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 13:51최종 업데이트 20.12.0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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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1960년대 파독광부들을 묘사한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1964년 11월 25일 광부 김철환이 죽었다.

이날 서독의 작은 도시 겔젠키르헨의 에센 광산에서 철환이 죽었다. 고향에서 9000km, 지표면에서 1000m 아래인 광산의 갱내 막장. 30도를 넘는 뜨거운 막장에서 32살 한국인 청년 철환은 떨어지는 큰 돌을 피하지 못해 즉사하였다. 그는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조국을 떠난 독일 파견 광산 노동자 중 한 명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의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 87달러에 서울의 실업률이 16.4%에 이르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린 놀라운 고속성장 가도를 달렸다. 국민소득이 높아지자 몸이 고된 업종을 청년들이 기피하면서 해당 업종에서 인력 부족 사태가 빚어졌다. 서독의 노동력 부족은 한국의 일자리 부족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1963년 4월에 주서독 한국 대사관이 독일 광산 측에 한국 광부 파견 가능성을 타진하여 파견이 성사했고, 같은 해 8월 12일에 파독 광부 1차 모집이 시작되었다. 지원 자격은 중졸 이상의 20~35세의 남자 중 병역을 필한 자에 한했다. 정부는 언론을 통해 높은 임금과 질 좋은 숙소를 내세우며 광부 파견을 광고했다. 특히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높은 수입이 계약 기간 3년 동안 보장된다는 조건은 많은 청년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국내 직장인 월급의 약 8배 정도의 금액이었다.
   

1977년 6월 파독 광부 신검 절차 보고 ⓒ 국가기록원

   
같은 해 9월 28일 지원자 2894명 중 서독 루르 지방에 파견될 탄광 근로자 367명이 선발되었다. 합격자 중 18%는 대학 졸업생이었다(1966년에는 합격자의 73%가 고졸 이상의 고학력자였다). 파독 광부 중 과거 광부 경력이 있는 사람은 약 15%에 불과했다. 높은 경쟁률을 뚫기 위해 학력을 낮춰서 지원하거나 '가짜 광산 취업 증명서'를 사서 노동청에 제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합격자들은 파견 전 두 달을 광부로서 기초 훈련과 외국어를 익히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약 100명이 실격됐다. 모든 준비가 끝난 12월 16일 '한국 광부 파견에 관한 한-독 협정서'가 체결되었고 같은 달 21일에 1차 파독 광부 247명 중 제1진 123명이 김포공항을 떠났다.

대학생 이성재의 죽음

꿈꿨던 미래와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3년을 버티면 많은 돈을 들고 귀향할 수 있다는 청년들의 소망은 많은 경우 실현되지 못했다. 이성재는 제대한 후 취업을 걱정하던 단국대학교 복학생이었다. 그는 졸업 후 예상되는 취업난을 고려하여 파독 광부를 지원하였고 1964년 10월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묘사한 대로 60kg 쌀가마니를 다섯 번 들어 올리는 체력 시험을 통과한 것만으로 광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파견 두 달 후 그는 석탄 바위에 깔려 사망했다. 그와 함께 일하던 권이종에 의하면 이성재는 지하 채탄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광산의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동료들의 연이은 사망에 한국 광부들은 충격을 받았다. 권이종은 당시 그들의 죽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회고한다.

"나 역시 언제 저렇게 관 속에서 말 못 하는 시체로 누워 있을지 두려웠다."
   

1965년 1월 26일 경향신문에 실린 이성재의 죽음을 알린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광산 경험이 전무한 지원자에게 두 달의 훈련은 턱없이 부족했고 부상과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1965년 한 해에 뒤스부르크 지역에서만 370명의 한국인 광부가 다쳤다.

1차 파견 이후 15년이 지난 1977년이 되어서야 중졸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는 조항이 사라졌고 ▲ 1년 이상 광산 업무 경력자 ▲ 출국일 기준으로 광산에서 이직한 지 3년이 지나지 아니한 자'라는 조건이 추가되었다.

일상은 죽음의 공포 못지않게 광부들을 힘들게 했다. 애국을 실천하는 동시에 부를 거머쥘 수 있다는 정부의 홍보와 실상은 달랐다. 독일에 도착한 이들은 그저 최빈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었다.

