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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1구 몽돌해수욕장의 일출.
 홍도1구 몽돌해수욕장의 일출.
ⓒ Jonathan 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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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서지 못할 때가 있다. 그때는 쓰러지거나 누군가를 붙잡아야 한다. 흑산도(黑山島)에서 생각한 홍도(紅島)는 그랬다. 혹, 쓰러질 수 없어서 흑산도를 의지한 채 파도를 견디는 부속 섬이 아닐까.

섬은 섬이기에 외롭다. 사람과 다르지 않다. 운명적으로 무엇인가에 기대지 않으면 한 줌 바람이거나 흙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홍도는 그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존재하는 섬은 관계를 고민하게 한다. 바라보는 홍도가 아니라 발을 딛고 선 홍도가 들려줄 이야기가 궁금했다.

서남단 섬 홍도
    
아침부터 서둘러야했다. 목포연안여객선 터미널에서 홍도로 향하는 아침 7시 50분 쾌속선을 타야했다. 출항할 시간(07:50, 13:00)과 거의 엇비슷하게 홍도에서도 유람선이 하루에 두 번(07:30, 12:30) 섬 주위를 돈다. 두 시간 동안의 유람을 끝내면 회항하는 여객선을 탈 수 있게 하려는 홍도 측의 배려이다.

홍도(총 면적 6.63㎢)는 바위섬이다. 논농사는 전혀 지을 수 없고 텃밭에 반찬으로 쓸 정도의 채소를 키우지만 해안지형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사암과 규암의 층리(層理)와 절리(節理)가 잘 발달되어 섬 전체가 홍갈색을 띤다.

2~3월 붉은 동백꽃이 섬을 뒤덮고 있어, 해질녘 노을에 비친 섬이 붉은 옷을 입은 것 같다 하여 홍의도(紅衣島)라고 불리다가 규암으로 된 이 섬의 바위가 홍갈색을 띠고 있어 홍도라 붙여졌다고 한다.
  
제2전망대에서 바라본 홍도1구 마을과 몽돌해변.
 제2전망대에서 바라본 홍도1구 마을과 몽돌해변.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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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의 첫인상은 전형적인 관광지 모습 그대로였다. 홍도와 여객선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흑산도(면적 23.7㎢)보다 더 들뜬 모습이라고 할까. 섬 면적에 비해 거대한 홍도 항 여객선터미널, 그 뒤 언덕으로 차곡차곡 들어 찬 건물들은 대부분 붉은 색 지붕을 얹은 호텔(숙박업소 간판은 거의 다 '○○호텔'이라고 적혀 있었다)이었다.

슈퍼가 셋, 나이트클럽이 두 군데나 있었다. 홍도를 한 바퀴 돌고 난 밤에는 나이트클럽에 모여 회포를 풀라는 것인지, 그 기묘한 조합이 어쩐지 낯설었지만 코로나바이러스19 여파인지 왠지 버림받은 연인처럼 보였다.

여객선이 항구에 닿았을 때에 배를 타려고 길게 줄을 선 관광객들 주위로 숙박업소에서 나온 호객꾼들과 건어물과 해산물을 파는 노점 상인들이 뒤섞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오토바이를 개조한 미니 트럭이었다. 숙박업소 주인들이 미니 트럭을 타고 와서 미리 예약한 손님들의 짐을 싣고 있었다.

섬 여행을 가면 종종 개조한 미니 트럭을 본다. 이름을 알 수 없어서 몇 지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최종적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추레라'였다. 그때가 생각나서, 미니 트럭처럼 생긴 것을 무엇이라 부르냐고 물었더니 숙박업소 주인은 활짝 웃으면서 호쾌하게 답변했다.

"홍도 리무진!"  
  
홍도 리무진!
 홍도 리무진!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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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리무진이라고 말해준 남자는 내가 홍도2구에 숙소가 있어서 이곳(홍도1구)에 짐을 풀 수가 없다고 해도 유쾌하게 웃으면서 유람선을 탈 때 가급적 오른쪽 편에 앉으라고 했다. 유람선은 홍도 항에서 남서쪽으로 향해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코스이니, 경치를 구경하기에는 더 좋을 거라고 덧붙였다.

다음 날 나는 그의 말대로 유람선 오른쪽 편에 앉았다. 내 옆에는 뉴욕 출신 재미동포3세인 존슨(Jonathan)과 그의 개인 가이드가 앉았다. 존슨과는 전날 깃대봉에서 만났다.
   
