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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혜영(吳慧泳),오회영(吳澮泳),오재영(吳哉泳),오준영(吳晙泳) 등 이름이 다양한 만큼 일제의 눈을 속이며 항일운동을 하였다.
▲ 오택의 사진 오혜영(吳慧泳),오회영(吳澮泳),오재영(吳哉泳),오준영(吳晙泳) 등 이름이 다양한 만큼 일제의 눈을 속이며 항일운동을 하였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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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오택이 명진학교의 3학년이 되었다. "초봄부터 금주(禁酒) 단연(斷煙) 운동이 시작되고 초여름부터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서 맨발로 통학을 하며, 짚신 대금을 모아 헌납하기를 수개월 하였다. 여름 방학 중에 안창호 선생의 지방순회 강연회에서 열열한 시국강연을 듣고 감격하였다. 학기 말에 한문 선생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통곡'을 낭독하였다. 눈물을 흘렸다. 그해 가을 부산초량사립학교에서 동래군학생연합회를 개최하고 즉석에서 경남학생연합회를 발기하고 위원 중 조학래(趙學來), 추한식(秋翰植) 두 사람을 각 군에 파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이기 때문에 기억의 오류가 일부 있는 듯하다.

부산항초량사립학교는 1905년 신축하였는데, 그 땅의 절반이 밭이고 또 절반은 묘지였다. 학교 건축비가 5천여 원이었지만 모금한 기부금이 1500여 원에 불과해서 초량동중(草梁洞中)에서 부담하였지만 학교 경영의 곤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또 학교 인근에 시신 안치소가 있어 악취로 인해 고통을 받았지만, 학생 130여  명이 공부하였다는 신문 기사가 있다. 1906년에 설립된 사립초량소학교는 1908년 초량사립학교로 설립되었다.

초량학교는 초량의 유지들에 의하여 설립되고, 박영길 교장에 의하여 운영되어 왔으며, 처음은 남자만을 교육했으나 초량부인회의 후원으로 여자부도 설치하였다. 남자부는 1912년에 폐쇄되어 학생들은 입학시험을 거쳐 부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초량학교의 부지는 부산공립보통학교의 여자부 분교장으로 인계되었다. 부산초량사립학교 출신으로 허정(1896~1988)이 있다. "나는 8세 때 초량사립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14세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 학교는 갑신정변의 주역의 한 사람인 박영효 선생을 따라 개화운동을 벌이던 최유붕(崔有鵬) 선생이 교육 구국의 큰 뜻으로 사재를 기울여 세운 학교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허정은 해방 후 교통부장관, 서울시장 등을 거쳐 4・19 혁명 후 국무총리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지낸 인물이다.

현재 동래군학생연합회와 경남학생연합회와 관련한 기록은 오택의 것이 유일하다. 당시 초량은 일본인 거류지역인 왜관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에 일본인과 한국인의 충돌이 발생하고 또한 일본의 문명을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만큼 친일과 반일의 공간이기도 했다. 부산초량사립학교에서 결성된 경남학생연합회는 당시 학생들이 국권회복 운동을 하기 위한 단체로 볼 수 있다. 오택은 나이에 비해 사회‧정치‧학생 운동에 대해 일찍이 관심이 많았다. 이는 그가 남보다 긍정적인 가정환경에 자랐기 때문일 수 있다. 당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은 대부분 부유층 자제가 많았다.

1910년 최천택의 부친 최차구(崔此球)도 사망했다. 먼저 아버지를 보낸 경험이 있는 박재혁은 최천택과 동질감을 느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외동아들이었던 두 사람의 친밀감은 다른 친구들보다 더 높아졌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최천택은 후일 박명진의 동래일신여학교(1927, 동래여고 2회 졸업) 학적부에 보증인으로 '상업에 종사하는 숙부 최천택'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만큼 가까웠다. 또 최천택은 1945년 해방 직후 박재혁의 모친 이치수까지 모시고 있었다. 박명진은 훗날 "오빠와 소정(蘇庭, 최천택)은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어요. 두 분이 외동아들인 데다 생각하는 것마저 같았으니까요"라고 하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동질감을 느꼈다.

