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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전 기사 '세일즈 외교관', '영국의 에이전트'... 이동인의 또다른 이름에서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지난 번에 우리는 이동인 스님이 1880년 7월 19일 영국의 에이전트가 되는 대목을 보았습니다. 헌데, 바로 전날 사토우의 한 줄 일기가 퍽 인상적입니다. 여기에서 아사노(Asano)는 이동인입니다(이동인 스님은 실명을 숨기고 가명을 쓰고 있음).
 
"아사노가 요근래 매일매일 와서 정치를 이야기하고 풍량전風梁傳이라는 한국어 소설을 읽는다. Asano has been coming every day lately to talk politics and read Korean, a novel called 風梁傳."
 
이동인이 사토우에게 매일 찾아와 정치를 이야기했다는 대목은 주목할 만합니다.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텐데 일기에 내용을 기록해 놓지 않아 퍽 아쉽군요. 하지만 지난 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사토우는 이동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별도의 공식 문건을 만들었는데 그를 통해 우리는 이동인이 영국의 대조선 관계 수립을 적극 권유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동인은 사토우의 조선관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조선어 원어민 교사로서 영국 외교관의 조선어 및 조선 문화탐구에 큰 역할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토우가 동료 외교관 아스턴(Aston, 고베 주재 영사)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가 그런 정황을 증언해 줍니다. 이 편지들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 일부를 소개합니다. 1차 사료로서 가치가 좀 있지 않을까 싶군요(괄호 속은 옮긴이의 말).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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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7월 19일자 편지

친애하는 아스턴,
 조선어 소설책들을 그토록 신속히 보내 주어서 일천 번 고맙소.  te ni woha(oo우화?)에 적어준 주석도 너무 고맙소. 지극히 유익하오. 앞으로 언젠가 그대가 그것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했으면 좋겠소. 그러면 조선어 붐을 일으킬 게요.

그토록 많은 페이지를 애써 복사하여 보내주니 또한 정말 고맙소. 아직 나는 오페르트의 책(조선어 학습서)을 읽어 보지는 않았소. 그러나 그게 엉터리라는 말이 전혀 놀랍지는 않는군요. 로스Ross(조선어 학습서를 지음)의 철자법은 매우 큰 장애물이오. 나는 조선 친구(이동인을 말함)와 함께 풍락전風楽傳을 시작했다오. 그게 덜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대의 주석이 도움이 된 것 같소. 조선어와 일본어의 구조가 잘 호응한다는 사실이 지극히 흥미롭군요.

이달 말 그 조선인을 놓칠 것 같군요. 자기 나라로 돌아간답니다. 그이 편에 그대 앞 편지를 한 통 보내겠소. 그가 그대을 위해 사람 하나(조선어 원어민)를 구해보겠다고 약속했다오. 정말 그렇게 될 겁니다. 그는 틀림없이 이 해가 가기 전에 여기로 돌아올 겁니다. 그때 책을 몇 권 더 가져올 거라 기대합니다. 책 살 돈을 그에게 주어야겠어요. 그는 내게 문장들의 차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 고전들을 한글로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틀림없이 도움이 되겠지요. ……한자는 일본보다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훨씬 더 널리 쓰이고 있는 것 같군요.

8월 4일자 편지

친애하는 아스턴,
...여태 내가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는 자신을 아사노朝野라고 자칭합니다. 아사노는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 올 겁니다. 그에게 그대의 조선어 선생 구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교토의 동본원사에 매우 지적인 젊은 친구(탁정식 스님을 말함)가 있다고 하는군요.....

 
8월 7일자 편지

친애하는 아스턴,
.......지금으로선 조선에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군요. .....나는 조선에 대해 무력을 행사하는 건 상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 건 외국의 공격은 조선인들에게 소용이 없었던 것 같소. 만일 우리가 신사적인 방법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나는 확실히 지지할 겁니다. 현재로선 틈새가 안 보이는 군요. 아무튼 그 나라가 언젠가 개방된다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거구요. 그래서 그 나라 말을 미리서 알아 둘수록 그만큼 더 좋겠지요.

