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 12:03최종 업데이트 20.12.1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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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때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처럼 1979년 12·12 당시의 정승화 참모총장도 군사정변의 희생양이 됐다. 장도영은 쿠데타를 사전에 인지하고도 방관하다가 쿠데타 정권의 얼굴마담이 된 뒤 숙청된 데 반해, 정승화는 미리 알아채지 못했고 쿠데타와 동시에 곧바로 연행됐다.

정승화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전혀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0·26 사태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게 된 전두환의 월권행위를 정승화 역시 예사롭지 않게 바라봤다.

정승화 vs. 전두환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1979.12.19 ⓒ 연합뉴스

   
정승화는 4년제 정규 과정 출신인 육사 11기 이하보다는 10기까지의 비정규 육사 출신을 중용하는 방법으로 전두환을 견제했다. 또 전두환 개인에게 인사 불이익을 줄 계획도 세웠다. 전두환이 다급해진 데는 이런 요인도 작용했다. 1995년 12월 22일자 <중앙일보> 기사 '전두환·노태우씨 12·12 관련 검찰 공소장 요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79년 11월 중순께 단행된 군 인사에서 비정규 육사 출신들이 군 요직에 배치되고 정규 육사 출신의 하나회 장교들이 배제되자 자신들의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갖게 되고, 12월 초순께 전두환이 잦은 월권행위와 군 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으로 한직으로 인사 조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정승화 총장이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피고인 전두환의 인사 조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자, 피고인들은 전두환에 대한 인사 조치를 차단하고 하나회 소속 장교들의 군내 입지를 보전하기 위해선 군의 주도권 장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후략)"

정승화는 비정규 육사인 육사 5기 출신이다. 항일투쟁인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1929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한 정승화는 상업학교를 거쳐 1947년 7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제5기로 입학하고 이듬해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훗날 육사 5기는 육사 8기와 더불어 5·16 쿠데타의 핵심 세력이 됐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 KCIA 남산의 부장들 >은 "박정희 소장은 육사 8기생들의 '계획'과 '5기생들의 병력 동원'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다"고 정리한다.


육사 5기 정승화는 만 21세 때 한국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공들을 세웠다. 그 뒤 미국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유학하고 1956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서른두 살인 1961년 5·16 때는 12사단 부사단장으로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해 8월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방첩부대장, 제1야전군 참모장,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제3군단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1978년 5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문제의 1979년에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 이때가 그해 2월이다.

10·26 사태로 계엄사령관을 겸하게 된 그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약했기 때문에 10·26 정국 하의 실질적 1인자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는 10·26 당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초청으로 궁정동 안가 식당에 대기하고 있었다. 거기서 사태를 접했기 때문에 김재규와의 연루 혐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수사 책임자인 전두환과 충돌할 가능성을 가진 상태에서 계엄사령관 직을 수행해야 했다.

정승화에게 건넨 2억 원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 연합뉴스

 
그런 속에서도 전두환은 정승화와 친해지려고 시도했다. 수사 중 취득한 청와대 금고 9억 원 중 1억은 합수부 수사비로 남겨두고 6억은 박근혜에게 준 뒤 나머지 2억을 '총장님 쓰시라'며 정승화에게 들고 간 것이다. 당황한 정승화는 돈을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비서실장을 통해 은행에 예치했다. 전두환이 선심을 썼지만, 정승화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밀어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인사 조치로 전두환을 꺾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인 12월 12일 밤 '전두환 군대'가 한남동에 들이닥쳤고, 정승화는 평생 잊지 못할 수모를 겪게 됐다.