사립명진학교에서 경남학생연합회 활동을 하다 
 
현재의 사상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명진학교에 대한 기록은 미군 주둔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없다.
▲ 사립명진학교 석주 기념비 현재의 사상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명진학교에 대한 기록은 미군 주둔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없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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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의 친구 중에서 오택은 좌천동 정공단으로 이사 오기 전에 부산 주례에 거주지를 두고 활동하였다. 오택은 1908년 4월 1일 부산진좌천학교(개성학교 분교) 1학년 입학하였다. 오택은 2학년 때 부산부윤 한치유(韓致愈)의 각면 유세(遊說)에 의하여 설립된 동래 사상면 괘법에 있는 사립명진학교(현, 사상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당시 100여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20세 이상이었고 3~4학년은 중학 정도의 속성교육이 되었다. 교원은 대개 경성에서 초빙하고 체조는 군대식이었다. 가을에 동래군 28개 학교 연합대운동회가 동래 만년대에서 열려 수천 명의 학생이 보무당당하게 열 지어 들어오니 신흥 국민이 된 느낌이 들었다.

1908년 4월에 개교한 사립명진학교는 학교에 입학할 아동들은 지금까지 길게 땋고 다니던 머리틀을 동리 노인과 친척들을 모신 맢에서 선조에 고유(告諭)한 다음 북향사배(北向四拜)를 하고 단발식을 거헹하였다. 단발된 긴머리틀이 땅에 떨어질 땐 섭섭한 눈물을 아동들은 흘렸다고 한다. 1910년 8월 당시 교장은 괘법동의 지양윤(池楊潤), 교감은 감전동의 조우식(趙宇植)이었고, 교사인 지양윤, 조우식, 양윤백 등이 열심히 교육하고 가산을 투자하여 학생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 모라동 박기채, 괘법동의 백낙호가 각 1백 환을 기부하여 권학하였다.

부산 사상 지역에 1907년(순종 1) 사립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를 윤상은과 장우석이 설립하면서 '교육 구국(敎育求國)'운동 분위기가 고무되었다. 이 학교는 안희제가 학교장으로 잠시 있었고, 윤현진(1회, 상해 재무차장)과 김철수(3회, 동경 2.8독립선언), 손진태(4회, 한국민속학 개척자), 윤인구(4회, 부산대 초대 총장, 윤상은의 장남)가 이 학교 출신이다. 사립명진학교는 동래부 참사관 최덕의 도움을 받아 동래부의 후원 아래 당시 면장이었던 조우식(趙宇植), 지양윤(池楊潤) 등 사상 지역의 유지들이 출자하여 1910년 4월(순종 4)에 설립하였다. 교사(校舍)는 지금의 사상역 오른쪽으로 대한통운 앞에 건립하였는데, 기와지붕의 구식 건물이었다. 교문으로 세워 놓았던 2개의 석주(石柱) 중 한 개에는 '경상남도부산부사상면(慶尙南道釜山府沙上面)', 또 한 개에는 '사립명진학교(私立明進學校)'라고 새겨져 있었다. 초대 교장은 면장을 역임한 지양식, 2대 교장은 모라 출신인 강대성이었다. 당시의 교육 연한은 3년이었으며 사용한 교과서는 『맹자(孟子)』, 『산학통편(算學通編)』, 『초등대수학(初等代數學)』, 『고등소학이과(高等小學理科)』 등이었다.

1909년 당시 사상의 인구나 생산력이 별로 높지 않았는데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사상 지역의 높은 의식과 향학열, 근대화에 관한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명진학교는 1910년 11월 교직원 8명, 학생 75명에 1년 경비가 945,000원이 들었다. 오택이 학교 다닐 때 학교장은 정상완(丁尙完 )이었다. 그는 동래부 향교 장의(掌議)를 역임 후 동래부 향교 도유사(都有司)가 되었다. 1913년 사상면의 면장, 명진학교 교장, 부산진농진회 평의원으로 재직하였다. 당시의 명진학교의 교장은 향교 출신으로 사상면 면장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전통적 유교적 경향이 높았던 것 같다.

