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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정도 판결문을 읽던 판사가 피고인석을 바라보았다.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오경대씨는 눈을 감은 채 판사가 판결을 낭독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길어서 잘 안들리셨죠? 잠시만 일어서 주세요. 피고인 오경대 무죄!"

판사들이 법정을 나간 뒤에도 오경대씨는 한참을 앉아 눈물을 닦아야 했다. 53년만이었다. 무죄를 받기까지 반세기가 걸린 것이다. 

지금은 예래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곳, 옛 지명 상예리라는 곳에 살고 있는 오경대씨는 감귤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이다. 50년 전 그가 간첩으로 몰려 15년간 감옥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웃은 거의 없다. 그저 그가 감귤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

갑자기 찾아온 이복형... 그리고 배를 탔다 생긴 일
  
 자신의 한라봉 농장에서 일하는 오경대 씨.
 자신의 한라봉 농장에서 일하는 오경대 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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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대는 북한에 다녀온 사실이 있다. 1966년 6월 16일 서울에서 공부한다던 이복형님 오경지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사실 저는 이복형 오경지의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같이 살던 어머니가 오경지다 하니까 오경지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죠. 어머니가 어떻게 지냈느냐고 하니 오경지가 하는 말이 친구들과 일본에 살고 있는데 무역업을 한다고 했습니다. 물건을 싣고 일본에서 목포로 가는 중에 잠시 들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류민단증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경대는 이복형 오경지가 내미는 거류민단증을 보고 안심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에 살고있는 민단교포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경지는 오경대에게 며칠 동안 관광도 하고 무역일도 배우자며 함께 일본에 가지고 제안을 했다. 오경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그날 오경지를 따라 배를 탔다. 그런데 배에서 선원들 대화가 이상했다.

"배에 들어가 있는데 배에서 동무 동무 하는 소리가 나거든. 그때야 느낀 거야. 야 이거 잘못되었구나. 내가 말은 못하고 형 오경지 손에다가 간첩이냐고 적어서 물어봤어요. 그때는 참 이렇게 어리석었어. 그러니까 형이 '해방군'이라고 하는 거야."

6월 18일 북한에 납치되어 6월 22일 제주도로 도착할 때까지 그는 포로의 몸처럼 잡혀 끌려다녀야 했다. 초대소라는 곳은 밖에서 문을 잠그는 구조여서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오경대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형 오경지와 끊임없이 싸웠다. 심지어 몸싸움을 하던 중 손을 다치기도 했다. 결국 오경대가 거세게 저항하자 결국 제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단 조건이 붙었다.

"오경지가 나더러 8월 18일부터 20일 사이에 무조건 제주로 찾아갈 테니 목포에 사는 형제인 오경부나 서울에 사는 오경무를 데리고 오라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안 하면 우리 집 식구들과 어머니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리겠다는 겁니다. 저는 오경지가 정말 나와 피를 나눈 형제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6월 22일 제주로 돌아온 오경대는 오경지로부터 받은 서적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러나 오경부나 오경무를 만나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협박 때문에 오경무를 제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8월 19일 다시 찾아온 오경지가 오경무를 데리고 떠났다.

"저의 죄라면 빨리 신고를 못한 것, 큰 형님을 작은 형님과 상면하게 해 준 것이 죄라면 죄입니다. 그러나 추호도 북한을 추종하거나 협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해 협박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7개월이 지난 1967년 3월 23일, 중문경찰서 경찰이 찾아와 오경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보고는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어제 왔던 경찰과 처음보는 50대 남성 2명이 집으로 찾아왔다. 다짜고짜 방으로 들어와서는 자신들의 신분은 밝히지 않고 오경대에게 '이북 갔다왔지?'라고 묻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온 것이라는 생각에 순순히 다녀왔다고 자백했다. 연행되어 간 곳은 제주시 칠성로거리에 있는 OO물산이라는 위장명칭의 수사기관이었다.

"들어가니 자술서를 쓰라면서 종이하고 연필을 줘요. 그리고 나서 제가 자술서를 쓰는 동안 옆에 앉아 있어요. 그래서 한 30분 자술서를 써서 수사관한테 보여주니 제 얼굴에다 서류를 던지면서 이 따위로 쓰느냐며 3번을 다시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고문을 하는데 손, 발 때리는 건 기본이고, 각목으로 허리하고 어깨를 내려치고, 수갑을 채워서 뒤로 묶어놓고 쓴 것을 보면서 다시 쓰라면서 구타했습니다. 잠을 잘 때는 헌병대 유치장에 들어가 있었는데 거기서는 군인들이 주먹으로 얼굴도 때리고 발로 차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짐승 취급을 받은 겁니다."

