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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6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보았다.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다. 감동과 재미도 있고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본방송을 못 보면 틈나는 대로 재방송을 챙겨 보는 애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제88회는 '담다' 특집이었다. 몇 사람의 출연자 중, <요리는 감이여>라는 책을 출간한 두 할머니 작가가 나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경험을 풀어놓았다. 특히 주미자 할머니의 얘기는 가슴이 아팠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그 말 

어릴 적 부모 형제를 일찍 여의고, 고아가 되면서 절에서 인생의 절반을 다 바쳐 살았다. 훨훨 날고 싶어, 이제는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어, 스님에게 '나 좀 놓아 달라'고 했다는 말, 글을 몰라 가슴 터지게 답답했다는 말, 절에서 사는 동안 '잠을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말. 그런 말끝에 내보인 손을 보고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손이 저렇게 되도록 일만 하게 했을까 싶은 마음에 화도 났다. 할머니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손이 다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 조금의 관심이 있었더라면,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 석 자라도 쓸 수 있게 도왔더라면, 한 여성의 부족한 잠에 대한 소박한 바람을 들어줬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뒤늦게 배운 글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적으며, 절에서 배운 요리를 입말로 기록해 책으로까지 출간하게 된 주 미자 할머니의 인생을 보면서,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하셨는데, 부디 남은 날들 할머니의 삶이 편안했으면 하고 바란다.
  
주미자/ 동동동 식혜
 주미자/ 동동동 식혜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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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감이여/51명의 충청도 할매들
 요리는 감이여/51명의 충청도 할매들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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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이의 울음 소리

울고 웃다가 방송이 끝날 무렵, 나는 문득,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19년 전의 일이다.

한 통의 집 전화를 받은 것은 늦은 봄 오후였다. 목소리가 장년의 여성이었는데, 독서회 문집에 실린 글을 읽고 전화했다면서, 조심스럽게 통화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문집의 글은 공지영 작가의 <봉순이 언니>를 읽고 쓴 독후감이었다.

간략하게 독후감의 내용을 살펴본다.
 
'60~70년대를 살아낸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당시 농촌과 도시빈민들의 삶이란 것이 그랬다. 주인공 봉순이언니로 표현한 한 개인의 불행한 삶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는데, 특별한 계층을 제외하고 대체로 비슷비슷했던 가난의 형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밭머리 바라보듯 뭔가 어수선한 열망 같은 것으로 들떠 있던 사회와 시대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봉순이의 삶 역시 그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희생하듯 살아낸 삶이다. 봉순이는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도시로 상경한 수많은 소녀 중 하나다.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상실한 식순이, 어린 공단 근로자, 시내버스 안내양 등 사회의 밑바닥을 받쳤던 사람 중 하나였던 것.

언제나 주인집의 문밖을 서성거리던 봉순이 언니. 당차게 문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같은 초조함과 절망이 상처로 붙어 있었고, 자신을 어디에도 정착시키지 못하는 고아 의식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그때는, 있는 집 아이나, 그렇지 못한 아이나, 푸근하게 기댈 따뜻한 둥지가 없었다. 급격하게 변화의 바람이 부는 사회로 내몰린 부모 밑에서, 함께 휩쓸리는 기분으로 살았으니까. 소속감을 잃은 그녀가 느꼈을 불안과, 결핍을 딛고 어디서든 잘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상처는 말이 아니라 따뜻한 연민으로 치유된다는 것을, 봉순이 언니의 아픔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는 깊은 눈으로 응시해야 한다.'
 
전화 속 육십 대 후반 정도의 여성은, 마치 자신이 살아온 삶인 것 같아서, 너무나 똑같아서, 내 얘기 같아서, 이렇게 낯선 사람한테 전화하게 된 것이라고 울음을 터뜨렸다. 격하게 우는 그분의 울음을 들으며 나는 그저 수화기만 들고 있을 뿐이었다.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까 봐, 이름이나 주소를 써야 할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았고, 부득이 관공서나 은행에 갈 때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갔다는 말을 듣고는 나 역시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함께 울고 있던 내 모습을 보고 퇴근해서 들어오던 남편이 놀라 전화기 옆에 잠자코 앉아 있었던 모습까지 고스란히 떠오른다.

다행이 내게 전화할 즈음에는 가족의 도움으로 이만치나 글을 읽게 되었다고 했다.

"상처는 연민으로 치유된다는 글에서 전화기를 들었어요. 마치 나를 보고 하는 말 같았거든요. 고마워요."

나는 이런 분을 곁에 두고 싶었고, 뭔가 조금의 도움, 즉, 말이라도 들어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에 연락처를 받고 싶다고 했는데, 그분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당신의 오랜 푸념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언제 어디서든 내 글을 열심히 찾아 읽겠다는 말을 남기며 전화를 끊었다. 이름도, 정확한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그분이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생각이 나면서 울컥, 그립다.

내가 쓰는 글의 무게  

나는 그때 알았고, 깨달았고, 반성했다. 글이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 한 글자, 한 문장, 글을 쓸 때마다 얼마나 정성스럽고 진정성 있게 써야 하는가를, 글이란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그분은 잘살고 계실까? 맘껏 읽고 사실까? 어쩌면 읽고 쓰는 삶을 살고 계시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주미자 할머니처럼 뒤늦게 배움과 앎이라는 자유의 날개를 가지고 남은 인생을 풍요롭게 살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처를 보듬고자 했던 가족들이 있었다고 하셨으니.

나는 잘살고 있는 것일까? 이토록 간절하고 치열하게 사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은데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이 지향하는 지점은 어디인지 이번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시청하면서, 아니 주미자 할머니의 삶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내 글은 진정성 있는가. 나를 향한 것인가, 타인을 향한 것인가. 내 만족에 그치는 사적인 글은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 시간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나는 앞으로도 쓸 것이며, 내가 쓰는 글이 최소한 나를 기만하지 않는 글이어야 한다는 다짐을 얻은 것이다.

새로운 한 해가 내 앞에 있다. 내가 디뎌야 할 시간이다. 나를 잊지 않고, 잃지 않고, 씩씩하게, 건강한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을 담고 싶다.

태그:#상처는 연민하는 마음, #글의 책임감, #유 퀴즈 온 더 블럭, #건강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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