동래 남상면(南上面, 현 부산시 동래구 망미동)의 사립동명(東明)학교에서 경남학생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1907년 11월 동명학교는 동래기영회가 삼락학교와 개양학교를 흡수하여 설립한 학교이다. 동명(東明)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뜻하는 '동명지광(東明之光)'을 뜻하였다. 학교설립의 목적은 "야만과 우매를 벗어나고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은 오로지 새로운 학교 교육에 달려있으니, 이 교육 문제가 우리 국민 우리 가정의 급무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08년 학부의 승인을 받았으나 운영 경비가 없어 동래부윤 한치유(韓致愈)이 애써 경비 마련을 하고 서삼리(西三里)에 거주하는 유지 이순우(李舜雨)가 자기 소유 논 17두지(拾七斗地)를 저당잡혀 100환을 출연하였는데 당시 임원은 강우규, 서윤홍(徐潤洪)이었다.

동명학교 출신으로 의열단원 문시환(1897~1973)이 있다. 1923년 최천택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부산 연제구 연산동 출생으로 1912년 동래동명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교사였던 김병규의 영향을 받던 중 3학년때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돕다 3.1운동 후 안희제가 중심이 되어 1919월 11월에 설립한 기미육영회 외국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学園) 2년 수료 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1922년 조선으로 돌아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의 기자가 되었다. 1923년 상하이 국민대표회에 경남기성회 대표로 참석했고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 계열의 개조파 간부로 활동했다. 6월에 의열단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 운동을 국내에서 한다. 이 당시 의열단장 김원봉의 지시를 받아 국내에 잠입한 강일(강홍렬, 1895~1958)은 박재혁의 친구인 "부산진 좌천동(佐川洞) 최천택(崔天鐸)과 만나 함께 동래읍내 허영조(許永祚)를 동래의원으로 방문하였다. 문시환(文時煥)을 불러 지내며 김원봉으로부터 받은 신임장과 권총, 부호에 대한 협박문, 조선인 관공리(官公吏)에의 사직권고문과 함께 의열단 선전문을 지참하였음을 알리고 자기와 함께 이를 사용해서 자금모집을 해야 한다"고 김원봉의 명령을 전했다. 이 사건으로 문시환은 '의열단 제 3차 암살파괴의거'에 연루로 체포되어 2년을 복역했다.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경남도지사 등을 지냈다.

사립명진학교에 남형우가 오다

오택(15세)은 1911년 명진학교 4학년이 되었다. 오택은 사립명진학교의 대표로 경남학생연합회에 참석하였다. 각 학교 대표 수백 명이 참석하여 사회자가 열렬한 개회사를 할 때 갑자기 일본 헌병 수십 명이 들이닥쳐 해산명령을 하였다. 강제병합 이후 학생의 모임이 자칫 항일 배일운동으로 번질까 염려한 것이리라. 해산에 불응하자 칼을 뽑아 위협을 하였다. 부득이 사회자 조학래가 붉은 방망이로 연단을 두드리면서 슬프고 분한 말투로 "학생 여러분, 오늘 학생연합회 창립 총회를 할 수 없게 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해산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해산 선언을 하였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해산하며 온천장 뒷산 숲으로 집합하여 비밀 간담회를 하고 해가 저물어 해산하였다.

비밀회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전체 회합은 일본 헌병경찰로 인해 불가능하니 각 군별로 조직하여 서면 연락하기로 한다. 국권회복의 결사를 위하여 시기를 기다린다. 교내에 토론회를 매주 토요일 오후에 개최하여 이론투쟁 연습을 한다. 당시 집회는 동명학교에서 하였다. 동명학교는 1916년 동래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 1919년 동래 장날 만세운동의 중심이 되는 학교가 되었다. 오택은 이날 이후 학교로 돌아가 정치생활을 시작하였다. 학생대표로서 오택은 매주 토요일 전교생 회합을 하고 토론회를 시작하여 간혹 서신으로 군(郡) 연합회에 연락하였다. 학생들은 회합을 끝내고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나네. 낙낙장송 큰 소나무도 까아야만 동량되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벽상의 계종을 들어보시오. 한소레 두소레 가고 못오니 인생의 취(醉)감이 주말같도다." 학도가를 부르며 헤어졌다.

