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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많은 승객들이 오가는 서울 지하철5호선 마장역. 그 출구 바로 옆 한적한 길가에는 지나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혀 알지 못하는 뜻밖의 역사적 장소가 있다. 3번 출구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마장동 791번지. 그곳에서는 무려 75년 동안 수많은 음악이 녹음되었고, 음반이 제작되었다. 한국 음반 제작 역사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숱한 대중음악 걸작을 만들어낸 곳
 
마장동 녹음스튜디오의 현재 모습
 마장동 녹음스튜디오의 현재 모습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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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찾은 2월 19일, 공교롭게도 791-2번지에 자리 잡은 녹음스튜디오는 문을 닫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유니버살스튜디오 또는 마장동스튜디오라 불리며 숱한 대중음악 걸작을 만들어낸 곳이다.

LP에서 테이프, CD에 이르기까지 음반의 화려한 시절 한 가운데에 있었던 스튜디오는,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음반을 밀어낸 음원의 시대가 열리면서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10년 LP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한동안 사라졌던 제작 업체도 다시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녹음실로 간판을 바꾸어 명맥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

녹음스튜디오로서 역사만도 반세기가 훌쩍 넘지만, 이 특별한 공간의 음악 내력은 거기서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간행한 <2013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마장동>에는 지난날 유니버살스튜디오 운영자이자 당대 최고의 녹음기사로 활약한 이청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는데, 마장동에 녹음실이 자리 잡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이청
 1960년대 중반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이청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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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가 왜 마장동에 자리 잡게 됐냐면 (중략) 나와 함께 공장으로 허가를 받은 동업자 분이 이곳에 있던 영창피아노 직원이었어요. 원래 이곳이 1950년대쯤 영창피아노 공장이 있던 곳이에요. 영창피아노 회사가 이사를 가면서 나랑 동업하던 분이 그 공장 건물을 인수하면서 스튜디오도 여기서 함께 마장동에 자리 잡게 된 겁니다."

피아노 회사가 이사를 가게 되어 그 공장 건물을 인수해 스튜디오를 열었다는 이야기인데, 이청의 증언에는 한 가지 빠진 점이 있다. 피아노 회사, 즉 영창산업은 마장동 공장에서 음반도 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2년 간행 <한국연예대감>에 실린 고려레코드제작소 공장 주소 마장동 366번지와, 1969년 간행 <1970년판 영화·연예연감>에 실린 유니버살레코드사 녹음실 주소 마장동 366번지가 동일한 것은 바로 그 점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정리해 보자면, 고려레코드 또는 유니버살레코드라 불리던 영창산업의 음반회사가 1960년대 중반 어느 시점에 상표·부지·운영권 등을 모두 이청과 그 동업자에게 넘긴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청의 동업자는 1968년 무렵부터 유니버살레코드 대표로 등장하는 허진으로 보이며, 유니버살레코드 운영권 변동에는 1965년에 처음 제정되어 1968년 연초부터 시행된 '음반법'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1960년대 주소와 현재 주소가 다른 이유는 1968년 무렵 지번 변경을 통해 마장동 366번지가 791번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969년 연감 수록 주소가 여전히 366번지인 것은 아마도 변경 전 주소를 관행적으로 그냥 기재한 결과로 보인다. 791-2번지 녹음스튜디오 바로 옆, 지금은 음악과 아무런 관련 없는 건물이 들어서 있는 791-1번지도 1960년대에는 유니버살레코드 공장으로 음반을 찍어 내던 곳이었다.
 
1954년 유니버살레코드 광고
 1954년 유니버살레코드 광고
ⓒ 경향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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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창이 대표로 있었던 영창산업의 유니버살레코드는 1954년 9월부터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봄날은 간다> 등 첫 작품들부터 큰 히트를 기록했기에, 유니버살레코드는 전후(戰後) 6대 음반회사 중 선두주자로 앞서 갈 수 있었다.

1950년대 SP, 즉 유성기음반은 물론 1960년대 LP까지 다수 제작했던 유니버살레코드였지만, 초창기에는 녹음 관련 설비나 기술에 미비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첫 작품들을 녹음한 곳은 마장동이 아닌 중앙청 공보처 녹음실이었고, 당시 마장동 366번지 공장에서는 음반을 찍어내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앞서 보았듯 유니버살레코드는 고려(또는 코리아)라는 상표·상호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유니버살레코드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음악 역사와 또 관련이 있다. 유니버살레코드의 전신(前身)으로 고려레코드라는 음반회사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레코드가 유니버살레코드로 바뀐 과정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나, 운영자는 달랐어도 연결점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고려레코드 공장 주소 또한 바로 마장동 366번지였기 때문이다.

설립, 음반 제작 모두 '최초'... 고려레코드 
 
1946년 고려레코드 첫 광고
 1946년 고려레코드 첫 광고
ⓒ 한성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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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레코드는 1920년대부터 연주·노래·출판·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 활동을 펼쳐 온 최성두가 설립한 음반회사였다. 광복 이후 1년이 채 안 된 1946년 7월에 첫 광고를 낸 고려레코드는 이듬해 8월 <애국가>를 첫 음반으로 발매했고, 계속해서 1950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가거라 삼팔선>, <울고 넘는 박달재> 등 인기 대중가요도 제작했다. 이른바 '국산' 음반의 효시가 고려레코드였던 것이다.

고려레코드보다 조금 늦게 최승일이 설립을 시도한 음반회사나 조선레코드라는 곳에서도 1946년 음반 제작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 성공을 거둔 곳은 고려레코드뿐이었다. 작곡가 황문평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음반을 제작한 곳이 부산 코로나레코드라고 생전에 회고하기도 했는데, 그의 기억과 달리 코로나레코드는 1948년에 설립되었음이 자료로 확인된다. 고려레코드는 회사 설립, 음반 제작 모두에서 한국 최초의 존재였다.
 
1947년 고려레코드 첫 음반 발매 광고
 1947년 고려레코드 첫 음반 발매 광고
ⓒ 현대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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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전에도 물론 한국어 음반이 다수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전부 일본 음반회사의 일본 소재 공장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음반회사 서울 지점에서 임시 또는 상설 스튜디오를 마련해 녹음은 일부 가능해지기도 했지만, 제작 설비는 광복을 맞을 때까지 끝내 들어서지 않았다. 고려레코드의 마장동 366번지 공장은 그래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역사적 의미를 품고 있다.

1946년부터 2021년 지금까지 약 75년이 흐르는 동안, 번지수도 바뀌었고 운영자나 상호도 여러 번 바뀌었고, 공간의 역할 또한 제조 공장에서 녹음실로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든 마장동 366번지, 현재 791번지가 한국 음반 제작의 발상지이고 지금껏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변함없이 분명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광복 직후 이른바 '해방기'에 하고 많은 어려움을 딛고 첫 국산 음반을 만들어 낸 선구자들, 또 그 길을 이어 온 계승자들. 오늘 우리 후인들은 그 선인들을 기리는 무언가를 마장동에서 조금이나마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태그:#고려레코드, #유니버살레코드, #마장동스튜디오, #마장동, #최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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