호텔과 같다는 숙소는 닭장이나 다름없었다. 120명의 노동자가 화장실 하나, 샤워실 세 개 그리고 부엌 하나를 공용으로 사용했다. 보수 역시 고정된 600마르크가 아니었고 작업 성과에 따라 다르게 지급됐다. 많게 받으면 1000마르크가 될 수도, 적게 받으면 400마르크 밑이 될 수도 있었다. 매일 같이 지하 1600m의 갱도로 내려가 서구의 체형에 맞춰진 50~60kg 무게의 기구를 짊어졌다. 한국의 광부들은 8~9시간씩 석탄을 캐며 섭씨 35도를 넘는 지열과 싸웠다.

파독 간호사 19명 극단적 선택

국가 차원에서 모집한 파독 광부와는 달리 파독 간호사는 한 독일 교포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가 독일에 도착할 무렵 이수길은 의학박사로 서독 유학 후 전문의로 독일 마인츠대학병원 소아과병동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간호사는 3만 명 정도로 광부와 마찬가지로 인력 부족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한국인 간호사를 독일에 불러들일 길을 모색했다.

1960년대 서독은 경제 호황으로 복지가 확대되었고 병원과 요양시설 등에 근무할 노동자의 수요가 급증했다. 그러나 탄광업계와 마찬가지로 몸이 고된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해 나날이 인력 부족이 심해지고 있었다. 일부 병동이 인력이 없어 폐쇄 직전인데도 서독 정부는 외국인 간호사의 취업을 허가하지 않았다. 보수 성향의 집권 여당이 외국인의 취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수길은 슐타이스 노르트베스트 프랑크푸르트 병원협회장과 함께 1965년 4월부터 한국인 간호사 초청 사업을 전개했고 헤센주에서 취업 허가를 받아냈다. 당시 서독 11개 주 중 유일하게 진보 성향의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덕이었다. 난관을 극복한 듯했으나 이번에는 주서독 한국 대사관이 한국인 간호사 취업 주선 요청을 거부했다. 독일 내 한국인 광부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이유였다.

이수길은 그해 10월에 직접 한국을 방문해 보사부 장관 오원선과 면담하고 128명 간호사의 서독 취업 물꼬를 텄다. 이듬해 이 박사는 해외개발공사와 계약을 체결해 간호사 파독을 성사시켰다. 1966년 1월 31일 JAL 전세기 129석 중 128석을 채운 1차 파견 간호사들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독일의 각 병원에 배치되었다. 이수길에 따르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1년간 5800명의 한국 간호사 면허 소지자와 4232명의 간호보조원 등 총 1만 32명의 간호 인력이 독일로 넘어갔다.
 

1966년 1월 30일 128명의 간호사 독일 파견 환송식 ⓒ 국가기록원

 
광부들과 마찬가지로 간호사들도 적잖은 고초를 겪는다. 파독 간호사들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혹은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낯선 나라로 떠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당시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고학력 여성이었다. 대부분 중등학교까지는 마친 20대 여성이었으며 대학교육을 받은 여성이 많았다. 중등교육을 마친 여성은 간호조무사를, 고등교육을 마친 여성은 간호사를 선호했다.

독일에서 간호 일은 한국과 달랐다. 독일 간호사는 주로 병실 청소, 환자 용변 돕기, 변기 청소 혹은 다른 간호사들의 식사 준비 등 간호 학생과 간호보조원과 분업이 이뤄지지 않은 채로 업무를 수행했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시작한 파독 간호사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곧 외국인이라서 받는 차별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임을 이해했고, 독일 특성을 파악한 한인 간호사들은 자신들이 차별 없는 직업 생활을 했다고 평가한다.

문화의 차이를 비롯해 여러 어려움을 겪은 가운데 파독 간호사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처음 겪는 타국 생활로 인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같이 갔던 친구 중에 2명이 향수병 때문에 그만뒀을 정도로 파독 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고향과 부모님 그리고 가족,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라고 파독 간호사 양선주는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간호 여성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과 한국에 남겨진 가정의 분열과 파탄이 그들이 겪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김정숙은 어느 날 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독일에 있던 한국 간호원들이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어려우니 누나는 잘 생각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독일에 있는 간호원들이 고국으로 더 많은 돈을 송금하기 위해 오전 병원 근무가 끝나면 오후에는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파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헛소문이 어떻게 방영이 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30년을 살면서도 아직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처럼 파독 간호사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 '신여성'을 향한 근거 없는 비방을 견뎌내야 했다. 한국에 가족을 두고 떠나온 여성 중 일부는 가정의 분열을 겪었다. 1970년대 초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진 어느 50대 여성은 파독 간호사가 되었다. 계약 기간 3년간 꼬박꼬박 한국에 돈을 송금했으나 귀국한 그를 맞은 건 남편의 바람과 술로 탕진된 텅 빈 통장이었다.