오택이 이렇게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된 계기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그 계기 중의 하나가 1910년 교남학우회의 남형우(1875~1943)의 학교 방문이 아니었을까? 남형우는 경남 고령 출신으로 1908년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가입하여 평의원이 되었고, 서상일·안희제·김동삼·이원식・박중화 등의 회원은 1909년에의 청년 중심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소속되어있었다. 대동청년단의 단장은 남형우, 부단장은 안희제로 비밀결사 지하운동을 전개했으며 단군을 믿는 대종교도들이었다. 대동청년단은 영남 출신 우국지사들의 집합체였다. 남형우와 윤현진은 임정의 각료로 나중에 활동했다.

남형우는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보성전문학교 학감·교감·교장 등으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5년에는 경북 달성군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에 가입하여 활동 하였다. 부산의 백산상회에 출자하며 상업견습하는 척하며 조선국권회복단 부산지역 연락망을 조직・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남 창원군 등지에서 시위를 적극 주도하였으며, 1919년 3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대통령 손병희) 산업총장(産業總長)에 선임되기도 했다. 그러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과 법무총장, 교통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2년에는 부일 협력자를 처단하는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활동하였다.
 
 경북 고령의 연조공원에 있는 남형우 순국 기념비이다.
▲ 독립투사 남형우 순국 기념비  경북 고령의 연조공원에 있는 남형우 순국 기념비이다.
ⓒ 두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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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5월 3일 남형우가 사립명진학교에 와서 당시 학교 관계자와 학생들에게 연설하였다. 학교설립을 통해 계몽운동과 국권 회복을 위한 자강을 강조하였던 시절이었다. 사립명진학교 학생이었던 오택, 김형기, 황용주 등은 감화되어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게 하였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사상은 만 사람을 행동하게 한다. 한일강제병합이 조인되기 직전이었기에 민족의 위기는 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아마 다음과 같이 연설하지 않았을까?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서 배출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영남 인사의 완고함과 인색함과 촌스러움과 어리석음으로 신문명의 수용이 다른 지방에 비해 낙후되어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있다. 심지어 학교가 개교되었음에도 교육이 지지부진한 형편에 있다.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민족 애족을 확대하여 민족적 역사의식을 일깨워야 한다. 의병과 같이 총칼로 투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족의 구국 역량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 청년 학도들은 나라의 보배이니, 보배로서 올바른 능력을 길러 나라를 자주권을 회복하는 힘써야 할 것이다."

사립명진학교는 1920년 5월 5일에 학제 개편에 따라 사상공립보통학교(현, 사상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될 때까지 사립학교로 운영하였다. 1912년 3월 오택은 사립명진학교를 졸업하였다. 사립명진학교 관련 자료는 1951년 1월 한국전쟁 당시 학교에 주둔하였던 미군의 실화로 소실되었다.

경성의전 학생 김형기와 황용주・양봉근, 서울 탑골 만세운동에 나서다

오택이 사립명진학교를 다녔을 때, 동산(東山) 김형기(金炯綺, 1896~1950?)와 황용주(黃龍珠, 1898~1955)가 이 학교에 다녔다. 황용주는 오택과 동기생이었다. 이들은 오택과 같이 토요일 전교생 회합 토론회를 같이 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동래고보에 다녔던 김형기와 황용주가 의사가 되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오택은 부산상업학교 2학년 때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은 적이 있었다. 훗날 경성의전에 다녔던 김형기와 황용주는 1919년 3월 탑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박재혁의 친구이자 동지인 최천택은 김형기를 1919년 3월 만세운동 전에 서울에서 만났는데, 부산상업학교 동기인 오택과의 인연 때문으로 서로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동산 김형기는 3·1운동 당시 학생대표로써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파고다 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고 전한다. 삼일만세운동 피의자 1호가 바로 김형기이다. 그는 1년의 형기를 마친 후 그는 복학하여 의전을 졸업하고 울산과 기장에서 공의로 근무하다가 1930년대에 부산 영주동에 동산병원을 설립하였다. 당시 부산의 독립운동 자금이 모두 이 동산병원에서 나왔다고 전하는데 김형기의 친구였던 소정 최천택이 동산에게 독립자금을 받아 이를 상해에 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동산 김형기는 경성의전 시절 1919년 3월 탑골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부산에서 동산병원을 운영하며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 동산 김형기와 그의 추모비 동산 김형기는 경성의전 시절 1919년 3월 탑골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부산에서 동산병원을 운영하며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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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병원은 부산지역 사상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했다. 해방이 되자 김형기는 미군정청의 수석 고문에 초빙되었으며 귀환 동포의 구호에 진력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경상남도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당시 최천택은 구사일행으로 살아남았지만, 김형기는 이후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마 한글학자이자 부산 기장 출신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과는 외사촌 간이라는 오해 때문인 듯하다고 후손들은 추측하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김형기의 업적과 해방 이후의 행적이 알려지지 못하였으나 유족의 노력으로 1990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가묘가 1908년 서병희 의병이 일본인을 척살한 양산시 하북면 성천마을에 있다. 그는 1919년 전후 양산 상북면 외석리에 살았다.

