까.

이슬아 역시 이 말이 '재능이 있다는 말보다 더 황홀한 칭찬이라고 했다. 무던한 반복으로 글쓰기의 세계를 일구는 동안에는 코앞에 닥친 이야기를 날마다 다루느라 재능 같은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고. 이 문장 역시 나에게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해 주었다.

​할 수 있다면, 나도 이슬아의 글방에 다녀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이슬아가 10대 시절을 보냈다는 글방에, 이슬아의 글쓰기 스승, 어딘이 있는 글방의 문도 힘껏 두드려 보고 싶었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거냐고, 매일 매 순간 좌절하고 후회하면서도 또 쓰겠다고 키보드 앞에 앉고 마는 내게 한 수 가르침을 주십사 간청하고 싶었다.
"너는 커서 네가 될 거야. 아마도 최대한의 너일 거야." 로맹 가리도 결국 로맹 가리가 되었다. 반복적인 글쓰기와 함께 완성된 최고의 그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그저 다음주의 글감을 알려주며 수업을 마친다. 얼마나 평범하거나 비범하든 간에 결국 계속 쓰는 아이만이 작가가 될 테니까. - 부지런한 사랑, 25쪽
 
이 문장이 이미 다 자란 나에게도 해당 되는 말인지, 궁금했다.
'응미 선생님과 응숙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녹슨 몸을 실감하지 않고도 배워볼 수 있는 게 글쓰기인 것 같다고. 마음을 잘 정돈해 보고 싶어서 이 글쓰기 수업에 왔다고.' - 부지런한 사랑, 222쪽 
 
이에 대한 궁금증은 '어른 여자 글방' 편에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결국, '녹슨 몸과 상관없이 쓰는 대로 배워볼 수 있는 것이 글쓰기'라고 정의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최대한의 나' 로 나이 들어 가야지.

​이슬아의 글은 깨끗하고 개운하다. 조미료 맛 팍팍 나는 음식 같지 않고, 엄마가 휘뚜루마뚜루 해줬지만,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 같다. 재료 본연의 맛을 아주 잘 살린, 음식. 그래서 느끼하지 않고, 다 읽고 나도 계속 여운이 맴돈다. 언제 어느 때 다시 읽어도 어색하지 않고 깔끔하다.

그녀의 글이 담고 있는 세계가 좋다. 사랑, 자유, 인권, 성, 채식, 환경, 문학, 글쓰기, 건강, 가족, 동물 등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야기하는 건강한 시선이 좋다. 한 작가의 지평이 자꾸만 더 깊고 넓은 세계로 확장되어 가는 걸 목도 하는 것 또한 의미 있게 느껴진다.
'나는 이쪽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슬픔의 실체는 거기에 죄다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조회 수가 높지는 않다.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망각을 위한 카타르시스의 기능"이 거기엔 없다. 그 슬픔은 너무도 불편하여 우리를 어제와 똑같은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다. 비건이 아닌 이들에게도 분명히 어떤 영향을 미치고야마는 이미지들이다.

동물들을 가장 많이 귀여워하는 시대이자 동물을 가장 많이 먹는 시대를 살고 있다.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면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수업에서 나온다.' - 부지런한 사랑, 143쪽 
 
​이슬아를 사랑하게 된 독자로서, 그녀만의 색깔이 듬뿍 담긴 다양한 글들을 계속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녀의 부지런한 사랑 또한 더더욱 '아름다운 연대'로 나아가길 바라며, 나 역시 내 자리에서 최대한의 나로, 부지런한 사랑을 보내는 사람으로 살도록 애쓰겠다.

부지런한 사랑 -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이슬아 글방

이슬아 (지은이), 문학동네(2020)


태그:#이슬아, #부지런한사랑, #깨끗한존경, #일간이슬아수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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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레이디 밋셸입니다. 말하기 보다 쓰기를, 쓰기 보다 듣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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