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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리 세멘꽃 함덕리 어느 골목길에 있던 세멘꽃 ⓒ 신창범
 
'세멘꽃'이 뭐냐구요? 시멘트에 새겨진 꽃을 말하는 거예요. 미장이들이 시멘트를 바르고 굳기 전에 쇠흙손으로 슥슥 그려낸 것이죠. 대략 19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유행하던 일종의 민중미술인 셈입니다. 

세멘꽃이란 이름은 그냥 저와 제 지인들이 붙인 겁니다. 딱히 부를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가끔 이 꽃들을 찾으러 다닙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말이죠. 그렇게 찾아다닌 지 벌써 10여 년 세월이 되어가네요.  

미장이가 아무리 솜씨 자랑을 하고 싶어도 주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그려놓을 수는 없을 터이고, 그려 넣을 당시를 회상하는 노인들은 일종의 서비스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더군요. 솜씨 좋은 미장이를 만나거나 마음 좋은 건물주를 만나면 꽃이 만들어지는 것이랍니다. 솜씨 좋은 미장이가 주인한테 서비스로 만들어 준, 쓱쓱 그려낸 이 아름다운 세멘꽃들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에도 시멘트를 마감재로 사용하지만 이런 그림을 그리는 미장이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멘꽃은 유독 제주에 많이 남아 있어요. 그건 아마도 제주가 아직은 다른 여타 지역보다 개발의 바람을 덜 받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최근 상황은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제주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핫플레이스로 각광받는 곳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개발 광풍에 과거의 흔적들은 남아나는 것이 없지요. 코로나19도 제주의 개발 바람을 잦아들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시멘트 바닥에 남겨진 걸작 
 
함덕리 세멘꽃 함덕리 한 폐가의 현관 바깥 바닥면에 그려진 세멘꽃 ⓒ 신창범
 
처음 이 꽃을 보았을 때 굉장한 전율감을 느꼈더랬죠. 붓으로 그린 것도 아니고 굳기 전의 시멘트에 이런 멋진 꽃을 만들다니요. 집 현관문 댓돌이 놓일 자리를 시멘트로 마감하고 그려넣은 것이죠. 그러니까 벽이 아닌 바닥에 그려서 더 섬세한 표현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동안 세멘꽃을 찾아다니며 이만한 작품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이제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조천리 세멘꽃 조천리 폐가의 정면 우측 벽에 그려진 꽃 ⓒ 신창범

참 소박한 그림입니다. 대지 위에 꽃과 풀들을 그려 놓았지요. 마치 초등학교 교과서 삽화에 나온 그림을 보는 듯 하죠. 실제 그 그림을 보고 그렸는진 모르겠습니다. 추정을 할 수밖에 없는 건 그린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예요. 세멘꽃의 거의 대부분은 작자미상입니다. 
 
고성리 세멘꽃 제주 애월읍 고성리의 오래된 건물에 딸린 야외 수돗가 벽면에 그려진 세멘꽃 ⓒ 신창범
 
제주의 산간마을엔 양반들이 살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격식을 갖춘 양반의 옷차림을 하고 제주의 습하고 더운 여름을 견뎌내려면 해안가보다는 아무래도 선선한 산간이 살기에 더 적합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주엔 중산간 마을들이 제법 있습니다. 이런 중산간 마을에서 만나는 세멘꽃은 마치 문인화를 보는 느낌을 줍니다. 음각과 양각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그린 이 꽃은 소박하지만 나름의 품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도리 세멘꽃 제주 구좌읍 하도리의 지붕 용마루 장식 세멘꽃 ⓒ 신창범
 
하도리의 어느 낡은 집 슬레이트 지붕 용마루에서 발견한 세멘꽃입니다. 건물의 벽이나 담벼락, 굴뚝, 창고문의 문턱 아래 등등 정말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릴 곳들에 그려져 있지요. 보시다시피 지붕이 매우 낡아 곧 사라질 위기죠. 아니나 다를까. 한두 해 지나고 다시 가서 보니 지붕을 교체했더군요. 
 