황용주는 1913년 3월에 사립명진학교를 졸업하고 동명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1917년 동래고보를 졸업하였다. 1918년 9월 경성의전에 입학하고 1919년 3월 1일 탑골(파고다 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5일 보안법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개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소를 운영하며 살았다.

또 당시 경성의전 출신으로 양봉근(1895~1990)은 재학 중 만세운동을 하고 구포로 내려와 자신이 한때 근무했던 구포의 사립화명학교(현 사상초등학교에 통합됨) 교사였던 임봉래, 윤경, 유기호 등을 만나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의 시위 소식과 독립 선언서를 전달했으며 구포 지역에서의 의거를 일으키라고 독려한 뒤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3월 29일 구포 장터 만세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다. 1921년 한민족에 차별하는 일본교수퇴진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퇴학을 당한 후 자력으로 의사면허를 취득하여 울산에서 개원하였다. 1927년 신간회 울산지회에서 활동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그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경성, 회령을 거처 만주 신경(현, 장춘)으로 옮겼다.

점차 아이들은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단지 보고 듣는 아동의 수준이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국권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행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오택의 삶은 한일강제 병합으로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섰다. 그것은 개인의 삶이 아닌 정치적 삶이요, 그것은 역사에 복무하는 삶이었다.

한편 밀양 영남루 아래 남천 강변 햇살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강에서 놀던 밀양의 아이들은 1910년 8월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은 서당을 다니다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강제 병합으로 조선어 대신에 학교에서는 일본식 교육과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김원봉은 일본어 수업시간에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는 등 저항을 하였다. 그는 반일 감정은 점점 항일 행동으로 나타났다. 1911년 4월 29일 일본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행사가 밀양공립보통학교에서 있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 변소에 처박았다. 화장실에서 발견된 일장기 사건으로 학교는 발칵 뒤집어 졌다. 결국 사건의 주모자였던 김원봉과 윤세주는 학교를 자퇴했다. 이 일로 밀양 읍내의 동화 중학 2학년에 편입을 했다. 그곳에서 김원봉은 평생 삶의 지침을 가르쳐 준 전홍표 교장을 만난다. 그는 늘 서릿발 같은 기개로 아이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가 목슴이 붙어 있는 한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빼앗긴 국토를 다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언제나 슬프고, 또 언제나 비참하다. 미래는 너희들 것이다. 너희들이 분기하지 않고 대체 누구 조국 광복의 대압을 이룰 것이냐!"

김원봉과 윤세주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부산의 정공단 아이들에게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밀양하면 김원봉이라는 이름을 새겨놓았다.

친구 누나 양유식의 사랑이야기

좌천동 224번지에서 태어난 부산진공립보통학교 2회 졸업생인 양성봉(1900~1963)의 누나인 양유식의 연애사건이 아이들에게 알려졌다. 양산 출신 권순도가 영국 세관장 딸과 연애하였던 세관장 관사에서 이번에는 서양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 사이의 연애가 있었다. 세관 관사가 미국 의료선교사 C.H.Erin(어을빈 魚乙彬, 1862~1935)과 간호사 양유식(1888~?)의 26살 차이 나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랑의 공간이 된다. 당시 부산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는 사랑의 공간이었다.
 
