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6 19:00최종 업데이트 21.02.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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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비달(Frederique Vidal) 프랑스 고등교육연구혁신 장관은 "프랑스 모든 대학의 교육, 연구 활동에서 이슬람좌파주의 관련 조사를 실시하겠다"면서 프랑스 대학에서 이뤄지는 사회과학 분야 연구 활동이 "순수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사상이나 운동에 관여된 것인지 변별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 Public Senat

 
하나의 유령이 프랑스를 배회하고 있다. 그 이름은 '이슬람좌파주의(Islamo-gauchisme)'.

실체도 없고 근본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어감이 서늘한 이 신조어는 전도성 높은 쇠붙이 같아서 뜨겁게 달궈 상대 정파의 심장부에 찍어 누르면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된다는 점이다. 대선을 1년 앞둔 프랑스 정치권에 구태정치의 망령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논란의 첫 진원지는 프레데리크 비달(Frédérique Vidal) 프랑스 고등교육연구혁신 장관이다.

지난 14일 보수 성향의 <시뉴스(CNews)> 채널에 출연한 비달 장관은 "이슬람좌파주의가 프랑스 사회를 타락시키고 있다"면서 정치권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틀 후 국회에 출석한 그는 "프랑스 모든 대학의 교육, 연구 활동에서 이슬람좌파주의 관련 조사를 실시하겠다"면서 프랑스 대학에서 이뤄지는 사회과학 분야 연구 활동이 "순수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사상이나 운동에 관여된 것인지 변별하려는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그러면서 비달 장관은 이를 위해 프랑스의 국립과학연구소(CNRS)에 전 대학의 연구 활동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 이후 몰아치는 후폭풍 속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장관에 대한 변함없는 신임을 표명, 논란을 잠재울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마크롱 대통령 스스로가 이번 논쟁에서 비켜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내년 대선을 앞둔 프랑스 정가에 권력핵심발(發) 사상 검증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셈이다.

교육부 수장이 사상 논쟁의 선두에 서는 일도 흔치 않지만, 대학 내부의 학문 활동을 대학 자치 영역에 두지 않고 국가가 검증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서유럽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이러한 유례없는 일에 지식인 사회도 크게 술렁이고 있다.

지난 20일(토)에는 600여 명의 대학교수와 연구원들이 학문의 자유에 대한 엄중한 침해라면서 비달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 리스트 가운데에는 <21세기 자본>을 쓴 세계적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도 포함돼 있다. 장관으로부터 조사 의뢰를 받은 국립과학연구소도 "의뢰에 대한 조사는 하겠지만 학문의 내용은 대학의 고유 영역"이라는 기본 입장을 밝혔다.

오늘날 사실상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은 대학 제도는 중세 유럽에서 학생과 교수 집단이 자치적으로 구성해 만든 교육체계에서 출발했다. 최고 고등교육이라는 특성상 외부에서 교육내용에 관여하기 어려운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권위를 인정받고 일정한 자치적 운영도 보장받았다. 대학을 뜻하는 영어의 '유니버시티(University)'는 라틴어의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한 것으로 공동체 또는 조합을 의미한다.

이 전통은 현대까지도 이어져 국가가 대학의 학위 체계엔 관여하지만 교육과 연구 내용에 대해서는 '지원은 하되 관여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대학의 존재 근거까지 짓밟으려는 프랑스 마크롱 정권의 이 무모한 시도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무엇보다 '이슬람좌파주의'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2020년 10월 발생한 사무엘 파티 교사 참수 테러를 규탄하는 프랑스 시민들 ⓒ 연합뉴스

 
이슬람좌파주의?

영국의 진보 사상가 크리스 하먼은 중동 지역에서 발생하는 이슬람 운동에 대한 서구 진보 사회의 두 가지 상반된 잘못된 판단을 지적한 바 있다. 첫 번째는 이슬람주의를 반동, 즉 파시스트와 동일시하면서 무조건 적대시하는 태도였고, 두 번째는 정반대로 모든 이슬람 운동을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간주, 진보주의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오류는 이슬람 대중들의 정당한 반제국주의 정서마저 묵인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두 번째의 오류는 중동에서 건강한 진보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없애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그는 진단한다.

이러한 서구 지식인들의 오류는 자신들의 제국주의 역사의 최대 피해자들인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줄이기는커녕 고착시키는데 일조했고, 돌이키기 어려운 서구 기독교 문화권과 동방 이슬람 문화권 사이의 관계 악화를 방조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책임론과 함께 이슬람문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자성론이 서구의 여러 대학에서 탈식민지 이론과 함께 본격적 연구대상이 됐다.

탈식민지 이론(Postcolonialism)은 과거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지역에서 식민지 문화의 잔재 청산과 여전히 지배적 위치에 있는 제국주의 후예들의 착취 구조에 대한 극복을 핵심으로 하는 연구과제다. 원래 제3세계에서 오래 전부터 연구가 되어 왔던 것이 1980년대 이후 서구 사회 가운데 미국에서 가장 먼저 새로운 사회과학 분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제3세계로 역수입이 되는가 하면, 프랑스 등 유럽 국가의 대학에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앞서 언급한 대로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연구와 맞물려 탈식민지이론이 활발히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 자유와 양심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양으로 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정치괴물들이다.

