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가끔 나는 대학 1학년 때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을 어떻게 쓸 것인가>(지금은 <논문 잘쓰는 법>으로 출간)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디로 갔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글을 쓰는 일로 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떻든 나는 하루에도 원고지 수십매씩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그게 공문서이기도 하고, 기고문이기도 하고, 블로그에 쓰는 잡글이기도 하다.

이 책이 얼마나 강렬했기에 나에게 그런 인상을 주었을까. <논문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통해 나는 스스로 끌어갈 테마를 선정하고, 자료를 모으고, 논문으로 풀어가는 법을 배웠다. 결과적으로 내 학부 논문은 '한국 페미니즘 문학 연구'라는 거창한 주제였고, 22명의 여성작가의 대표작을 분석하는 이상한 짓이었다. 학부였기에 선생님들이 애교로 봐주었지, 대학원이라면 곧바로 웃음부터 받을 내용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표지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표지
ⓒ 열린책들

관련사진보기

 
칼럼 통해 미디어 리터러시 강조

이후 에코의 책은 많이 들어왔지만 그의 광범위한 지적 행로를 따라가는 게 무리라 별로 보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만난 책이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에코가 시종 미디어 리터러시를 강조하는 것에 놀랬다. 물론 책 전체로 본다면 사회 리터러시다. '사회를 좀 분석적으로 읽어라' 하는 내용이다. 에코가 쓴 잡문을 모은 마지막 책인 이 책은 로마의 시사잡지 <레스프레소>에 '미네르바의 성냥갑'이라는 칼럼으로 연재한 것을 모았다. 1985년 3월부터 13년간의 글이다.

책을 관통하는 핵심 테마는 유동사회다. '유동사회'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바우만은 국가나 정당의 위기가 고조되고, 개인에게 조직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심어주던 가치공동체도 위기라고 봤다. 결과적으로 확고한 기준점이 부족해 모든 것이 어느 정도씩 유동하는 상황이 나타났다고 봤다. 이런 상황은 법에 대한 믿음을 잃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의 눈에 띄려는 기준점 없는 개인의 무절제한 소비 등으로 나타난다고 봤다. 하지만 소비가 답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고, 다시 새로운 소비를 찾아 헤매는데, 에코는 새로운 모델의 핸드폰을 쫓아가는 현상도 이런 경향으로 봤다. 문제는 이 해답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에코는 "우리가 유동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런 사회를 이해하고 극복하려면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 정치인과 지식인이 이 현상의 의미와 파장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결국은 이 개념을 말한 바우만은 '광야의 외로운 늑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눈에 띤 것은 '미디어 리터러시'다.

2부 '인터넷 세상'에 관련 내용이 많다. 우선 아이들이 자료 등에서 인터넷에 너무 의존하는 것을 지적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온라인으로 접하는 자료의 적정성 여부를 선별할 수 있는 기술을 학교에서 주요 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교사들조차 학생들과 매한가지로 그것을 구분해 내지 못해 난감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66페이지)
 
'교사는 어디에 필요할까'라는 칼럼에서는 더 광범위하게 미디어 리터러시를 강조한다. "매체들이 우리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방식을 두고 토론을 벌이고, 신문과 방송마다 그 독특한 논조와 타당성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곳은 학교 뿐이다"며, 학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강조한다. 구체적인 내용도 있다.
"인터넷은 학생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만, 그 정보를 어떤 목적에 맞게 어떻게 찾을지,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거르고 선별할지, 또 어떤 기준으로 수용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교사는 인터넷이 알파벳 순서로 제공하는 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묶으려고 매일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아직 못했다고 자책하지 말고, 빠른 시간에 도입할 것을 말한다.

방향 잡지 못한 정부의 미디어 리터러시

현대사회를 날카롭고, 유쾌한 단어로 관통하던 에코가 이렇게 미디어 리터러시를 강조한 것은 미디어가 가진 독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보기에 이탈리아 학교 교육에서 미디어 리터리시가 전혀 틀을 잡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 한국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는 두 그룹으로 분리되어 있다. 인쇄 매체쪽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관련 역할을 해왔고, 방송은 시청자미디어재단이 그 역할을 맡아왔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은 2017년부터 분기별로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무크지를 발행하고 있다. 주된 독자층은 언론인과 일반인들로 언론학자들이 중심 필자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면이 강조되는 매체다. 때문에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콘텐츠로 보기에는 어렵다. 시청자미디어재단의 경우 홈페이지에 미디어리터러시라는 메뉴를 만들었으며, 수업지도안 등을 올렸지만 호응은 많지 않다. 금년 들어 미디어 리터러시 관련 예산이 세워졌지만, 주된 활동은 가짜뉴스 검증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초보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미디어 전반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금준경 기자가 진행한 교사 대상 미디어리터러시 강의 목차 미디어 전반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현재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한 가장 돋보이는 콘텐츠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오늘>과 교사연수전문회사 에듀니티가 같이하는 원격 직무 프로그램이다. <미디어오늘> 금준경 기자가 진행하는 동영상 교육 과정인 '새로운 디지털 공동체를 위한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과정은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의 개념으로 시작해 유튜브, 인터넷, 가짜뉴스, 인터넷 광고, 온라인 공간의 혐오, 실천 가이드 등을 체계적으로 강의하고 있다. 현재 10여 개의 댓글이 올라와 있는데, 미디어 리터러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평이 주류다. 교수 연수 과정을 시작으로 <미디어오늘>도 '주니어 미디어오늘'(www.nextliteracy.co.kr) 사이트를 신설하고, 무크지 <리터러시 나쁜 뉴스 해독제-001>를 출간했다. 이밖에도 페이스북 페이지로 활동하는 '전국미디어리터러시교사협회'도 비교적 활발한 커뮤니티다. 교사들 중심으로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한 정보를 주고 받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염려와 달리 미디어가 상당히 빠르게 발전하는 한국에서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도 아직은 초보단계다. 우선 언론진흥재단과 시청자미디어재단으로 분산된 정부내 관련 조직을 통합해 조직을 확대개편할 필요가 있다. 이후 교육 과정에 미디어 리터러시 과정을 필수로 넣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디어 리터러시 전문 인력풀도 필수적이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취지를 담고 있다
▲ 에듀니티 미디어 리터리시 연수 과정 소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취지를 담고 있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태그:#미디어리터러시, #리터러시, #시청자미디어재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