한자를 모르면 조선어 공부가 지극히 어려워요, 아니 불가능하다고 해야겠네요. 나는 양운전梁風傳을 뗐고 지금은 아사노와 함께 황운전黄雲傳을 읽고 있어요. 황운전은 이제 겨우 두 권 째인데 전편에 비해 한자로 가득 차 있군요. 이걸 부녀자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사노는 그 스타일이 양풍전보다 낫다고 하는군요. ……아사노가 떠나기 전에 그와 최대한 많이 읽어야겠기에 그렇게 하는 중입니다… (끝)
 
한국의 독자들여, 이 편지들 흥미롭지 않나요. 여기 등장하는 조선어 소설 <풍량전>, <풍락전>, <양운전>,<황운전>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한국인도 모르는 고전소설들을 영국 외교관들이 이동인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가며 열공하고 있는 모습이 흥미롭지 않나요? 

사토우와 아스턴은 서방 외교관 중에서 한국어 공부의 선구자들입니다. 제대로 된 학습교재도 없고 한국인도 접촉하기 어려운 극히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처럼 한국 소설을 공부하고 있었다니 놀랍지 않나요? 사토우는 조선어 소설을 비롯한 문헌들을 꽤 수집했는데 그게 지금 영국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거예요.

이 편지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동인 스님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한국어 원어민 교사였던 셈입니다. 그는 또한 조선의 역사. 문화를 가르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민간외교관으로서 문화 외교를 수행한 것이지요.

한편 사토우는 당시 영국공사관에서 유일한 조선통이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의 대조선 정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대조선관 형성에 이동인 스님이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합니다. 이동인은 사토우에게 영국의 무력 사용을 넌지시 떠본 적도 있었는데 그 후 어떻게 대화가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의 편지에서 보듯이 사토우는 무력행사를 반대했습니다.

사토우는 왜 무력 사용을 강하게 반대했을까

이 대목은 곱씹어 볼 만합니다. 이는 당시 영국 외교가의 일각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옵션을 저울질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사토우는 왜 무력 사용을 이처럼 강하게 반대했을까요? 사토우는 당연히 예전 프랑스와 미국의 대조선 무력 침공이 실패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토우는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학자 외교관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조선에 대해서 깊은 우호감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기억하세요? 사토우는 1877년초 일본내 조선인 도자촌 방문을 통해 조선의 도자기에 경탄했고 그곳의 조선인들과 좋은 시간을 가졌던 일이 있었지요. 다음 해 초 그는 조선 도자기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지요. 그런 연장 선상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이동인이라는 특출한 인물로부터 조선의 글과 문화를 배우고 또 친교를 나누면서 영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지한파/친한파가 되었던 것이죠.

사토우로서는 이동인을 영국의 에이전트로 삼아 조선과 관계를 터볼 궁리를 하고 있던 터라 포함외교를 더욱 반대했겠죠. 사토우는 이동인을 통해 조선에 접근하려 하고 이동인은 사토우를 통해 영국에 접근하려 했던 셈인데 그건 막연한 구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 돌아간 이동인은 대영수교를 홀로 주장하다가 배척을 당하고 암살을 당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죠.

여기에서 잠깐, 미국이 조선에 무력을 사용했던 일을 되돌아 봅시다. 한국인들이 '신미양요'(1871)라고 부르는 한미간의 소전쟁에는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숨겨져 있어요. 다름 아니라, 미국과 일본간에 긴밀한 군사 협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어쩐 일인지 이 사건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군요. 내가 보기엔 의미심장한데... 

전말은 이렇습니다. 1871년 4월 말 우리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 제독은 조선 출정에 앞서 일본의 협조를 얻으려고 도쿄를 방문하여 메이지 '천황'을 예방했습니다. 로저스 제독은 메이지에게 '공식문서'를 제시하면서 조선원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당시 일본 병무성에서 고문으로 일하고 있던 호스(A.J.S. Hawes)를 통해 일본정부에 조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일본이 협조해주면 일본인 정보요원을 미함대에 동승시켜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제안을 내심 반겼습니다.

한편 요코하마에는 브룩(J.H.Brooke)이라는 미국 정보원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도 로저스 사령관을 수행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외상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측을 이렇게 유인합니다.
 
"본인은 아시아 함대에 동승하여 조선에 대한 정탐여행tour of observation을 수행할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자료를 수집하게 되면 특별보고서를 작성할 것인데 한 부를 일본정부에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조선에서 조미전쟁이 발발할 경우-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다-양국 병력의 비교, 전쟁에 사용한 무기의 종류, 그리고 조미간 실제 작전수행의 실상 등에 대한 정보 파악은 귀국 정부에도 대단히 중요한 필요사항이라고 여겨집니다.

일찍이 일본은 조선과 교전한 일이 있었고(임진왜란), 또한 일본은 한반도 남단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조선의 정치상황,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의 규모, 전쟁에서 사용한 병기의 종류, 그리고 혹시 일본을 급습할지도 모르는 조선의 함선척수 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일은 귀국의 국가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을 겁니다."

