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7 08:01최종 업데이트 20.11.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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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단지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잘난 여자'가 되어버렸으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만으로 '지적인 척하는', 또는 '고상한 척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곤 했다. ⓒ PIXABAY

 
"할 수만 있으면 공부를 더 시키는 것이 좋지요."
"공부는 더 해 무엇하겠소. 고등여학교 정도면 족하지."
"여자도 전문교육을 받아야 해요. 여자의 일생처럼 위태한 것이 어디 있나요."
"그러기에 잘난 여자가 되지 않는 것이 좋아."
"제 한 몸을 추스를 만한 전문이 없어 불행에 이른다면 부모, 형제, 친구를 괴롭게 하니까 결국 마찬가지야."
"잘나지 않으면 불행에 이르지 않지."
-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 어머니와 딸>
 
근대 한국의 화가이자 소설가였던 나혜석의 <어머니와 딸>이라는 단편소설의 한 대목으로, 딸에게 공부를 더 시키라는 친척의 권유를 그의 어머니가 거절하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어째서 딸의 교육을 반대했던 것일까? 왜 "잘난 여자는 불행에 이른다"고 단언했던 것일까? 작가는 이 작품을 그리는 동안 어머니 캐릭터를 부정적으로 그리고자 했던 걸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 속 어머니의 태도는 당대의 사람들이 '교육받은 여성'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나혜석은 시대가 여성의 교육에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가를 간접적으로 꼬집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향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교육받은 여자, 즉 '잘난 여자'에 대한 인식은 국경을 초월하여 대개 비슷했다. 1800년대 후반에 활동한 미국 작가 케이트 쇼팽의 소설 <각성>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퐁텔리에 부인이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며 책을 읽고 작품활동을 열심히 하자 그의 남편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아내가 '이상해졌다'며 상담을 하는데, 이때 남편의 호소를 들은 정신과 의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혹시 아내 분께서 최근에 지적인 척하는 여성들, 아주 고상하며 잘난 척하는 여성들과 어울리지 않았나요?"

이처럼 여성은 단지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잘난 여자'가 되어버렸으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만으로 '지적인 척하는', 또는 '고상한 척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정신과 의사로부터 조언을 들을 만큼 위험한 행위였다. 그리고 이때 교육의 상징처럼 기능하던 것이 다름 아닌 책이었다. 책이란 애초에 교육받은 사람만 읽을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따라서 책을 읽는 행위는 교육을 받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세상은 '책을 읽는' 여성을 호락호락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여성이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가만두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허튼 생각을 하게 된다거나 여자가 너무 잘나면 못 쓴다고 호통을 치는 등 아예 문자 자체를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며, 교육을 시키더라도 동시대 남성에 비해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그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때로 교육에 대한 열망을 내보이는 것 자체로 벌을 받곤 했다. 교육을 받으면 글을 읽게 되니까. 글을 읽으면 생각을 하게 되니까. 생각을 하면 문제를 인식하게 되니까. 문제를 인식하면 의견을 말하게 되니까.

혹 위의 작품들은 '고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당대는 지금보다 여성에게 훨씬 더 억압적인 시대였다는 이야기를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과거에 비해 성별에 따른 교육 격차는 현저하게 줄어든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교육받은 여성 혹은 책을 읽는 여성, 즉 생각하고 떠드는 여성에 대한 인식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잘난 여성은 불행한 여성"이라는 메시지의 반복

 

< 한겨레 > 11월 10일자 26면에 실린 '지식인의 진짜 책무' 일부 ⓒ 한겨레 PDF

  
얼마 전 화제가 된 한 칼럼만 봐도 그렇다. 김민식 문화방송 피디는 지난 10일 <한겨레>에 '지식인의 책무'란 글을 게재하면서 부모님의 일화를 가져다 썼다. 어릴 적 어머니를 때렸던 아버지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그는 책을 전혀 안 읽는 사람과 너무 많이 읽는 사람이 같이 살면 너무 많이 읽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며, 아마도 책을 너무 많이 읽은 어머니가 사사건건 문제 제기를 하다보니 그것이 아버지의 열등감을 건드렸고, 그로 인해 둘의 사이가 더욱 나빠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면서 지식인은 지적 우월감을 느끼며 상대를 계도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존중하는 것이 먼저라고 마무리한다.

이 칼럼은 결국 가정폭력을 옹호한다는 가열찬 비판 끝에 본문이 삭제되고, 그 대신 필자와 해당 신문사의 사과문이 게재되는 유례 없는 결말을 맞이했다. 칼럼이 삭제된 이후에도 비판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조금 지나친 처사라고, 비록 가정폭력이라는 잘못된 예시를 끌어오긴 했으나 본문의 주제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라며, 그럼에도 가정폭력을 소재로 들었다는 이유로 비판을 지속하는 것은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행위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나 역시 작성자가 어떤 악의를 가지고 해당 칼럼을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사례를 가져다 썼을 것이다. 진짜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지식인이 가져야 마땅한 겸손한 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해당 칼럼을 옹호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적은 내용이라 더욱 문제가 된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각의 발현이다. 이번 건은 쓴 이가 평소 책을 읽는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저도 모르게 표출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여성은 까다로운 여성, 문제를 보면 넘어가지 못하고 매번 지적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여성, 남성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이란 인식이 그의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어머니는 "지나치게 많은 책을 읽어 불행해졌다"는 통탄과 아쉬움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결국은 공부하는 여성, 글을 읽고 쓰고 생각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여성에 대한 생각이 나혜석과 케이트 쇼팽이 살던 시절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그 글을 쓴 이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해당 칼럼은 하나의 사례일 뿐, 그러한 인식은 비단 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겨레>에는 코로나 발생 이후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밑에는 여성들이 교육을 너무 많이 받아서, 페미니즘에 노출되고 예전에 비해 공부와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불행해졌다는 댓글이 수백 개가 넘게 달렸다. 주로 남성들이 남긴 것이었는데, 그들은 여성들이 성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이전 대비 '작은' 차별을 그냥 넘기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역시나 김민식 피디가 쓴 칼럼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이다. 여성이 너무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불행해졌다는, "잘난 여성은 불행한 여성"이라는 메시지의 반복. 하지만 잘난 여성, 공부하는 여성, 책을 읽는 여성이 불행한 이유가 과연 그가 지나치게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혹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돌을 던졌던 주변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잘난 척한다는, 고상한 척한다는, 각종 문제점에 대해 참고 넘어가지 않고 매사 이의를 제기한다고 비난했던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물론 한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는 데는 수백 수천 가지 복잡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쉽게 단정 지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다. 다만 적어도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잘난 남성은 불행한 남성"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책을 읽는 남성"에게는 돌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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