양선주는 "결혼한 파독 간호사는 대부분 남편에게 돈을 전부 보내다시피 했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돈도 잃고 가족도 잃는 불행한 경우가 꽤 있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1970년 <조선일보>는 몇 달 사이 발생한 독일 간호 인력 3명의 극단적 선택을 보도하며 국가의 지원 부족을 비판했다. 기사는 파독 간호사들이 송금하는 돈을 생각하면 이들을 위한 여성 상담 인력을 국가에서 지원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노동청은 여성 노무관 한 명만을 지원했다. 파독 간호사 중 19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왜곡된 진실

1963년에서 1979년까지의 파견 기간에 총 117명의 청년이 죽었다. 117명 가운데 작업 중 사고로 사망한 광부는 27명,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한 간호사는 19명이다. 이역만리에서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64년 12월 파독 광부가 독일 땅을 밟은 지 1년이 되던 해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파독 노동자들과 만찬 자리에서 연설하던 박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자 하인리히 뤼브케 독일 대통령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화는 박 대통령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예화로 많이 쓰여 임기 중 일어난 많은 잔혹한 사건을 중화하는 용도로도 동원되었다. 이 이야기는 박 대통령의 통역사이자 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입안하는 데 참여한 백영훈의 저서 <아우토반에서 흐른 눈물>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언론보도에 박 대통령의 눈물을 보도한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은 한국인 파독 노동자들에게 연설하던 자리가 아닌 만찬 등 별도의 자리에서 만났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만난 날짜는 12월 7~8일 세 차례이고 박 대통령이 파독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함본 광산회사를 방문한 때는 9일 오전이다. 뤼브케 대통령이 원천적으로 박 대통령에게 손수건을 건넬 수가 없을뿐더러 박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 또한 없다. 기록영상 등을 통해서 육영수 여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손수건을 눈가에 갖다 대는 장면만 확인될 뿐이다.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가짜였지만, 계속해서 재생산되어 퍼져나갔다.

파독 노동자의 임금을 담보로 국가의 차관을 빌렸다는 기록 또한 거짓이다. 독일은 파독 노동자 계약 4년 전인 1961년에 체결한 '경제 및 기술협조 의정서'에 따라 상업 차관을 지급했다. 노동자 파견과는 무관하다. 

이처럼 파독 노동자를 가난한 조국을 위해 희생한 청년으로 미화하는 인식은, 당연히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미래를 일궈내기 위한 파독 청년들의 개인적이고 진취적인 도전까지 과도하게 국가주의로 포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들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도전을 모두 국가적인 성취로 둔갑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박정희나 다른 인물의 '우국충정'을 끼워 넣는 그림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파독 노동자들은 국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 파독 광부 대표 유계천은 귀국 후의 일터 주선, 화폐를 송금할 때의 환율 조정, 계약 기간 만료 후에도 계속 체류하여 일할 수 있게 해줄 것,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할 것 등 6개 건의 사항을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지만 "여러분 파독 광부들의 건의 사항이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박 대통령의 말과 달리 건의사항 대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파독 광부 1차 1진 귀국자 115중 32명만이 공사 등에 취직이 알선되었다. 대부분의 파독 광부는 체류 연장조차 허가받지 못했다. 주지하듯 박 대통령은 노동 운동을 탄압했고 ILO 가입은 1991년에 이뤄졌다.
 

1964년 12월 21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김철환 유해 관리 미흡 사건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파독 노동자를 향한 정부의 소홀한 태도는 사망한 김철환 광부의 유해가 잘못 전달된 사건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독일에서 화장한 김철환의 유해는 본가인 충남 서천이 아닌 서산으로 잘못 전달되어 유가족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뒤늦게 도착한 유해는 제대로 포장되지 않아서 재가 흘러나왔다. 국내 광산 노조까지 나서서 항의할 정도였다.