정치인들 가운데에는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우선시 하면서 자신들의 그런 본능과 기질을 인정하고 정치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사적 이익을 얻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공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 그렇게 얻은 권력을 이용해 온갖 사익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공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공적 목표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있다.

이들 모두에게 의회, 언론, 방송 등 정치의 무대들은 공정이라는 룰을 들어 똑같은 표현과 노출의 권리를 준다. 그렇게 주어지는 기계적 공정을 활용해 정치괴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과 은폐, 과장을 일삼는다. 그렇게 이들은 대학에서 이뤄지는 학문의 내용들마저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다.

원래 '이슬람좌파주의'는 극우세력의 단골메뉴로 쓰였던 레토릭(수사)이었다. 이슬람을 참칭하는 테러세력과 이슬람 문화권 전체를 엮고, 다시 이슬람 문화권과 그들의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엮은 후, 그 이론적 근거가 되는 탈식민지 이론을 말하는 학계를 연결시키는 비열한 전략이 그들의 전유물이다. 이렇게 해서 '테러세력을 옹호하는 좌파'가 탄생하게 된다.

유사한 예는 전 세계 곳곳에 얼마든지 있다. 미국 극우세력들은 진보진영을 친멕시코 세력으로 묶는다. 한국의 극우세력들은 역시 진보진영을 친중국 세력으로 묶는다. 프랑스의 극우세력에게 진보는 이슬람 테러를 옹호하는 자들로 둔갑하듯이 미국의 극우세력에게 진보는 불법 이민과 강간, 약탈을 옹호하는 세력이 되는 것이다.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하나의 예외적 사실만 발생해도 그것이 전체를 대신하기 때문에, 외국인 소수자들이 악당이 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같은 메커니즘에 따라 일본에서 지진이 발생하면, 한국인들은 우물에 독약을 타는 사람들이 된다. 100년이 지나도 그러한 공포와 증오의 레토릭이 똑같이 통한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부당함을 고발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좌파 매국노가 된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해지고 열악해질수록 사람들은 그 불안의 근원과 책임소재를 찾으려 하고, 가장 쉽게 타깃이 되는 것이 그 사회의 소수자들 즉 이방인들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연합뉴스

 
마크롱이 극우의 레토릭 사용하는 이유

과거 식민지 경영을 통한 착취, 그리고 전후 70년대까지 이어지는 경기 호황으로 프랑스는 넘쳐나는 일자리를 감당하지 못해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줄고 실업이 늘어나는 80~90년대 이후 이민자들이 제일 먼저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넘치는 일자리를 감당하지 못해 불러들인 이민자들이 이제는 세금을 축내는 외국인으로 전락했고, 이들은 모든 문제의 근본적 진원지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논리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서서히 구축해온 이들이 프랑스의 극우세력이다. 이들은 이제 집권도 넘볼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을 했으며 지난 2017년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와 결선 투표까지 가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마크롱 당시 후보 역시 선출직 경력은 전무한 정치 신인이었으며 따라서 당시 대선은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기존 전통 세력이 모두 1차 투표에서 탈락하는 선거로 기록됐다.

당시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극우파인 마린 르펜 후보의 등장을 막아야 한다는 나머지 정치세력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2차 투표에 마크롱 후보가 아닌 그 누가 왔다 해도 당선이 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무기력한 정치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관료 출신의 젊은 마크롱을 선택했고, 그는 정치 경험이 없는 관료, 학자, 기업인 중심의 새 정치 세력을 구성했다. 그들의 구성원 속에 노동자 계급은 철저히 배제됐다. 그것이 현재의 프랑스 집권세력인 '전진하는 공화국(La République en Marche)'이다.

'이슬람좌파주의 척결'의 완장을 찬 프레데리크 비달 고등교육연구혁신 장관 역시 장관직 취임 직전까지 정치와는 아무 관계없던 생물학자 출신이다. 니스 대학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교수와 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학회 참석 차 미국에 갔다가 총리의 입각 제의를 받고 한 시간 만에 수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급조된 자칭 중도 집권세력은 이제는 한계를 맞는 듯하다. 물론 현재까지는 내년 대선에서 현 집권 세력의 재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다.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실망은 당분간 만회하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극우세력의 확산은 점점 커지고 있다. 집권까지는 아직 멀어 보이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말에 프랑스 국민들이 점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현 집권 세력으로서는 위기다.

'이슬람좌파주의 척결'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극우의 확산을 막지 못한 마크롱 정권이 결국 극우의 레토릭으로 그들로 향하는 표심을 흡수하려는 것이다. 프랑스 정치의 비극은 이렇게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선을 1년여 앞둔 시점에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극우세력으로 흘러가는 표심을 빼앗아 오기 위해 극우의 레토릭을 사용한다면, 과연 그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극우의 레토릭이 설득력 있다면, 그들의 논리가 맞다면, 또 그들의 정책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면, 국민들은 극우를 선택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왜 국민들은 극우를 흉내 내는 '자칭' 중도를 선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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