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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2일부터 오는 11월 29일까지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있는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선무 개인전 '내게 날개가 있다면'이 열리고 있다. 2014년 베이징 전시회 당시 압수당한 작품을 비롯해 그의 최근작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두만강을 건너 외부 세계로 향하는 인물의 시선 속에 두려움, 불안, 초조, 호기심 같은 감정들이 교차되고 있다. 2020,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 선무 개인전 《내게 날개가 있다면》 포스터 두만강을 건너 외부 세계로 향하는 인물의 시선 속에 두려움, 불안, 초조, 호기심 같은 감정들이 교차되고 있다. 2020,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 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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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선무를 처음 본 순간 문득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생각났다. 이명준은 월북한 공산주의자 아버지 때문에 남한 경찰로부터 심한 고문과 모욕을 당하고, 이로 인해 남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한다. 하지만 북한 사회 역시 명준이 생각한 그런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선전 책임자로 일하는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재혼해 남한의 부르주아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상 사회 건설이라는 구호와 달리 북한 역시 위선과 독선, 치사한 아첨과 비굴이 난무하는 사회였다. 전쟁이 일어나 북한군 장교로 참전한 이명준은 낙동강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히게 되고 결국 포로수용소에서 남도 북도 아닌 제3세계를 선택하고 만다.

6‧25 발발 70주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는 여전히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로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국토의 중앙에 그어진 38선은 지금껏 분단의 상징으로 남과 북이 겨누는 총부리와 억센 철조망 속에 갇혀 있다. 그러는 사이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저마다의 이념과 사상의 틀에 갇힌 채,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뿌리를 지닌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을 잊어가고 있다.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에 정착
 
두 딸이 북한에 있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상황을 그렸다. 2013, 캔버스에 유채, 60×72㎝
▲ 선무 作 <할머니> 두 딸이 북한에 있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상황을 그렸다. 2013, 캔버스에 유채, 60×72㎝
ⓒ 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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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는 탈북 화가다. 굳이 그의 이름 앞에 '탈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마는, 그러나 탈북을 빼놓고 그의 삶과 예술을 논할 수 없겠기에 부득이 그런 수식어를 붙인다.

나는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본명이 무엇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 솔직히 잘 알지 못한다. 또 그와 같은 것들이 현재의 그를 이해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에 자세히 알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다만 그가 남쪽에 와서 사용하는 이름 '선무(線無)'에 대해서만은 이상하리만치 큰 호기심을 느꼈다.

혹자는 그것이 그의 그림 세계에 대한 철학이 담긴 이름으로 즉, '예술에는 경계가 없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의 몇몇 작품을 대하는 순간, 그것이 남북 분단의 선인 삼팔선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바라는 그의 염원이 담긴 이름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선무는 1998년 두만강을 건넜다.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있는 친척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가 어쩔 수 없는 탈북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나무껍질도 벗기고 담배 수매하는 곳에서 잡일도 하면서 3년을 버텼다. 잠깐이지만 건달로도 살았다. 중국에 정착하는 건 싫고 또 불법체류자 신세라 남한 국적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01년 말, 한국으로 들어왔다.

태국에 머물 때 선교사가 '남한 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이 있어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학연을 붙잡기로 했다(비록 그가 웃으며 농담 삼아 한 이야기지만 왠지 뼈있는 말 같아 가슴이 아팠다). 선무는 북한에서 미술대학을 나왔고, 군에서는 정치 선전물을 제작하는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남한에 와서 그는 미대에 다시 진학했는데 정말 앞에서 말한 대로 학연을 붙잡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마쳤다. 대학 학비는 나라와 학교에서 반반씩 부담했고, 대학원 학비는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후 중국에서 만난 교포 2세와 결혼했다.

프로파간다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하다
 
제복에 덧씌워진 정치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두 소년의 너무도 표정이 너무도 해맑다. 2010, 캔버스에 유채, 72x60cm
▲ 선무 作 <학창시절 2> 제복에 덧씌워진 정치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두 소년의 너무도 표정이 너무도 해맑다. 2010, 캔버스에 유채, 72x60cm
ⓒ 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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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했지만 정작 그의 미술은 북한식이다. 선무는 북한에서 주로 그렸던 프로파간다(정치 선전) 그림을 자신만의 독창적 예술 형식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어설프게 피카소나 달리 같은 화가들을 모방했다면 오늘날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작가로서 그의 이름은 없을지도 모른다.