파독 노동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각자의 이유로 고국에 꼬박꼬박 돈을 보냈다. 이들의 땀으로 일궈낸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국민 총생산(GNP)의 2%에 달했을 정도로 당시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이러한 성과를 국가적 성취, 당시 지도자의 업적으로 칭송하는 어이없는 목소리가 아직 들린다.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 국가는 이역만리로 떠난 한국 청년들의 울타리였다기보다 그들이 이겨내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살아남은 이들

파독 청년들에 대해 가난한 국가의 희생양이라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삶의 개척자로 보기도 한다. 당시 파독 광부 합격자 중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람의 비율이 높았던 만큼 귀국 후 사회 고위직으로 진출한 사례가 많다. 대학교수가 된 파독 노동자는 통계상 20명이며 신분 공개를 꺼리는 분위기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파견된 광부는 7936명이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편향적인 시선 때문에 파독 광부 연합회 가입자는 고작 500여 명이다.

파독 근로자 중 60%는 해외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찾았다. 독일로 떠난 간호 인력 중 독일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외교관, 의사 등의 직업을 얻은 사람이 많다.

한국의 세 번째 여성 대사를 역임한 김영희 역시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저 멀리 내가 모르는 넓은 세상에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라는 꿈을 가지고 독일로 떠났다. 3년의 간호보조원 근무 기간에 그는 남자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하며 독일어, 영어, 불어를 배우면서 독일 대학 입학을 준비했다. 갖은 노력 후 퀼른, 하노버, 함부르크 대학 등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75년에 쾰른대학에 입학했다. 철학부 교육학과 내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학부에서 박사학위까지 10년 만에 끝낸 그는 한국 외교부의 독일 전문가로 특별 채용되었고, 마흔의 나이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대사로 임명되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게 된다.

독일에서 병원장을 역임한 박경남은 22살의 나이에 파독 간호사에 지원해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여자가 대학에 가서 뭐 하냐며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게 했어요. 늘 가슴이 답답하고, 한국에서 뛰쳐나가야겠단 생각뿐이었어요. 해방돼 자유를 찾고 싶었지요"라고 말했다. 외과 병동에서 3년을 허드렛일하며 그는 간호사에 머물지 않고 직접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31살의 나이에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함부르크 의대에 합격하여 7년 만에 의사면허증을 땄다.

독일의 병원은 한인 간호사들의 성실성을 높게 샀다. 계약 종료 후에도 기간을 연장해 꾸준히 간호사로 활동한 이가 많다. 당시 한인 간호사에 대한 좋은 인식으로 여전히 독일의 많은 병원은 한인 간호사를 선호한다고 한다.

파독 노동자들이 김영희나 박경남처럼 모두 성공적으로 삶을 개척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당시 얻은 병으로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은 사례도 많다. 광부가 가장 많이 얻은 병은 진폐증이다. 진폐증은 석탄 가루와 돌가루가 폐 속으로 들어가 발병하기 때문에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쉬운 병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얻은 병은 한국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않아 보상을 받지 못했다. 간호 인력 역시 근골격계질환을 앓은 노동자가 많았지만 이 역시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않는다.

권이종에 따르면 파독광부연합회에 가입한 500명 중 상당수가 1년에 1만 원인 회비를 납부하기 어려울 만큼 생계가 어렵다. 2015년, 2017년 그리고 2020년 5월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파독예우법)이 지속적으로 발의됐지만 정부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 박서윤: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3학년.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살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이성적인 사람을 동경하지만, 정작 팍팍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이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가짜鑛夫(광부)수두룩 西獨(서독)파견모집서 드러나, <경향신문>, 1963.09.13., 7면
2) 西獨鑛夫遺骸(서독광부유해) 無言(무언)의 歸國(귀국), <경향신문>, 1965.1.26., 3면
3)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파독광부 45년사 : 1963~2008』,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2009.
4) 권이종, 『교수가 된 광부』, 이채, 2004.
4) 이수길, 『개천에서 나온 용』, 북큐브, 2014.
5) 조경애, 『파독(派獨) 간호사로부터 온 편지』, 가람출판사, 2012.
6) 정재욱, “그 고생을 우리 세대가 겪어서 다행”, <미래 한국>, 2016.07.11
7) 김홍현, 『나는 왜 독일을 선택했나』, 가람기획, 2005
8) 장우성,"사실을, 진실을 보도해주십시오", <한국기자협회>, 2006.11.07.
9) 박주희, ‘동백림사건’ 이수길씨 국가상대로 피해배상 청구, <한겨례>,2006.11.06
10) 박현영, ”병원장이 된 파독 간호사 출신 의사 미라 박“, <중앙일보>, 2010.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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