함덕리 세멘꽃 함덕리에 있는 고택 대문 안쪽 벽에 그려진 세멘꽃 ⓒ 신창범
 
세멘꽃 찾아다니다 보면 가끔 이렇게 전문 미장이의 솜씨가 아닌 작품들도 만나게 됩니다. 대개는 집주인의 솜씨자랑이죠. 시멘트를 바른 품새도 그렇고 꽃도 투박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현무암 돌담과 나무 대문 사이에 피어난 이 꽃의 천진난만한 아름다움은 한참 눈을 못 떼게 만들죠.   

동쪽과 서쪽의 세멘꽃은 어떻게 다를까 
 
세화리 세멘꽃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 어느 고택 벽면에 그려진 세멘꽃 ⓒ 신창범
 
토질이 척박한 제주의 동쪽마을 사람들에겐 아름다운 꽃과 풍성한 열매가 귀한 것일 듯해요. 한 집 건너 이런 양식의 장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그냥 돌 사이에 시멘트를 이겨 넣는 것보다 좀 더 많이 써야 하죠. 그래서 패턴의 다양성이 나타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주의 동쪽과 서쪽이 많이 달라요. 서쪽은 토질이 비옥하거든요. 어떻게 다를까요?
 
덕수리 세멘꽃 제주도 안덕면 덕수리 고택의 벽면을 장식한 세멘꽃 ⓒ 신창범
 
꽃은 어린 아이의 그림처럼 소박하지만 시멘트와 제주 현무암을 이용한 패턴은 굉장한 세련미를 보여주죠. 제주의 서쪽마을 사람들은 땅에서 나오는 소출보다는 바다에서 건지는 풍성함을 더 선호한 듯합니다. 제 눈에 이 패턴들은 뿔소라, 해삼, 전복들처럼 보이니까요.  
 
함덕리 세멘꽃 함덕리 어느 폐가의 부엌 한 켠에 그려진 세멘꽃 ⓒ 신창범
 
함덕은 제주의 유명한 관광지죠. 함덕 서우봉 해변을 따라 해안가는 개발광풍에 휩싸여 있지만 마을 안쪽은 오래된 집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 폐가의 부엌에서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석에 피어 있는 이 꽃을 발견했습니다.

집도 그리 크지 않고 살림살이도 변변치 않았을 것 같은데 매우 아름다운 꽃이 있다니요. 추측컨대 미장이의 집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힘든 부엌일 하는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그려 넣은 것이라고 단정지어 봅니다.      
 
함덕리 세멘꽃 제주도 함덕리 바닷가의 작은 창고 벽면에 그려진 세멘꽃 ⓒ 신창범
 
부엌에 그려진 세멘꽃과 그리 멀지 않은 바닷가 창고 건물엔 고개 숙인 세멘꽃이 있습니다. 고단한 미장이 자신의 삶을 오롯이 보여주는 느낌입니다. 이런 그림들을 남긴 사람들 중에는 재능은 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서 꽃도 못 피워보고 사그러든 인생들도 있겠다고 보여집니다.

10년 세월을 세멘꽃 찾아다니며 참 다양한 꽃들을 만났습니다. 안타까운 건 이 세멘꽃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거죠. 

지도에 표시를 하고 근처에 갔다가 반가운 마음에 다시 찾아가 보면 아뿔싸! 집은 헐리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세멘꽃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경우도 참 많습니다. 이런 꽃을 가진 집주인들에게 늘 말합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작품이니 만약 헐게 되면 따로 떠내서 보존하세요."
"직접 하기 힘드시면 저에게 연락을 해 주시면 보존할 방법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세멘꽃을 찾아다니는 트래킹은 제주올레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죠. 올레길 걷기는 목적중심적인 반면에 세멘꽃 탐방은 그야말로 과정 중심적이고 상당히 섬세한 눈길을 요구합니다. 

세멘꽃 탐방은 어디에 있을지 모를 꽃들을 위해 정해진 코스 없이 하나의 마을을 세밀하게 뒤져나가는 방식이거든요. 그러다가 꽃 하나를 찾아내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보존할 묘책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태그:#제주도, #세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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