미국 의료 선교사 어을빈은 한국인과의 사랑으로 유명하다.
▲ 어을빈의 만병통치약 미국 의료 선교사 어을빈은 한국인과의 사랑으로 유명하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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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3월 의료선교사로 C.H.Erin(어을빈 魚乙彬, 1862~1935)이 부산에 왔다. 그는 전킨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 원장으로 의술을 펼치고 병원에서 치료받은 녹산사람 배성우와 밀양사람 고삼종을 전도하여 생곡교회와 밀양교회를 설립하도록 도왔다. 또 국내 최초로 나병환자 치료 의료봉사도 하였다. 그의 부인인 베르타(Bertha Kimmerer)여사 역시 의료선교활동과 여아를 위한 야간학교인 규범학교(閨範學校)를 설립 운영하였다. 당시 양산읍 교회 설립에 관여한 정준모 장로가 1907년부터 협력했다. 

리즈 헌터와 권순도가 사랑에 빠진 세관장 관사에 1903년 8월에 그는 어을빈 병원을 세웠다. 그는 활명수와 비슷한 만병수(萬病水) 만들어 팔아 부자가 되었다. 신비의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종기, 부종, 신경통, 심지어 반신불수, 급성매독, 기관지염에도 특효약이 되어 날개 돋치듯 팔렸다. 부산뿐만 아니라 평안도와 제주도에까지 대히트를 쳤다. 1년 매출액이 20만원에 달했고, 그는 이을빈제약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는 수익금 30만 원을 백산 안희제를 통해 상해임정에 헌납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26살 차이가 나는 사랑이 찾아왔다. 병원의 간호사 양유식과 파격적인 사랑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양유식은 아버지 양덕유가 비교적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여 1901년 세례를 받았고, 어머니 한영신도 교회연합회 회장과 경남여전도회연합회 회장을 지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 집 가족은 근대 문물에 매우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고종 41) 11월 30일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가 2년 후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런 이유로 외국인과의 소통과 교제가 자연스러웠다. 용모가 아름답고 영리하며 영어도 곧잘하는 양유식과 유뷰남 어을빈이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1911년 어을빈의 아내는 이혼을 하고 자식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규범학교는 일신여학교에 병합되었다. 어을빈은 북미장로회 산교본부의 소환에 불응하고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부산에 양유식과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양유식은 충격 때문인지 폐결핵을 앓고, 치료차 초량에 머물다가 일본인 보험회사 직원과 또 사랑에 빠져 동거를 한다. 의문의 화재로 그녀 집이 불타고 그녀는 충격으로 사망을 하였다. 하지만 어을빈의 사랑은 그녀가 죽어서도 식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좌천동 증산 공동묘지에 매일 꽃다발을 들고 갔고 사흘마다 무덤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부산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공간이었다.

양유식의 남동생인 양성봉은 부산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공립상업학교를 거쳐 부산철도국 서무과, 울산 서생면 교사를 하다가. 1919년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복역을 하였다. 그 후 어을빈 제약 회사에서 일하며 부산진교회 어린이 주일학교 교장지내고 어을빈 사후 병원 경영에 참가하고, 주기철 목사의 초량교회 장로, 초대 부산시장을 지낸 양성봉이다. 그 역시 정공단의 아이였다. 그의 셋째 누나 양한나(1893~1976)는 부산진일신여학교(1회) 출신으로 상해 임정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YWCA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 운동과 유아 교육에 몰두하였으며, 광복 후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에 취임하고, 부산애국부인회장으로 여성운동과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세상이 험난하고 나라가 망해도 어딘가에 사랑은 이루어진다. 사랑이 없는 세상은 허전하고 허전하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만큼이나 애절한 것도 없다. 타인의 눈에는 불륜이지만 당사자들에게 애틋한 사랑이다. 사랑은 법적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좌천동 317번지에 출생하였으나 사상면 주덕리 749번지에 거주하였던 왕치덕이 1911년 4월 부산상업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정공단 아이들 중에 가장 먼저 진학하였다.

태그:#오택, #사립명진학교, #사상초등학교, #김형기, #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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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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