깃대봉에서 바라본 홍도2구 가는 길.
 깃대봉에서 바라본 홍도2구 가는 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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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나는 1박 2일 코스로 홍도에 온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걷는 데에 능숙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갑피가 얇은 신발을 신고 깃대봉에 올라 발등 살갗이 벗겨져서 신발을 벗고 올라야 했다. 정상에서 내가 내려가야 할 반대방향으로 나 있는 길을 봤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그때 생각했다. 다음에 올 때 꼭 저곳을 가주고 말 거야. 운 좋게 나는 3박 4일 머물 수 있는 지인의 어가를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숙소까지 닿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깃대봉 정상(356m)을 거쳐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4km 정도 거리였고 넉넉잡아 2시간 정도 걸렸다.

깃대봉(고치산, 365m)은 홍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자 홍도 1구와 2구를 잇는 유일한 육로의 중간쯤에 있다. 서해의 가장 외해에 있는 홍도는 섬 형상이 누워 있는 여인과 흡사하다. 머리 쪽이 홍도 2구라면 홍도 1구는 가는 허리 쪽(400m)에 속한다. 그곳에 접안시설을 두고 여객선이 닿는다(바람의 방향에 따라 반대편에 있는 몽돌해변 선착장에서 접안하기도 한다).

20년 전만 해도 이 길을 통하여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연료로 사용했으며 생필품과 술, 쌀 등 먹거리를 지게에 지고 넘어 다녔다. 지금은 바람이 불지 않는 때에 맞추어서 1구에서 배를 타고 오기 때문에 좀처럼 산을 넘지는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대부분 나이든 주민들이라 추억의 옛길이 되어 버렸다.

여행객들이 운동 삼아 산길을 넘나들 뿐이다. 전날 2시간 30분 동안 비교적 얌전하게 배를 타고(처음에 왔을 때는 거의 변기를 붙들고 와야 했다) 도착한 나는 50리터 배낭을 메고 기꺼이 깃대봉을 올라 홍도 2구로 가기로 했다. 배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혼자서 배를 타기에는 요금이 비쌌다. 편도 5만 원이었다.

깃대봉에서 만난 뉴욕 출신 재미 동포 3세

정상으로 갈수록 하늘이 잔뜩 흐려지고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늘 비상용으로 우비를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다. 단체여행객은 제2전망대까지만 오르고는 진즉 내려갔다. 흡사 혼자 깃대봉을 전세 낸 것 같았다. 누군가가 뒤따라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정상 500m를 남겨둔 전망대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웬 숨 차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산적 같은 남자가 전망대로 들어섰다. 이런 날은 누구라도 반갑기 마련인데 이 남자 한국말도 못 한다. 외국인 노동자인가.

혹시나 해서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더니 통한다. 뉴욕 출신 재미 동포 3세이며 '존슨'이라고 소개한다. 한국말을 못해서 개인 가이드 동행해서 8일 동안 여행을 한단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여수, 순천, 목포를 찍고는 홍도로 왔다. 홍도에서 하룻밤 묵고 고창, 군산, 부안을 거쳐 서울로 돌아간단다.

깃대봉 정상을 거처 동백나무와 밤나무, 후박나무, 백소사나무, 졸참나무, 팽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는 산길을 한 시간 동안 따라 걸어서 2구 등대까지 본 사람은 우리가 유일했다. 그 인연인지 오늘 아침 2구에서 깃대봉을 거쳐 1구로 다시 왔을 때도 그가 제2전망대까지 마중 나왔다. 존슨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몽돌 해변 일출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둠 속에서 몽돌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서 들은 적이 있다. 모든 불이 내려진, 그야말로 칠흑에 둘러싸인 그곳에 바람이 거세지면서 소리만 난무했다. 밀려오고 물러가며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가슴에서 파열되었다.

여명(黎明)을 머금은 몽돌해수욕장은 전날과 얼굴을 달리했다. 전날이 복면 쓴 사나운 사내와 같았다면 이른 아침 그곳은 새벽밥 하려는 아낙네의 맨얼굴을 닮아 있었다. 아낙네의 맨얼굴을 닮아 있는 몽돌 해변에 수평선에서 황금빛 섞인 붉은 태양이 오롯이 떠올랐을 때의 충만감이라니.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홍도(紅島, 신안군 흑산면 홍도리)는 신안(新安)이라는 이름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곳으로 해마다 수십만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아름다운 섬이다. 여행 날짜는 2020년 11월 6일부터 9일까지이다. 3박 4일 머물면서 깃대봉(365m)을 거쳐 홍도 2구와 1구를 잇는 4km 산길을 4번이나 왕복했다.


태그:#홍도 , #섬, #깃대봉 , #여행 , #흑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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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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