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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시험) 당일인 3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고등학교에 마련된 수능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다.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시험) 당일인 3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고등학교에 마련된 수능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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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은 마무리됐으나, 늘 그렇듯 이러저러한 뒷말이 나오고 있다. 이의 신청 기간이 지나고 최종 정답이 공지되는 이달 14일이 되어야 비로소 끝이 난다고 말하는 이유다. 수험생 개개인의 인생이 걸린 시험이라는 인식 때문에 수능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국사 영역이 입길에 올랐다. 절대평가인 데다 성적을 반영하는 대학도 많지 않아, 적어도 한국사에 관한 한 출제 오류에 수험생들의 관심이 거의 없었다. 수능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과목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논란의 한국사 20번 문제

이번엔 명색이 고3 수험생을 '무시'했다는 게 발단이다. 당장 한국사 영역 20번 문항이 문제가 됐다. 더욱이 3점짜리 문항이어서 파장이 컸다. 흔히 총 20문항 중에 쉬운 10개는 2점이고, 나머지 어려운 문항 10개는 3점으로 배점된다.

출제된 내용이 낯선 건 아니다. 나올 만한 문제가 나왔다는 이야기다. 해마다 수능의 맨 마지막 문항은 대개 박정희 정권 이후 각 정부의 통일 정책에 관한 내용이 출제되었다. 현대사 부분에서 시대별 대표적인 개혁 정책과 통일 관련 내용은 거르는 법이 없다.

유신 헌법 선포 직전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노태우 정권 때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공동선언이 '단골 메뉴'다. 여태껏 여기서 벗어난 문제는 거의 보질 못했다. 이번에도 남북기본합의서를 다뤘다.
 
2021학년도 한국사 20번 문항.
 2021학년도 한국사 20번 문항.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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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하리만큼 쉬웠다는 게 '옥에 티'가 됐다. 지문으로 제시된 내용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연설문이라는 기초적인 사실을 몰라도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지문 아래 다섯 개 선다 항목 중 나머지 넷이 모두 엉뚱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통일 정책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문제의 요지는 '다음 연설이 행해진 정부의 정책을 고르라'는 것이었지만, 대한민국에 관련된 건 하나뿐이었다. 1번은 흥선대원군 시절, 2번과 3번은 고려 시대, 4번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일이니, 수험생의 눈엔 이게 뭔가 싶었을 거다.

유치원생도 맞힐 수 있다거나 외국인 귀화 시험인 줄 알았다는 조롱이 넘쳐난다. 역사는커녕 상식까지도 필요 없는 말장난이라며, 도대체 수험생의 어떤 지식을 평가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혹평도 잇따른다. 이러고도 출제자는 수당은 챙길 거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이도 있다.

수능 한국사 시험이 쉬운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수업에 충실했다면 중학생들도 너끈히 1등급을 받을 수 있다. 요즘 들어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응시하는 초등학생이 적지 않은데, 그들이 그것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릴 정도인데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아무런 부담이 없는 과목이다. 응시하지 않으면 수능 성적이 산출되지 않으니 치러야 하는 필수영역일 뿐, 여느 과목처럼 긴장하며 공부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더욱이 성적을 반영하지 않는 중하위권 대학에 지망한 아이들은 찍고 자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이들 대다수가 '쉬어가는 코너'로 여길 만큼 한국사 영역 만만한 과목이다. 그렇듯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 분포는 늘 고른 편이다. 대체로 다섯 명 중 한두 명은 1등급을 받는다. 3등급으로 넓히면 수험생 절반을 훌쩍 넘는다. 참고로, 1등급은 50점 만점에 40점 이상이고, 3등급은 30점 이상이다.

워낙 쉬운 데다 나올 문제가 정해져 있어, 출제 유형 파악에 익숙한 눈치 빠른 아이들은 수능 예상 문제를 족집게처럼 뽑아내기도 한다. 해마다 얼추 절반 정도는 적중하는데,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모의고사 때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내기를 할 만큼 익숙하기 때문이다.

수능 한국사 시험, 좀 다르게 하면 어떨까

이번 사달이 아니어도, 고등학교에서 20년 넘게 한국사를 가르쳐온 현직 교사로서 수능 한국사 시험에 할 말이 많다. 절대평가와 함께 쉽게 출제하는 건 올바른 방향 맞다. 여느 과목처럼 상대평가로 줄 세우거나 난이도를 올리는 건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배가시킬 게 분명하다.

애초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되 절대평가로 운영한다는 방침은 학습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취지였다. 점수로 서열을 매기는 순간 역사 교육은 문제 풀이 수업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 불 보듯 환하다. 암기 능력으로 역사적 사고력이 평가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절대평가와 쉬운 시험은 점수나 등급에 대한 부담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즐겁게 역사 공부를 하라는 일종의 '배려'였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 종속된 고등학교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사 수업 시간에 국영수 수험서를 꺼내 자습하는 아이들이 시나브로 늘어났다.

학교마다 고3 교육과정에 국영수와 사탐, 과탐 과목이 아닌 건 아예 배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불가피하게 할당됐다면 대부분 자습 시간으로 운영된다. 수능을 치르지 않는 과목은 멀쩡한 교과서조차 폐지함에 버려지는 처지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사도 딱히 나을 건 없다.

그나마 내신 덕분에 교과서가 버림받진 않았다. 수능에서는 절대평가지만, 내신에서는 여전히 9등급 상대평가로 서열을 매기기 때문이다. 등급을 세분화시키려면 시험을 쉽게 내서는 곤란하다. 특정 점수대에 몰려있거나 동점자가 많으면 성적 처리에 적잖이 애를 먹게 된다.

아무튼, 절대평가와 쉬운 출제 방향에 몽니 부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다섯 개 중 하나를 고르는 선다형 방식이 역사 교육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느 과목과는 또 다르게, 선다형 방식은 난이도와 상관없이 역사를 암기 과목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죄다 암기하자고 하면, 수학 공식은커녕 영어 사전의 단어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한때 변별력을 높인답시고 사건이 일어난 연도를 묻는 등의 시시콜콜한 시험을 겪으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맹목적인 암기만이 역사 공부의 왕도라고 믿는 건, 요즘 아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암기할 내용이 다소 줄었다는 것뿐이다.

요컨대, 우리가 올해 수능 20번 문항을 통해 깨달아야 할 건 정작 따로 있다. 수험생을 모욕한 처사라거나 수능을 희화화했다는 등의 조롱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이를 두고 '정부 눈치를 봤다'는 식으로 곡해한 야당 의원과, '좌파 교육의 증거'라는 한 누리꾼의 지적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망발이다.

수능 한국사 시험을 선다형이 아닌 서술형 방식으로 바꾸자. 점수대로 등급을 내봐야 반영하는 대학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시험인 듯, 시험 아닌, 시험 같은' 과목이 됐다. 선다형의 필요성이 사라진 마당에 서술형으로의 전환은 고등학교의 역사 교육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예컨대, 이번 20번 문항을 이렇게 출제한다면 어떨까. '다음의 글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현재의 남북 관계를 고려하여, 이 연설문이 지닌 의의와 한계를 서술하시오.' 역사적 사고력을 평가하는 데는 서술형이 더 적합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수능 전 영역이 선다형 방식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쉽지 않다는 건 안다. OMR(광학 마크 판독기)가 채점한 선다형 방식의 점수와 등급만이 공정하다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해소되지 않는 한 백년하청일 테다. 교육이 총체적 불신을 받는 상황에서 한가한 소리라며 욕먹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태그:#수능 한국사, #절대평가, #서술형, #선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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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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