흡사 북한의 정치 선전물을 닮은 선무의 그림은 아이러니컬하게 남에서도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는 북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자주 그리는데 북의 눈에는 그것이 북한 지도자들에 대한 조롱이나 비난으로 비춰질 수 있고, 남쪽 사람들에게는 자칫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삼부자에 대한 찬양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풍자와 위트가 있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예술가로서의 재치와 재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비난이나 선동을 목적으로 제작된 '프로파간다'가 아님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판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이자 책무이므로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그간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이는 단순한 비난과는 거리가 멀다. 한때 북한에서의 삶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김일성 부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북한'이라는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와 바라본 그곳은 더이상 '세상에 부럼 없는 곳'도, '락원'도, '행복동이들의 나라'도 아니다. 콜라와 아디다스로 상징되는 자본주의가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개혁, 개방은 필수적이다.

남북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선무의 그림
 
 2014년 베이징 전시회를 무산시킨 중국당국의 처사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2020, 캔버스에 유채, 73x61cm
▲ 선무 作 <왜 그래>  2014년 베이징 전시회를 무산시킨 중국당국의 처사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2020, 캔버스에 유채, 73x61cm
ⓒ 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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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베이징 원전 미술관 '홍백남(紅白藍)' 전시회 때는 유머러스하게 북한 정권을 풍자하고 싶은 마음에 관람객들이 바닥에 깔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름을 밟아야 입장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러나 막상 전시회는 개막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대신 북한 대사관 직원들에게 포위되고, 중국 공안들이 들이닥쳐 그림을 압수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남쪽에서 선무의 그림은 북한 지도자를 찬양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2007년 서울 부암동의 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는 <조선의 신>이라는 김정일 초상화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부암경찰서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사실 그 그림은 북한의 최고 존엄의 머리 위에 날카로운 별을 거꾸로 위치시킴으로써 시각적인 비판을 가하려는 시도였는데도 말이다.

또 같은 해 부산 비엔날레 특별전에는 <조선의 태양>이라는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그림 역시 겉으로는 김일성의 상반신을 북한식 선전화 방식으로 표현한 듯 보이지만 그 아래 놓인 꽃이 'NO'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북한 정권은 아니다'라는 비판적 의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작가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작품을 떼어내 버린 것이다.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그를 '예술가'가 아닌 '탈북자'라는 정치적 잣대로 예단한 결과일 것이다.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월간 미술> 2015년 8월호에, 선무의 그림이 부디 예술로서 다루어지고 해석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선무가 탈북자인 것은 맞지만 그의 그림을 탈북자의 것으로만 치부하는 관점은 옳지 않다. 그의 그림들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선동)를 뛰어넘는다. 선무는 예술가이며 따라서 그의 그림은 당연히 예술로서 다루어지고 해석되어야 한다. 선무의 작품들이 예술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의외로 예술의 본질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소망을 형상화하는 가장 의미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선무의 그림은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세계가 인정한 선무, 그의 간절한 소망
 
저 바다 건너 어딘가에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2020, 캔버스에 유채, 73x61cm
▲ 선무 作 <가보고 싶다> 저 바다 건너 어딘가에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2020, 캔버스에 유채, 73x61cm
ⓒ 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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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는 국내보다 오히려 뉴욕, 멜버른, 베이징, 뒤셀도르프, 뮌헨 등 해외에서 더 유명한 화가다. 그의 그림도 80% 이상이 해외에 판매된다. 올해 프랑스 파리 전시회를 준비 중이었지만 코로나19로 연기되고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무가 그의 그림 속에 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은 무엇일까? 모르긴 해도 그것은 가족을 북에 두고 온 그로서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남북의 화해, 평화, 그리고 통일일 것이다. 언젠가 헤이리에 갔다가 짧은 시 한 편을 쓴 적 있다.

헤이리에 가면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불쑥
달려 나와
Hey Lee!
Hey Lee!
하고 나를 부를 것만 같다
나는 Lee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시에서처럼 헤이리에 가면 어디선가 불쑥 선무가 나타나서 "Hey Lee!" 하고 나를 부를 것만 같다. 오는 주말에는 헤이리에나 다녀와야겠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콩나물 신문에도 실립니다.


태그:#선무, #현해당, #콩나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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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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