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신탄(장작과 숯)을 땔감으로 사용했는지 그 시기를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신라 시대 서라벌 도성의 귀족들이 연기와 그을음을 피하려고 숯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는 기록으로 미뤄 장작도 그즈음, 아니 그 이전부터 취사용으로 사용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일반 가정의 땔감은 장작이었다.  

조선 빈민들 '가난'과 '물가' 이중고에 시달려

1930년대 중반 군산은 불량주택(가는 나뭇가지로 얽어맨 기둥에 담 대신 가마니로 둘러막은 가옥)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2만여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도시 빈민층인 그들은 대부분 왕겨를 땔감으로 사용했다. 위생시설이 열악한 조선인 동네는 아궁이의 재(灰)를 길가에 버렸는데,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재가 날려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군산(群山) 지방의 신탄 가격을 보면 작년(1935)에는 장작(長斫) 1원어치를 사면 지게로 한 짐이 되엇엇는데 최근에는 그가 천정을 모르게 등귀하야 2원어치를 사도 한 짐이 되지 못할 현상이며 세민(細民: 빈민)의 생활에 막대한 위협을 주고 잇다. (아래 줄임)"-(1936년 3월 12일 치 <동아일보>)
 
기사 제목('천정부지의 군산 신탄가')에 나타나듯 신문은 급등하는 물가를 지적하며 "장작뿐 아니라 왕겨(租殼)도 한 섬(두 가마)에 1원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형편이라는데. 그 원인은 작년 겨울부터 계속되는 혹한으로 인하야 원산지로부터 출하가 부족함이라 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군산 지방은 연일 계속되는 눈보라로 각지의 포구와 왕래하는 뱃길이 끊겨 노동시장은 극히 한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항과 째보선창의 수천 노동자들이 일감이 없어 하루 양식도 챙기지 못할 형편에 처해있었던 것.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탄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 조선 빈민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선 빈민들의 주 땔감은 '왕겨'

1938년 1월 21일 치 <동아일보>에는 <군산 역두(群山 驛頭)의 '장작'산(山)>이란 제하의 기사와 사진이 실렸다. 이 보도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쳐온 이후 군산의 신탄(薪炭) 가격이 예년에 비해 50% 가까이 폭등(暴騰)하였고, 고가(高價)로 거래되는 이 시기를 기회삼아 각지에서 앞다퉈 입하(入荷)되었다.(현대어로 수정)"라고 짧게 전하고 있다.

장작 쌓아놓은 위치는 기차 화물역 부근(현 역전종합시장 공영주차장)으로 추정된다. 군산에는 기차역 부근을 비롯해 째보선창, 영정(청과시장 부근) 등에 신탄시장(장작거리)이 조성되어 있었다. 째보선창으로는 화목선(장작배)이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육지로는 굵은 통나무와 숯가마가 마소 짐바리로 들어와 장작거리는 항상 붐볐다.

일제의 탄압과 전쟁으로 해마다 절대빈곤이 지속됐던 1930년대 군산, 신문은 4만여 인구를 자랑하는 항구도시로 하루에 수천 대씩의 장작을 소비하고 있다고 전한다. 삼천리가 헐벗도록 나무를 베어다 땠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구척장신의 남자 키보다 훨씬 높게 쌓인 장작더미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가난과 고물가의 시달림 속에서도 솔가지와 장작 구루마가 거리를 메웠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그해 8월 '폭리취체령'을 공포하고 이듬해(1938) '벌목금지령'을 내린다. 이후 물가 통제와 함께 땔나무 체취 단속에 들어가자 시골은 나무꾼이 줄어들고 신탄값은 더욱 폭등하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땔나무 공황에 빠지는 가정도 나타났다.

군산의 대형 정미소들은 총독부 명에 따라 연료를 왕겨로 대체한다. 당시 신문에 따르면 째보선창 부근에 자리한 조선정미회사 군산공장은 굴뚝으로 재 섞인 연기를 내품어 주민들은 맑은 날에도 우산을 쓰고 다녀야 했다. 식수도 멀리에 있는 샘에서 길어다 먹어야 했다. 급기야 주민 50여 명이 회사로 몰려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분노에도 회사와 부청은 외면할 뿐이었다.

일제의 전시체제 돌입으로 '목탄차'와 '장작자동차' 등장
 
 난로용 장작을 쌓아놓은 모습
  난로용 장작을 쌓아놓은 모습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옛 노인들 전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장작은 일본인이나 중상류층 이상의 조선인이 땔감으로 사용하였고, 빈민층과 농촌에서는 생솔가지나 삭정이, 짚, 왕겨, 긁어모은 낙엽 등으로 밥을 해먹었다. 따라서 군산 지역 산과 들은 땔감의 유일한 공급처였다. 들녘에서 짚이 나왔고, 산에서 생솔가지와 삭정이 그리고 나무뿌리를 구할 수 있었다.

장작거리 주변에는 나무장수와 소비자가 직거래하는 풍경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근신 외곽 지역(임피, 나포, 성산, 대야, 옥구, 옥산 등) 나무꾼들이 뒷산에서 밤새도록 채취한 땔나무를 마소 구루마에 싣고 나와 새벽시장에 팔았던 것. 생솔가지나 낙엽 더미를 지게에 지고 나온 나무꾼들은 땔감을 구입한 고객 집까지 배달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즈음 목탄차(木炭車: 숯을 때는 자동차)와 장작자동차도 등장하였다. 일제의 전시체제 돌입으로 연료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가솔린차 내연기관 구조를 숯이나 장작으로 개조했던 것. 장작자동차 연료비는 가솔린차 3분의 1 수준으로, 차체 옆구리에 가마를 걸고 온돌방에 장작 때듯 불을 지펴 연소될 때 발생되는 가스를 동력으로 움직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한다. 이후 공출이 더욱 심해지면서 농촌에서는 썩은 나무뿌리와 뒷산의 진달래 뿌리까지 캐다가 피죽을 끓여 먹는 소작인이 즐비하였다. 이후 조선 농민들은 풋나무 땔감도 구하기 어려운 처절한 형편으로 광복을 맞이해야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태그:#1930년대 군산, #땔감, #장작, #왕겨, #조선 농민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