그가 수모를 당한 것은 권력을 향한 전두환의 움직임이 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전두환의 거사를 사전에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전두환이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쿠데타군에 끌려간 뒤에도 자신이 쿠데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두환 때문에 자신이 끌려왔으리라고는, 지금쯤 전두환이 실질적 1인자가 돼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수감돼 있는 동안 김재규가 없는 말을 지어내 자신을 모함한 게 아닐까, 전두환이 수사 실적을 세우려고 최규하에게 허위 보고를 한 게 아닐까, 최규하가 뭔가 오해하는 게 아닐까 등등의 생각을 했을 뿐이다. 회고록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서 그는 붙들려 있는 동안에 자신이 했던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처음엔 나도 모르는 사실을, 김재규가 자신이 살기 위하여 나를 끌고 들어가는 어떠한 공모 주장을 하기 때문에 합수본부 측에서 이를 근거로 최 대통령에게 은밀히 보고한 뒤 조사 재가를 받아 저희들 공로로 만들기 위해 수단을 안 가리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노재현 국방장관이 손을 놓고 방관할 리는 없을 터이니 곧 사실이 밝혀지겠지 하고 생각했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데는 정승화의 낙관적 시국관도 작용했다. 쿠데타 같은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 참모총장인 자신의 위상에 대한 믿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의 순수성과 애국심을 믿고 있었다. 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도전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터였다. 내가 부하들에 의해서 체포·구금된다는 것은 더구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군인의 순수성, 군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신임 등으로 스스로 판단컨대 내가 원하지 않는 한(은) 군이 정권에 도전하는 쿠데타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과 18년 전에 쿠데타 성공 사례가 있었고 그 뒤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고 자신도 5·16에 힘입어 승승장구했지만, 정승화는 자기 밑의 전두환이 자신을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데는 전두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업신여김'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2억 원을 들고 온 전두환을 '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 정도로 이해했다.

그는 "나로서는 이러한 것을 바로잡도록 교육하는 것도 군인 생활의 주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고 말한다. 전두환을 도덕적으로 바로잡을 대상 정도로 가벼이 생각한 것이다. 다른 금고도 아니고 상관의 금고를 건드린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은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밤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발생한 총격전을 다룬 13일자 동아일보 호외. ⓒ 동아일보

 
전두환 업신여겼다가

정승화가 전두환을 소홀히 대한 데는 또 다른 요인도 작용했다. 계엄사령관인 그는 전두환 같은 소장파 장군들보다는 정치권의 3김씨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정승화는 유신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따르면, 그는 1979년 11월 24일 육군 지휘관 회의 때도 '박 대통령 서거로 유신의 존립 근거는 없어졌으니 이제는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유신체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가진 또 다른 소신은 '3김씨 역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김영삼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고, 양김에다가 김종필까지 더해 3김이 향후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회고록에서 정승화는 '김대중은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그가 국민 앞에 내세우는 이상은 그럴 듯했지만, 실제로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만 담아두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1979년 11월 26일에는 언론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김대중은 사상이 불투명하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김대중에 대한 기사 쓰기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계엄사령관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영역에 사실상 발을 내디딘 것이다.

정승화는 크게 보면 아군인 김종필에 대해서도 반감이 있었다. 김종필은 육사 8기였다. 박정희는 이들 8기를 이용해 5기를 견제하고, 11기 이하를 이용해 8기를 견제했다. 그래서 5기와 8기 사이에는 마음의 거리가 있었다. 거기다가 정승화는 박정희가 김종필을 소외시키는 것을 보면서 승승장구했다. 박 정권 내에서 정승화가 차지한 기반은 김종필에 대한 견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승화의 눈에는 양김(김대중·김영삼)이 아닌 3김이(김대중·김영삼·김종필) 다 불편한 존재였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사진은 1980년 3월 11일 오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구형 공판에서 검찰관의 논고가 계속되는 동안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경청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모습. ⓒ 연합뉴스

 
정승화는 '유신을 극복하되 3김은 안 된다'는 정세 인식을 갖고 10·26 이후에 대처했다. "군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신임 등으로 스스로 판단컨대" 자신에 대한 군부의 도전이 없을 거라 기대한 그는 3김 견제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법리에도 둔하고 탐욕스럽고 주제넘은' 전두환 같은 '소인배'가 들어올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 소인배는 도덕적으로 바로잡거나 인사 조치로 내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소인배 같은 전두환보다는 지도자급인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움직임이 정승화에게 더 중요했다는 점은, 전두환이 옛 주군의 금고를 훔치는 선에 머물지 않고 아예 세상을 통째로 훔칠 가능성에 대해 정승화가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정승화는 3김을 라이벌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진짜 라이벌은 3김이 아니라 1전(全)이었다. 라이벌을 잘못 설정한 것이 정승화의 파국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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