달콤한 러브 콜에 일본은 기꺼이 화답합니다. 즉시 안토라는 군사정보원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합니다. 그리하여 안토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향도역 겸 군사정보 수집요원으로서 로저스 사령관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나가사키를 우리 아시아함대의 군사기지로 제공합니다. 그리하여 미 아시아함대 전병력이 5월 초 나가사키항에 집결합니다. 그곳에서 로저스 제독은 보름 동안 실전을 방불케하는 해상 기동훈련을 실시합니다. 5월 16일 미 군함 5척, 함재 대포 85문, 총 병력 1230명이 나가사키 항을 벗어나 조선을 향해 출동합니다. 

그때 우리 미 해군 사이에는 이런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합니다. 즉, "조선민족은 부유하며,  체격은 장대하고 힘은 헤르쿨레스Hercules와 같은 괴력을 가졌고, 용맹함은 호랑이 같으며, 총기는 최신형이며 사격술은 그 옛날 윌리엄 텔만큼 백발백중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군의 병기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틸턴(McLane Tilton)대위는 <강화도 참전 수기>에서 "나는 조선 요새지에서 끔찍한 장면을 보았다. 조선군 몇 사람이 불에 새까맣게 타 버린 채 근처에 떨어진 9인치 포탄의 폭파로 시체가 산산조각 나기도 했다. 그들이 입은 흰 옷에 붉은 피가 물들어서 붉은색과 흰색이 너무나 두드러진 대조를 보였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최대 격전지 광성보 일대에는 조선군 243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옷에 불이 붙은 채 해협으로 뛰어내린 병사의 시체가 100여구 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군 전사자는 총 350명, 부상자는 20명이었습니다. 반면에 미군은 전사자 3명, 중상자 5명, 경상자 5명에 그쳤습니다. 이처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조선인의 희생이 컸지만 조선군의 용맹만큼은 전설처럼 퍼졌습니다. 슬라이(Winfield Scott Schley) 소령은 조선군의 용맹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원정대가 출항하기 전에 나돌던 숱한 소문들과는 딴판으로,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을 한 자루도 소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승총(jingalls)과 같은 몹시 노후화된 병기로 근대적인 무기에 훌륭히 맞섰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웠다. 영웅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진지를 사수하다가 전사했다. 어떠 나라의 장병도 고국을 위하여 이보다 더 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Contrary to all rumors before the expedition sailed, there was not a modern gun of any description found in the hands of the Koreans, who attempted with gingalls and such-like superannuated arms to face modern artillery successfully. They fought, however, with desperate courage, until they were overwhelmed, and died at their posts of duty heroically and without fear. The men of no nation could have done more for home and country." - Winfield Scott Schley의 회고록, <Forty Five Years Under the Flag>)p.95

나 조지 포크는 이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해인 1872년에 해군사관학교를 입학하였기 때문에 장렬하게 전사한 조선군에 대한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나에게 조선에 대한 호기심이 싹텄던 것 같기도 하군요.

그 사건은 애꿎은 조선인만 희생시키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버린 뼈아픈 실패작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저마다 자국이 승리했다고 큰 소리쳤지만 공허한 소리일 뿐입니다. 미국과 조선은 이 전쟁으로 아무런 소득없이 서로 깊은 상처를 주고 받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큰 이득을 취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그들은 홍수난 흙탕물에 손을 넣어 붕어를 잡듯이 이익을 낚아 올렸습니다. 미국의 조선원정을 조선공략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지요. 안토라는 군사정보원으로 하여금 로저스 제독을 수행시켰기 때문에 일본은 한미전쟁의 전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수집한 정확한 정보를 활용하여 일본은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조선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거지요.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최초의 한미전쟁은 이처럼 우리 미국이 일본과 손잡고 코리아를 희생시킨 첫 사례라는 점에서 그 함의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패턴이 역사속에서 반복되었음을 설마 한국인들이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즉, 신미양요로부터 34년 후인 1905년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조선을 일본의 손에 넘겨주었고. 또 그로부터 40년 후인 1945년에는 코리아가 해방을 맞았지만 전범국 일본은 분할하지 않는대신 되레 피해국인 한반도를 분할함으로써 일본 중시.코리아 희생의 패턴이 반복되었지요.

이렇게 보면 코리아를 희생시키는 미.일공조는 그 역사가 길고도 반복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어서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던 나 조지 포크에겐 이러한 역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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