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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말할 시간>(창비 펴냄)은 한 십 대가 어린 시절에 겪은 성추행을 스스로 극복해 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만화다.

은서는 늘 혼자였다. 엄마는 이혼 후 양육비를 전혀 주지 않는 아빠를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놀이터에서 함께 놀던 아이들이 저마다 엄마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간 후 혼자 놀고 있던 은서는 낯선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그럼에도 엄마는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누구에게든 말하면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학교가 끝난 후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집으로 돌아오던 은서는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한다. 누군가 지나가며 스치듯 엉덩이를 만진 것. 눈 깜짝하는 사이 일어난 이 일로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더욱 도드라져 떠올라 괴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9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 
 
<비밀을 말할 시간> 책표지.
 <비밀을 말할 시간> 책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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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이. 낯선 사람을 따라가다니. 제정신이야? 엄마가 금방 온다고 했어야지. 왜 엄마는 가게에 일하러 갔다고 했어? 아니, 애초에 왜 늦게까지 혼자 놀이터에 남아 있었던 거야? 왜 달아나지 않았어? 왜 싫다고 말하지 않았어?(…)결국은 다 내 탓인 것 같다.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자꾸 생각이 난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더 명랑한 사람이 되었을까. 이런 고민은 안 하고 있겠지. 나는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죽어버릴까?' - 105~111쪽

유치원 때 당한 성추행의 기억은 9년이 지난 지금까지 은서를 괴롭히는 악몽이었다. 그런데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이젠 신고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다. 그렇게라도 벗어나고 싶은 기억이다.

엄마에게 이제라도 말할까. 그런데 엄마는 여전히 고단하게 살고 있다. 그나마 친한 친구를 떠올려 본다. 선생님께 상담해볼까도 생각해 본다. 그러나 포기하고 만다.

성추행당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끝없이 자책하고 심지어 '죽을까?' 생각까지 하게 된다. 엄마에 대한 원망도 더욱 커져만 간다.

급기야 어린아이 손을 잡고 가는 남자들이 자신에게 끔찍한 짓을 한 그런 남자로 보이거나, 금방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자책과 복수심, 원망과 후회와 두려움의 문턱들을 지나 우리 내면에 묻혀 있는 '괜찮다'는 감정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비춰 주는 따뜻한 빛이 필요하다. <비밀을 말할 시간>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빛이 될 것이다." - 최진영(<이제야 언니에게> 작가) 추천사

"어릴 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폭력의 피해자가 겪는 힘듦에 공감한 경험이 늘어날 때 가해는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폭력을 자랑할 수 없는 사회가 되는 데 이 만화는 힘을 보탠다." - 송승훈(광동고 국어교사) 추천사

은서가 사려 깊고 용감한 친구와 돈 보다 누군가의 아픔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의사를 만날 수 있어서, 그래서 이제라도 위로받고 극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은서에게 세상 누구보다 중요한 은서 엄마가 피해자인 은서부터 탓한 잘못을 빨리 알아차리고 은서를 따뜻하게 안아줘서 다행이다.

은서가 길게 내리고 다니던 앞머리를 시원하게 빗어 올리고 멋을 내는 아이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어서 기쁘다. 청소년기를 무탈하게 보내고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본다.
 
은서처럼 혹은 왕따로 힘든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은서처럼 혹은 왕따로 힘든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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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성추행) 관련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다루지 못하고 마음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칫 암울하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그런 주제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아야만 하고 적극적인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화로 이야기해줘 반갑고 고맙다.

더욱 고마운 것은 성폭력 그 후 대처 방법까지 청소년 입장으로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이겠지만 말이다.

이 만화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하지만 성폭행 사건이 왜 끊임없이 일어나는지, 어린 딸들을 위해 기성세대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피해자를 어떻게 도와주고 위로해야 하는지 등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성폭행 근절을 위해, 그리고 은서처럼 아픈 아이를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비밀을 말할 시간

구정인 (지은이), 창비(2020)


태그:#성폭행, #구정인(만화가), #눈으로 만든 사람(최은미), #창비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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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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