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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작가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는 저자가 독서 교실을 운영하며 어린이를 만나왔던 경험을 담고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당연하게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존재들이다. 그저 귀엽고 미성숙한 존재도, 아직 '꽃피지 못한 존재'도 아니다. 운동화 끈을 묶는 법을 열심히 연습해 온 아이는 "어른이 되면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야"라는 저자의 위로에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라는 말로 대답한다.

지금 우리는 어린이에게 시간을 주고 있을까. 노키즈 존이 비난에 못 이겨 '노 배드 패런츠 존(No bad parents zone)'으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고 한다. 언뜻 보면 아동을 배제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는 어른의 엄격한 통제 아래에서만 입장이 가능해지고, 그럼에도 점주가 '배드' 하다고 판단하는 아동은 내쫓길 수밖에 없다. 아동이 울고 보채는 것이 거슬려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바꾸어 적었을 뿐 결국 '배드 패런츠 존'은 노키즈 존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사회는 어린이에게 어른을 보고 배울 기회를 가질 시간을 빼앗았다. 예의를 배울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예의 있는 어린이가 되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욕심 바깥에서 현실의 어린이를 마주치는 순간들은 사라져 갔다.

화면 속의 아동을 소비하는 방식
 
왼쪽부터 일본 동요 어린이 대회 콩쿠르,〈내일은 미스트롯2〉화면 갈무리
 왼쪽부터 일본 동요 어린이 대회 콩쿠르,〈내일은 미스트롯2〉화면 갈무리
ⓒ TV Asahi, TV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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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전혀 아동에게 친절하지 않은데 미디어에서는 달랐다.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만을 비추는 미디어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시작으로 아동이 콘텐츠가 되는 방송이 쏟아졌다. 아동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철저히 어른의 시각에서 아이를 감상하는 데 그친다는 것이다. 아이의 '보기 싫은' 모습은 편집되고, 엉뚱하고 귀여운 모습만이 클립으로 조각나 돌아다녔다.

2020년 이전까지는 '노키즈 존'으로, 2020년 이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이 거리에서 사라졌지만 화면 속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아이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연초부터 커뮤니티를 휩쓴 일본 동요대회 수상자 '노노카'도 그중 하나였다. 3살 된 아이가 노래를 부르며 귀엽게 율동하는 영상이 올라온 이후 사람들은 아이가 나온 모든 영상을 그야말로 발굴했다. 대회를 위해 연습하는 영상부터 한국인의 성원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보내는 아이의 영상까지 SNS를 타고 떠돌았다.

그러나 아이를 귀여워하는 마음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노노카의 영상에서 "한국에도 우동이 있냐"는 질문이 나오자 일부 한국인들은 갑자기 애국심을 불태우며 아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타인 인식이 어려운 3살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호기심임에도 불구하고 '배신당했다'며 분노하는 사람들의 악플이 쏟아졌다. 

<내일은 미스트롯2> 초등부에 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초등학생끼리 경쟁하는 모습을 소비하게끔 만든 폭력적인 기획 아래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시청자들이 평가할 대상이 됐다. 무대가 귀엽다며 소비하던 사람들은 아이가 탈락을 앞두고 눈물을 보이자 '어른스럽지 못하다'며 비난했다. 자신이 귀여워했던 모습 이외의 행동을 보이는 아동에게는 등을 돌린 것이다. 우리는 아동을 현실에서 환대하는 법을 잊은 것만 같다. 그저 아동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였다

부끄럽지만 나의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는 지하철 한복판에서 개다리춤을 췄던 일이다. 유치원에서 배웠던 춤을 선보이자 지하철 안의 몇몇 사람들이 손뼉을 쳐주기에 더 신나서 열심히 췄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 기준으로 상상하면 아찔하다. 유튜브에 올라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손뼉을 쳐주셨던 그분들 덕분에 멋진 어른이 됐다고 말하면 비약이겠지만 아동이기에 받았던 무조건적인 환대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은 것은 분명하다.

진짜 아이들과 마주치는 순간은 그래서 소중하다. 아이를 '감상'하는 것을 넘어 한 아이에게 처음으로 세상의 환대를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행동에 손뼉까지 치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말실수를 하는 아이, 대중교통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영화관에서 "신기하다!"며 소리치는 아이, 식당 의자에서 뛰어노는 아이에게 날 선 시선을 보태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어른이라도 되어보자는 거다.  

미디어가 심어 놓은 '완벽한 아이'에 대한 환상을 버리자. 우리는 한 번도 완벽한 아이인 적이 없었고,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 역시 그렇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른이 될 때까지 누려왔던 무조건적인 환대를 지금의 아이들에게 나눌 때 우리도 아이들이 만들 세상에서 환대받을 자격이 생길 것이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된다." -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청년언론 <고함20>에도 실립니다.


태그:#아동, #아동혐오, #아동미디어, #노키즈존, #노배드패런츠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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