검사나 판사 앞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했던 이유
  
 자신이 연행될 당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 중정으로 올라갔던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앞에 선 오경대 씨
 자신이 연행될 당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 중정으로 올라갔던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앞에 선 오경대 씨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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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대는 모슬포공항에서 군용기를 타고 서울 여의도 공항에 내려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남산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다시 덩치 큰 수사관에게 구타당하며 조서를 작성했다. 한 두시간을 그렇게 맞고 서울구치소(지금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로 입감되었다. 그곳에 있을 때도 중앙정보부 수사관 2명이 찾아와 구치소 면회실에서 조사했다. 정보부 수사관들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다.

"어디 가서도 다른 소리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자백한 그대로 이야기해라, 안 그러면 죽을 줄 알아라. 너희 가족들도 다 잡혀서 똑같이 처벌 받는다"

이런 협박을 했기 때문에 오경대는 검사나 판사 앞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피고인 오경무를 사형에, 같은 오경대를 징역 15년 및 자격정지 15년에, 같은 오경심을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5년에, 같은 오경부를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5년에 각 처한다."(1967년 9월 21일 서울지방법원 판결문 중)

"형을 모두 마치고 나서 1981년 8월 15일 만기 4개월 남기고 8.15특사로 풀려나서 제주도에 내려왔는데, 집에 오니 보호관찰 대상이 되어 가지고 좌우지간 한 20년 감시당하며 살았어요. 집으로 경찰이 찾아오기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동향보고를 써서 내기도 했어요. 그 동향보고에서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만났는지 다 써야 했고, 그렇게 쓴 동향보고서를 서귀포경찰서 정보과에다가 제출했습니다. 아내가 일 다닐 때도 아내 다니는 회사에 정보과 형사가 전화를 해 댈 정도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한의학 공부를 했다. 그 중에서 침구공부를 했다. 그 덕에 많은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의 병을 고쳤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오대감', '오박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 소원은 불명예스러운 빨간줄 이것이 없어지는 것이에요. 내가 월북을 하고 싶어 한게 아니라 강제로 납치되었다가 왔는데 정보부에서 내가 동조해서 다녀온 것처럼 조작한 것이 억울합니다. 그리고 혈육의 정으로 형제간을 만나게 해 준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을 다 죽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재판을 받을 때 '수십 년간 죽었다고 생각했던 형제가 왔는데 만나게 해주지 않을 가족이 어딨느냐'고 판사에게도 말했어요."

이제 80이 넘은 나이의 오경대는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자식들에게 간첩, 전과자라는 불명예가 전해지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연좌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아직도 연좌제가 이 사회에서 살아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재심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것을 막고 싶다며 재심신청 이유를 밝혔다. 안산의 원곡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와 함께 재심을 준비하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족의 협력으로 잘 이겨내며 재판을 치를 수 있었다.

"오늘 판결은 판사님이 저에게 영혼을 준 것"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오경대씨와 변호를 맡은 원곡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오경대씨와 변호를 맡은 원곡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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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2020년 11월 20일 오후 2시 서울지법 320호에서 열린 재심 선고(송동환 재판장)를 통해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를 선고받은 뒤 오경대씨에게 감회를 물어보았다. 

"오늘 판결은 판사님이 저에게 영혼을 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날개가 있다면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기쁩니다. 이제 자유를 찾았다는 생각에 뭐라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2000년대 들어 많은 과거사위원회의 결정과 재심을 통해 사법부와 검찰, 정보수사기관의 개혁을 요구해 왔다. 그럼에도 매번 이러한 재심 무죄결정이 나올 때마다 검찰은 스스로의 자정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 있다. 이미 수백명의 억울한 피해자가 검찰의 무리한 기소로 인해 피해받았음에도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검찰은 공소유지의 이유를 들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사건에 대해 항소, 상고를 일삼고 있다.

결국 이러한 검찰의 행태는 검찰개혁의 국민적 공감을 자극할 뿐이다. 결국 이러한 과거사건을 비추어보면 공수처의 필요성은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 이번 오경대씨의 재심무죄판결에 비추어 검찰은 스스로 개혁에 대한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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